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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Jun 28. 2022

Back to Basics

급할수록 돌아가라

얼마 전 같은 학교 반도체 학과에 계신 선배 교수님과 아주 뜻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 교수님은 삼성전자 부천 시절부터 칩 설계에 뛰어드신 후, 이동통신용 WCDMA 칩, 그리고 갤럭시 스마트폰 초기 모델 개발까지, 그야말로 반도체 칩 개발의 산 증인 중 한 분이라고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도 까마득한 후배인 내게 질문하실 것이 많다며 먼저 만남을 청하셨다. 그렇지만 그분과의 질의응답보다는, 그분께 듣는 반도체 개발의 산 역사 뒷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웠다. 메모를 남기긴 했는데, 녹음을 못 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그 노교수님과 장시간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현재의 윤석열 정부가 반도체 산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반도체 산업이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주요 먹거리 산업이었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중요한 국가전략산업이고 미-중 갈등이 깊어질수록 전략기술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산업 인력 양성에 대학이 앞장서야 한다는 사고는 굉장히 단선적인 방식이다. 교수님과 뜻을 같이 한 부분은 대학의 역할은 단선적 방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단순한 인력 공급이 아니라, 기존의 다양한 관련 학과들의 이론+실무 프로그램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제도와 지원책을 개선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대학에서, 특히 반도체 관련 전공들이 설치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연구중심대학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성대에는 이미 반도체 시스템공학과가 있다 벌써 설립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삼성전자와의 계약학과다 (졸업생의 90% 정도가 삼성전자에 입사). 이 커리큘럼에서는 반도체의 기본 개념부터 시작하여 설계와 소자, 시뮬레이션과 제작을 아우른다. 그야말로 반도체 산업에 특화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반도체의 이해에 필수적인 고체물리학과 통계물리학, 양자역학을 깊게 가르치지 않는다. 내가 있는 화학공학부에서도 반도체 관련 커리큘럼이 있다. 반도체 화학공정과 전자/디스플레이 재료 같은 과목들이 있다. 재료공학부에도 반도체 관련 과목이 있다. 그리고 공정 관련해서는 기계공학부에도 커리큘럼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수업들의 공유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학공학부 학생이 반도체 화학공정 그 이상으로 소자에 대한 이해나, 소재의 물성에 대한 이해나, 이미지 프로세싱 기반의 검사 장비에 대한 이해나, 후공정에서의 웨이퍼 본딩 장비에 대한 이해를 하고 싶다고 한들, 화학공학부 소속이라면 다른 학부 강의를 듣는 것이 어렵다. 그것은 다른 학부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즉, 특정 전공의 학부생이 반도체 산업으로의 커리어 테크트리를 짠다고 할 때 그것을 적절하게 지도할 교수들도 별로 없으려니와, 학부/전공에 상관없이 수강이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래서는 정말 좋은 인재를 키우는 것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적어도 반도체 관련한 산업을 정말 뿌리부터 키우겠다면 반도체 학과의 외형과 덩치를 더 키우는 것이 아닌, 이론과 실무를 아우를 수 있는 department-wide 커리큘럼을 재편해야 한다. 미니 코스든, 여름학기 프로그램이든, 마이크로 크레디트이든, 형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책상물림으로만 끝나는 공학자가 아닌, 이론부터 차곡차곡 테크트리를 밟고 반도체 산업 전 분야에 대한 실무 교육이 보강되어야 한다. 이미 지자체 단위나 교육부 혹은 산업부 심지어 노동부에서도 반도체 산업 인력 양성 과제가 시행되고 있는데, 그 부분도 교통정리해야 한다. 중복된 프로그램은 행정력 낭비만 초래할 뿐이다.


사실 성대가 그나마 나은 부분은 수원에 있는 자연과학 캠퍼스에 반도체 시스템공학과는 물론, 전기전자공학부, 화학, 재료, 기계공학부는 물론 물리학과 화학과가 같이 있어서 유관 프로그램 만들기도 좋고, 지리적으로도 수원이나 탕정, 평택 등에 위치한 반도체 산업 관련 실무 기업들과의 클러스터링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중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잘하는 것 중 하나는 현업 기준으로는 한물 간 장비와 시설들을 부지런히 배후의 국립대로 계속 이전/기증하여 학생들의 엔지니어링 실습에 활용한다는 것이다. 옐로 룸, 클린룸이 갖춰진 거대한 연구동을 우후죽순처럼 신설하고 관련 전공 학생들이 학부 2-3년 때부터 제대로 된 실습을 할 수 있게 한다. 설계를 위해 Tcad를 배우고 실습을 위해 etching 장비나 포토리쏘 장비를 직접 오퍼레이터와 같이 실습한다. 방진복 입고 광학 검사 실습도 하고 후공정에서의 패키징 공정도 실습한다. 1학기에 배운 이론 과목들을 여름 학기와 가을 학기에 그대로 반복 실습하니 이론과 실무가 연결된 학생들이 양성될 수 있다. 


특정 산업을 키우기 위해 그 산업의 이름을 딴 학과를 부랴부랴 신설하면 불운하게도 오래가지는 못 한다. 학생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학문이나 산업의 유행이 바뀔 때마다 학과를 계속 신설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방망이 깎는 노인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관련 분야에서 오랜 학문적 전통을 갖춘 과들을 전공의 장벽 없이 융통성 있게 연결하여 환경 변화에 유연성을 갖출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묘가 더 중요하다. 학교에 있던 교수들은 이론 혹은 랩 스케일의 논문 수준 연구에 시야가 좁아진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를 보강하기 위해 수석급, 마스터 혹은 펠로우급의 현업 엔지니어들이 겸임 형식으로라도 교수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논문이나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암묵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는 학사급 엔지니어를 학교에 보내 현업의 problem을 주제로 삼아 석사든 박사든 학위 과정을 트레이닝시키면서 산학 과제를 이어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그 직원은 학부생들에게 TA로서 더 긴밀한 지도를 분담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기초과학을 오히려 더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에서 물리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특히 지금처럼 점점 소재에서든 공정에서든 기존의 방식으로 간다면 한계에 다다를 것이 확실해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 소재나 공정에서의 breakthrough가 만들어져야 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physics 안에서 어떠한 mechanism을 따르는 것인지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HfO2 같은 금속산화물이나 SixGe1-x 같은 반도체 소재, 최근 각광받는 2차원 화합물반도체나 탄소 동위체로 만든 나노 스케일 반도체 물질 등은 이미 다 물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전히 미스터리 한 부분과 해석되지 않는 물성이 있으면서도, 앞으로의 반도체 기술에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특성을 갖춘 소재들이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고체물리학과 양자역학에서 보다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다루는 커리큘럼을 학생들이 거치게 해야 한다. EUV 다음의 beyond EUV에서는 지금의 PR를 쓸 수 없을 것이므로, 더 짧은 파장의 더 강력한 에너지를 갖는 레이저에 대해 photochemical reaction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타입의 hybrid 소재가 필요할 것인데, 이 과정에서는 기존의 포토닉스는 물론, 광자와 라디칼의 움직임에 대한 확률론적 process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때 통계물리학의 연구 방법론과 모델이 필요하고, 이를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분광학 장비 설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시뮬레이션 결과와 실험 결과를 비교하여 분석할 수 있는 실습 과목이 신설되고, 이것이 실무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적용할 수 있는 케이스 스터디를 pset으로 만들어야 한다.


현재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인력은 이미 회사가 학교보다 더 잘 양성한다. 학교에서 관련 분야 석사 학위를 받은 인력도 회사에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정도 집중적으로 기술 훈련, 연수를 받으며 반도체 각 분야 엔지니어로 거듭난다. 학교에서 정말 잘 훈련시켜야 하는 부분은 기술자로 만들기 위한 훈련이 아니다. 원자/이온의 확산과 전자의 이동, 박막 성장과 에칭 화학반응의 kinetics, 결정성장 이론, 결정학, 재료역학, 자성재료, 전자재료, 같은 지극히 펀더멘털 한 과목들이다. 질문할 수 있고 탐구할 수 있고 회의론적 시각을 갖출 수 있는 학자적 자질도 만들어 줘야 한다. 이렇게 잘 배우고 익힌 내용을 학생들이 조금 더 현업에 접근시킬 수 있도록 실습 프로그램을 지금보다 훨씬 강화해야 한다. 현업자들의 지도, 현업에 준하는 장비의 도입, 현업에서 활용하는 기술 표준 등을 학생들이 익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첨단 산업의 전략적 중요성은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인력을 학교가 input 하여 회사에서 적절한 ouput으로 바꾼다는 선형적 1:1 함수 관계는 이제는 잊어야 한다. 재차 강조컨대 개발 시대의 철학이 짙게 남아 있는 정부 주도의 엘리티즘, 정책 드라이브는 전략적 유연함을 갖추기 어렵고,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이 진화하는 지금의 첨단 기술 환경에서는 유연함의 부족은 곧 비효율과 부작용을 의미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급할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back to ba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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