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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Jun 28. 2022

단위의 패권

SI 단위계와 미국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 

올해 만우절에 있었던 가장 유명한 농담 중 하나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그간의 미국식 단위계를 폐지하고 국제표준 단위계 (SI)로 통일한다는 발표를 했다는 것이었다. 다들 반신반의했고, 그저 만우절 농담이라고 치부할 뿐이기도 했지만, 환호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만큼 미국이 쓰는 단위계가 지저분하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체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학부 과정에서 처음 화학공학 전공과목을 배웠을 때, 내가 배운 교과서 원서들은 대부분 미국의 학자들이 쓴 책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 학자들은 SI를 병기하는 일은 없었으며, 난생처음 보는 단위들이 즐비했다. 열에너지 단위인 칼로리는 온데간데없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BTU (british thermal unit)이라는 단위가 나오질 않나, 화씨온도는 섭씨와 그냥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F = 1.8C+32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질 않나, 왜 1 ft는 10inch도 아니고 하필 12inch며, 왜 1 gallon은 3L도 아니고 4L도 아닌 3.75L인지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교과서 연습문제를 풀어도 단위가 달라서 중간 계산이 틀리기가 부지기수였고, 한국에서는 쓰지도 않는 미국식 단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미국식 단위로 인한 불편함은 유학 중에도 발생했다. 유학 첫 해, 초겨울 일기예보를 보는데 TV에서 외기 온도가 single digit 이 되었다며 호들갑을 떨길래, 아니 뭐 8도가 뭐가 춥다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얇은 잠바를 입고 나갔다가 얼어 죽을뻔한 기억도 있고 (섭씨로는 -13도 정도), 기름값이 $2.7/gal이라고 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한 5만 원어치 넣으면 되겠지 하면서 40불어치 (대략 56L) 넣었다가 기름 탱크가 넘쳐서 당황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기름값이 비슷한 수준으로 고유가가 형성되었음). 미국에서 산 시간이 훨씬 긴 와이프 역시 미국식 단위에 적응하는 것에는 한참 시간이 걸렸는데, 여전히 화씨도 몇 도, 길이가 몇 피트, 무게가 몇 온스 이러면 금방 체감되지는 않는다. 나는 계속 머릿속에서 익숙한 SI 단위로 변환하곤 한다.


이러한 미국의 단위는 세계에서도 미국만 쓰는 거의 유일한 단위다 (한 때 영국도 미국과 같은 단위를 썼지만 EU에 가입하면서 SI로 통일했다가, 다시 브렉시트 하면서 예전 단위로 돌아가려 한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미국 같은 케이스가 갈라파고스처럼 되어서 결국 표준의 불일치로 인해 자신의 표준을 고치곤 한다. 그런데 미국은 기술이든, 과학이든, 경제든, G1 으로서의 포지션이 워낙 확고하니 좀처럼 자신의 표준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불편하면 나머지 나라들이 맞추라는 식이다. 그나마 요즘 교과서는 예전에 비하면 많이들 SI 단위로 표기하거나, 적어도 병기하고 있고, NASA 같은 경우 예전의 불운했던 이벤트를 상기하며 2007년부터는 SI 시스템으로 모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NASA는 1998년 화성의 기후를 탐사하기 위한 화성 궤도 기후 탐사선 (Mars Climate Orbiter)를 쏘아 올렸다. 1년 후 1999년, 웬일인지 화성 궤도에 안착했어야 했던 MCO는 어느 순간부터 교신이 되지 않았다. 이유를 살펴보니 궤도 진입을 위한 추력 설정이 N*s가 아니라 lb*s로 되어 있었던 것. 결국 4.45배나 더 높은 값으로 추력이 설정되는 바람에 궤도에 안착하지 못하고 MCO는 그대로 우주 미아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점점 더 많아질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을 위해 NASA는 그간의 단위계를 버리고 SI로 통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과학, 기술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미국식 단위를 주 단위로 설정하여 학부생을 교육하고 대학원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미국에 유학 나온 다른 나라 학생들은 여전히 단위 변환 때문에 애를 먹으며 변환 과정에서 실수를 연발하여 불이익을 받는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패권주의를 지적하고, SI로 통일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오만함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기도 한다. 나 역시 이러한 불편을 겪었고 피해를 본 적도 있기 때문에 미국이 왜 아직도 SI로의 완전한 통일을 안 하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미국이 이렇게 패권주의 기반으로 자국의 단위를 고집함에도 불구하고, 그 단위로 쓰인 과학과 기술 시스템은 비과학적이라 부르는 것은 한참 빗나간 오류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규탄하고 과학과 기술 시스템에서의 불편함을 초래하는 미국의 단위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비과학적인지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핀트가 어긋난 이야기다. 단위 시스템은 적어도 그 단위를 사용하는 범위 내에서 consistent 하기만 하면 된다. 미국이 여전히 자국의 단위로 SoC를 돌리고 건설하고 유지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우주 탐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어쨌든 그 단위로 추진해 온 그간의 시스템이 그 단위계 안에서 consistent 하기 때문이다. 단위가 불편하다고 해서 그 시스템이 비과학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먼 훗날 인류가 다른 지성체와 조우할 일이 있을 때, 의사소통을 위해 일단 서로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부터 기반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소수의 특성은 어느 우주에서나 같을 것이며, 전 우주에 존재하는 원소의 종류도 우주 어느 곳에서 나 같을 것이다. 이러한 기반을 닦은 후에 물리량을 측정하는 단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텐데, 아마도 초반에는 전혀 다른 단위계로 인해 많은 혼란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측정'한다는 행위에 대해 의견이 통일된다면 단위의 변환은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다. 외계인들이 그간 사용했던 저들의 단위계에 대해 지구인들은 어떻게 그 단위 시스템이 consistent 한지를 이해하는 순간 단위의 변환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결국 SI에서는 다른 단위에서든, 기본 물리량의 측정은 공간, 시간, 질량 등에 대한 정량화일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국의 단위 패권주의는 앞으로 한 두 세대 이상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처럼 미국이 독보적으로 G1의 지위를 유지하기도 어려우려니와, 미국 역시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국의 시스템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이 여전히 기술의 혁신과 기초 과학에서의 진보를 이끌고 있는 상황이라면, 결국 아쉬운 쪽은 그렇지 못한 쪽이니 미국의 단위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들이 결국 영어를 공용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피 터지게 공부할 수밖에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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