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육성 정책과 인재 양성 정책은 타임라인이 다르다.
정부가 최근 들어 의욕적으로 반도체 산업 관련 정책과 각 부처 사업 (교육부, 산업부, 과기부 등)을 개발하고 있고, 각 대학도 이에 호응하여 앞다퉈 반도체 특성학과, 계약학과를 설치하고 있다. 학부/대학원 정원도 증가했고, 전임교원도 경쟁적으로 채용하고 있다. 일부 대학은 대기업과 계약 학과를 설치하며 전공 학생 장학금 보장 및 채용 보장 조건까지 내걸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입시판에서의 학생들 반응은 별로 뜨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발표된 각 대학의 입시 결과를 살펴보면 주요 대학에 최근 새로 설치된 반도체 산업 관련 계약학과들은 1차 합격자 전원의 TO를 채우지 못하여 추가 합격자를 낸 것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인공지능으로 인기가 폭발한다고 알려진 컴퓨터과학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전체적으로 학령인구가 급감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애초에 공학은 이른바 전국의 의치한약수 정원이 다 채워진 다음에야 채워진다는 것도 잘 알려진 트렌드이므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정부나 대학 차원에서 아무리 공학 분야를 띄워주려고 해도 의치한약수, 특히 의대 쪽으로의 이른바 공부 잘하는 학생들 쏠림 현상은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몇 번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고 기고도 했지만, 정부가 반도체 산업의 육성에 대해 관심과 의지를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는 대의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각론으로 내세우는 것으로서 '반도체'라는 특수 전공에 집중 지원 (정원 증원, 사업 설계 및 지원 등)하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국의 국부 창출에 있어 반도체 산업이 정말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산업이 반도체라는 전공이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개발되어 왔기 때문에 성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 반도체 산업은 대부분 20-30년 전쯤, 짧게 잡아도 10여 년 전쯤에 학위를 받은 전기전자, 컴퓨터, 재료, 화공, 기계 같은 공학, 그리고 물리나 화학 같은 기초과학 전공자들이 산업에 투신하여 커리어를 시작하고 이어왔기 때문에 성장해 올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반도체 전공이라는 것이 없었고 (참고로 내가 있는 성대에서 아마도 최초로 반도체 전공이 독립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아는데, 성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2006년에 처음 학부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각 관련 전공에서 반도체 소자 설계, 반도체 소재 개발, 반도체 공정 기술 개발, 반도체 공정 장비 개발, 반도체 신소재 물성 해석, 반도체 신소재 합성 등의 세부 분야를 전공한 이공계 인력들이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전신은 현대반도체와 LG반도체) 같은 대기업, 그리고 서울반도체나 SEMES, 동부, 동진, 원익 같은 중견기업 등으로 취업하면서 산업의 기틀이 잡혀갔다.
기회가 될 때마다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순망치한이라는 사자성어를 적용할 수 있는 산업 중에 반도체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반도체 산업에서의 기술 혁신은 눈부시게 지속되어 온 것 같지만, 그 모든 매듭마다 난제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기초과학 수준에서의 연구, 공학적 차원에서의 기술 개발과 발명, 최적화 노력과 스케일업 노력이 있었다. 이는 '반도체'라는 전공 설치로 해결되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기초 수준에서부터 누적된 실패와 극복의 경험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서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자주 언급되는 ASML의 EUV는 기초 광학과 화합물반도체에 대한 물리적 이해, 그 소재의 무기화학과 진공장비에 대한 이해, 표면화학에 대한 이해, 결정구조에 대한 이해, 전자구조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누적되지 않았다면 세상에 등장할 수 없었던 기술이다. 반도체 소재와 장비, 그리고 공정 부품의 개발 역사 이면에는 이러한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 반도체 전공이 이들을 다 품을 수 있기에는 벅차며, 그렇게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론 적으로라면 관련된 전공 분야의 교수 수만큼의 전임 교원을 확보해야 하나, 지금의 조건에서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
정부의 의욕적인 추진이 차라리 반도체 관련된 기초 과학과 공학, 특히 지방에서 필요한 장비와 시설을 갖추게끔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원도 늘리고, 교원 채용에도 보조금이 붙고, 지자체 차원에서도 매칭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조금 더 효용성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반도체 클러스터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고, 대부분의 상위권 공대생들도 지방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결국 반도체 관련 지원 사업도 대부분 수도권 대학들이 혜택을 입는 구조가 되고 있다. 그렇게 집중 지원을 하기 시작했어도, 결국 이번 입시 결과에서 드러나듯, 학생들은 오히려 시류를 더 냉철하게 인식하는 것은 바뀜이 없고, 반도체라는 특수 전공에 인생의 커리어를 걸 정도의 확신을 갖게 할 수도 없다.
반도체 산업이 한국에 이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은 계속 중요한 산업이 될 것임은 거의 확실하지만, 그 이후의 혁신, 혹은 그 이후의 새로운 산업으로의 연결을 위해서는 기초 학문 생태계와 그것의 기술적 실현이 연결될 수 있는 안정적인 연구개발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미 수십 년째 반복되는 이야기이며, 거의 모든 교수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부 관계자를 만나서 전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정권에 상관없이, 정부의 산업정책은 지나치게 단시안적이고, 시류에 따르는 방향으로 결정된다. 그 과정에서 한 세대 전만 해도 전국적으로 100개 정도 되었던 물리학과는 이제 20개도 안 되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 많은 이공계 반도체 관련 세부 전공 대학원에는 박사과정생들이 오지 않고 있어 명맥이 끊기고 있다. 물론 이는 대학의 잘못도 아니고 정부만의 잘못도 아니고, 사실 그러한 관련 학문을 전공하여 산업계에 투신한 후 50대 정도가 되었을 때의 비전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시대적 흐름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산업의 지형이 변혁되는 시기, 진입하게 되는 전공에 대해 깊은 지식이 미처 갖춰지지 않은 학생들로 하여금 특정 전공에 매몰되어 커리어 다변화의 자유를 좁히고 불확실성은 증폭시키는 방향보다는, 조금 더 포괄적인 공부를 하고 다양한 진로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가 더 정교하게 마련될 필요가 있다. 학부 4년, 대학원 4-5년 공부한 것으로 65세까지 일할 수 있는 전문성을 얻는 시대는 진작 종료되었으며, 적어도 인생에서 2-3번 이상은 커리어를 바꿀 수 있어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는데 20-30대의 특정 전공으로 그저 산업계의 인력 수요 대응하는 방식의 교육과 매칭은 유효기간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바닥에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탐색하고 기초 학문과 이론을 더 깊이 이해하며 다양한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실무 감각을 기를 수 있는 테크트리의 혁신이 필요하다. 정부가 진짜 신경 써서 지원해야 하는 것은 각 대학이 복사기 같이 비슷한 전공의 설치를 경쟁적으로 앞다퉈하게 하는 만드는 것보다는, 각 대학이 서로 특색 있는 첨단산업 향 테크트리 혁신을 bottom-up으로 설계하고 독립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원책 마련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