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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Feb 21. 2023

공동연구의 데이터를 바라보는 시각

데이터가 스스로 말하게 하라

내가 공동연구하는 파트너들은 대개 실험가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연구는 정말 실험 연구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데이터들이 많다. 가끔은 그들이 막 '캐낸' 데이터를 보면서 '영화감독이 편집을 안 한 날 것 그대로의 필름을 최초로 보는 느낌이 이럴 것이다'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어떤 재미난 물질을 합성했는데, 그것의 스펙트로스코피 데이터나 XRD 데이터나 TEM 이미지나 광특성 데이터 등을 볼 때 특히 그렇다. 실험가들이 공동연구자로서의 내게 이러한 데이터를 보여 주는 것은 나를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일 것이고, 내게 의견을 묻고 해석을 요청하는 것 역시 내가 그만큼 그러한 데이터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계산, 모델링,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늘 갈등에 시달린다. 자신의 데이터를 가공하든, 가공하지 않든, 일단 데이터를 내게 주면서 온전히 내게 그것을 맡기는 경우도 있지만, 답을 다 정해놓고 문장 한 두 개 정도 추가할 정도의 계산만 요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답정너식의 계산 의뢰는 여러모로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계산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동의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계산 결과와 실험 데이터가 맞는 경우만큼이나 안 맞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떤 실험 결과에 대해 내가 한 계산이 정반대로 나와서 (예를 들어 A대비,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실험가가 합성한 B물질의 특성이 훨씬 좋게 나온 데이터에 대해, 내 계산 결과는 A의 특징이 여전히 좋게 나온 것) 뭐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냥 그렇게 나왔노라고 결과를 보내 준 적이 있는데, 그 이후 별 반응이 없어서 잊고 지낸 적이 있다. 몇 년 후 우연히 나는 그분이 계산 없이 그냥 자신들의 결과를 논문으로 출판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내 계산 결과가 틀렸을 수도 있고, 그들의 실험이 제대로 되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적어도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계산했고, 두 방법은 동일한 결과를 내었기 때문에 계산의 방향이 가리키는 것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가들의 데이터에 대한 판단은 그들의 결정이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논문은 출판 이후 지금까지 단 두 번 인용되었고, 인용한 것은 그 그룹의 자가인용이다. 어떤 상황인지 좀 알 것 같다. 


물론 내 계산이 다 맞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 배터리 연구하시는 분들과 공동연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전기화학적 반응 동역학을 좁은 영역에서 실시간으로 확률론적으로 해석하는 시뮬레이션을 했다. 이 경우도 실험가 측이 좀 답정너의 뉘앙스로 계산 결과를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내 결과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20배 정도 좀 느리게 나왔다. 일치/불일치 여부가 아니라, 시간 스케일의 차이가 문제였는데, 나는 그냥 그렇게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실험 방법으로 시간 스케일을 다시 측정했고, 그 결과는 여전히 내 계산 결과가 10배 정도 느리게 나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실험가 측은 내 계산 결과를 온전히 활용할 수 없겠다는 이야기를 정중하게 하고 나는 그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정도 (order가 1개 차이나는 정도)의 불일치는 대개 계산에서 초기 조건과 일부 가정을 좀 unreal 하게 했기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기 조건 자체에 불확실성이 있었고, assumption에 대해서도 실험가 측은 확인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는, 과학적 연구에서 불확실한 데이터는 그냥 쓰지는 못 한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일 뿐이다. 그래도 실험가들이 다른 방법으로 한 번 더 실험하는 과정은 내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최근에 참여한 연구는 조금 더 인상 깊었다. 특정한 cation이 어떤 unit cell에서 배향을 바꿀 수 있을 때, 그것이 그 unit cell을 얼마나 찌그러트릴 수 있고, polarity variation과 unit cell 찌그러짐 (즉, strain)에 의해 electronic band structure가 얼마나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dielectric constant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계산을 해 봤다. 이런 류의 계산은 실험적으로 데이터를 얻기 어렵기 때문에 계산 결과를 신중하게 얻어야 한다. 문제는 배향에 따른 에너지 차이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계산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는 것이다. 실험가가 원하는 결론은 딱히 없었지만, 나는 이 결과를 그대로 공유했다. 그런데 실험가 측에서의 반응은 좀 흥미로웠다. 자신들은 이 실험을 할 때 이미 실험할 때마다 조금씩 광특성이 달라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내 준 레퍼런스에도 이 물질의 특성이 그러하다는 것이 몇 번 보고된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계산 자체가 틀렸다기보다는 그 물질 특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계산을 기반으로 하여 이번에는 조금 더 윗 스케일의 계산을 했다. 다른 분자들과 상호작용하여 이 물질의 PV 특성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실험가는 왠지 자신의 분자가 좀 좋은 특성을 갖게 되는 것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 답정너를 만족시켜 줄 생각은 별로 없었다. 결과는 좋은 특성을 갖느냐 마느냐 보다도, 어떤 조건에서는 좋은 특성을, 어떤 조건에서는 별로인 특성을 갖는 것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발견은 실험가에게 상당한 지적 자극을 준 모양이다. 실험가는 사실 자신의 분자가 어떤 방법으로 이 물질과 반응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특성이 최적화될 수 있는지도 궁금했는데, 내 계산 결과가 그 힌트를 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험가는 그 실험을 추가적으로 했고, 내 데이터는 그 추가 실험의 실마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정성적인 일치점은 찾았다.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하다.)


사실 많은 계산 연구자들은 독립적 연구를 할 때와는 달리, 실험가들과 공동연구를 할 때 실험가들의 눈치를 좀 보는 편이다. 내가 겪었던 몇몇 일화처럼 잘 맞으면 서로가 좋지만, 불일치하는 경우에는 실험가들과 계산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시간을 날린 셈이 된다. 어떤 계산 연구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계산한 결과를 동시에 보내어 취사선택을 실험가들에게 맡기는 방법을 취하기도 하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러한 방편은 좀 상궤에 어긋나고 과학 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산한 결과에 대해 애초에 그것을 담당한 사람이 의미 부여 및 한계에 대한 고지를 하는 것이 맞다. 가장 좋은 것은 실험가들의 데이터에 숨어 있는 에러 요인을 계산을 통해 발굴하고, 실험에서 커버하지 못 한 부분을 계산으로 커버한 후, 그것을 다시 실험으로 재확인하는 방법이다. 나아가 실험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 한 부분까지도 제시하여 실험으로 하여금 자체적인 완성도를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편이 아닐까 한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경우라면 실험이 있기도 전에 계산만으로 A-Z까지 다 한 다음 (즉, 예언자처럼), 실험하는 추종자들이 그 예언을 현실화하는 것일 텐데, 사실 그러한 경우는 흔치는 않다. ab initio 계산은 대부분 그러한 예언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예언 연구는 이 시대에는 큰 의미가 없다. ab initio 계산 자체의 특성 때문에 그렇다. 오히려 ab initio가 아닌 방법을 사용하여 실험의 영역에서 다뤄보지 못 한 연구를 하고, 그 결과의 통계치를 (즉 범위와 평균을) 제시하여 실험의 영역과 맞닿게 하려는 방법이 더 실질적인 연구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 달 동안 고생했던 결과를 실험 파트너에게 보내고, 그 파트너가 빈칸을 잘 메꿔서 훌륭한 결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보니 연구에서의 보람을 다시금 확인한다. 아주 예전에 독불장군처럼 단독 저자로 계산 끄적여서 논문 쓰던 때는 누구와도 디스커션 하지 않고 그냥 내 아이디어 그대로 논문을 썼지만 정작 그러한 논문은 인용도가 높지 않았다. 확실히 세상에 임팩트를 주려면 서로 간의 빈틈을 메꾸고 자체적으로 여러 번 검증하고 아직 사람들이 모르고 있던 꺼풀을 하나라도 더 벗겨내는 연구를 하는 것이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이제 이 연구도 슬슬 마무리되어 서브밋하게 될 텐데 좋은 결과로 열매 맺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내 실험 파트너로서도 다음 커리어로 가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이제 내 그룹의 학생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주고 있는데, 학생들이 파트너들과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타협해 버릴 수도 있고, 그냥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을 겪지 말라고 할 수는 없고, 학생들 스스로가 연구자로 성장하면서 가치의 경중을 스스로 판단하고, 연구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옆에서 조금씩 내 경험을 나눠주면 될 것이다. 결국 데이터가 스스로 말하게 하라라는 경구를 학생들도 연구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체험해 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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