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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Apr 14. 2024

지식의 기초

아패틱과 패틱의 대립,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 그 사이의 새로운 길

인류의 지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는 문명사와 맞닿습니다. ‘지식의 기초 (데이비드 니런버그, 리카르도 L. 니런버그 지음 이승희 옮김, 김민형 해제, arte (2021))’라는 책은 바로 이러한 지식의 역사를 지식을 이루는 기초를 탐구하면서 살펴본 책입니다. 이 책은 무려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가 말해주듯, 전형적인 벽돌책이라, 처음에는 부담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제목도 무시무시합니다. 무려 ‘지식의 기초’입니다. 이 책은 그 압도적인 두께만큼이나, 실로 인류 지성사에서 나왔던 모든 지식을 다 다루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지식의 기초를 하나씩 파헤치면서 말입니다.

지식의 기초 표지 (출처: 교보문고)


물론 이 책이 아무리 두껍다고 해도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백과사전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백과사전이라고 하더라도, 수많은 동서양의 지적 성취물과 오랜 지성의 역사를 모두 아우르며 그 맥을 짚어내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러한 백과전서식 접근이 아닌, 지식의 기초에 있는 핵심 원리가 무엇인지에 천착합니다. 단순히 천착하는 것을 넘어, 동일성’과 ‘차이’라는 이 두 가지 대립되는 개념이 3천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인간의 지성사에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다양한 학문을 돌아보며 되짚어 봅니다. 부자 관계인 저자들은 수학과 역사학, 신학, 물리학, 생물학, 사회과학 같은 다학제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면서 고대 그리스, 고대 근동의 이슬람 신비주의와 학자집단의 학문, 중세 유럽, 근대 과학과 산업 혁명 시기, 그리고 20세기 전반과 중반에 걸친 다양한 철학 사조와 과학적 학술적 성취를 짚어 가며, 왜 서로 달라 보이는 다양한 학문의 분야에서, 그리고 시대와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식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 왜 이렇게 단순한 두 가지 개념으로 축약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의 한계가 무엇이며 왜 위험한지를 꾸준히 설명하려 합니다.


이 책은 쉽게 읽자면 지식에 대한 일종의 빅히스토리 서술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성사는 우주나 인류 문명 전체를 다루는 빅히스토리만큼의 스케일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애초에 인간이 왜 자신을 인지하게 되고, 자신을 넘어 공동체와 사회, 자연과 우주를 인지하고 인식하게 되는지, 그리고 인식 대상으로서의 우주와 인지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같은 대상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게 되는 과정은 우주와 문명을 다루는 빅히스토리만큼 압도적인 스케일이 필요하고, 오히려 더 깊은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저자들이 이 두꺼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한 발짝 더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동일성''차이'라는 두 대립 개념으로 지식의 기초가 이루어진다는 사실 자체의 전달을 넘어, 이러한 이분법 혹은 닫혀 있는 관념에 집착하는 것이 결국 점점 인류의 지성의 불꽃을 꺼뜨릴 수도 있다는 준엄한 경고일 것입니다. 저자들은 이 두 대립 관념에 대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쳐 그것을 응원하거나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자들은 3천 년에 걸친 이 대립 속에서 각자의 진영에서 충분한 발전을 이룬 동시에, 뚜렷한 한계를 가져온 이 관념의 대립 사이에는 위험한 절벽이 있으며, 그래서 결국 중용의 도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특히 20세기 이후 물리학에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탄생한 이후, 더 이상 인간이 인지하는 자연과 우주의 본성은 수학이라는 단단한 근거만으로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 이러한 위기의식은 인류의 지성사 근원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저자들은 계속 독자들에게 경고의 사인을 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매일 같이 바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대부분의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 현실적인 과제들, 커리어와 가족의 문제, 재정과 건강의 문제 등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문제들의 공통점은 결국 시간의 문제라는 것인데, 저자들은 이 시간에 대한 문제가 결국 인간이 그토록 오래 고민하고 탐구해 왔던 문제들의 핵심 중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인지하고 있는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주변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연속체 속의 시간의 일부인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과 분리되어 우리의 관념 속에서 모종의 공리로 다시 구성되어 정의될 수 있는 것일까요? 시간은 이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라 기존의 공간과 분리된 관념이 아닌, 시공간이라는 새로운 관념으로 재탄생했지만, 여전히 물리학에서는 시간을 연속체로 보아야만 하기 때문에, 결국 시간, 나아가 시공간은 연속체를 수학적으로 집합론의 맥락에서 다룰 수 있는 장치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을 강요하는 학문, 혹은 지식은 물리학입니다. 저자들은 이러한 시간에 대한 관념이 물리학의 고정된 관념, 즉, 시간 혹은 시공간도 변하지 않는 공리를 구성하는 수학 혹은 숫자의 개념으로만 반드시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반문을 던집니다.


저자들이 이 책 내내 천착하는 문제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입니다. 인간의 지식 진보는 주관적이고 디테일한 것에서부터 점점 객관적이고 동일한, 즉, 공리의 체계로 접근하는 방향으로 이어져 왔고, 그 이면에는 수학의 탄탄한 논리가 있지만, 그것을 과연 인간의 모든 생각과 삶, 나아가 인간이 인식하는 인간 주변의 우주와 인간의 사회, 인간 자체로 연장하여 재구성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역사학, 종교,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 철학, 수학과 수론, 물리학과 생물학, 경제학과 심리학, 역사학, 그리고 종국에는 윤리학까지 넘나들며 다양한 사상가들, 학자들의 사고를 추적하고 비교하며 분석합니다. 때로는 수많은 학자들은 하나의 집단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1:N처럼 세상과 홀로 맞서 싸우는 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의 일부를 넘어, 아예 전체를 다 담당하고, 심지어는 능가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확연하게 퍼져 있습니다. 2016년 알파고 사건 이후, 2022년에 등장한 ChatGPT 류의 LLM 기반 인공지능, 그리고 아마도 이를 기반으로 할 강인공지능(AGI)의 등장은 시간문제라고 보는 의견이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공지능의 핵심이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학습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인간의 수 천년 간의 지적 활동물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문자나 기호, 일부는 전자기 매체 등으로 남아 있는데, 이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여 다시 0과 1로 이루어진 전기 신호로 바꾸면 전자컴퓨터에서 이를 계산하고 알고리즘의 파라미터를 업데이트하여 최적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문장 하나만 해도 바로 이 책의 저자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 다 담겨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지성 활동은 모두 측정 가능한 것들이고, 그것은 모두 수학의 틀 안에서 재구성될 수 있는가?’, ‘그 과정에 우리가 무엇인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지성과 지식은 모두 디지털신호로 변환될 수 있는가?’ 또 이러한 질문도 가능합니다. ‘인공지능이 인식할 수 없는 어떤 데이터가 있다고 해서, 그 데이터는 어떤 공리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인가?’ 저자들은 이 두 가지 질문 사이에 어느 쪽으로도 편을 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로 수론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재구성하여 공리화하려는 움직임에 조금 더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제 저자들의 접근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저자들이 정의하는 ‘동일성’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1을 2라고 정의하는 순간, 1+2 = 1+(1+1) = 3처럼 계속하여 자연수의 개념이 성립할 수 있고, 다시 정수의 개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동일성은 일종의 패턴 인식을 통한 현상 추론에서 비롯된 관념입니다. 어제의 해가 떴으니 오늘의 해도 뜰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두 해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죠. 이를 처음에는 제한된 언어로, 그러다가 수학이 발전하면서 관념적인 언어가 아닌, 추상적인 수학적 개념으로 다시 설명하게 되지만, 동일성이 가리키는 핵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즉, 확실성을 향한 욕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회피하려 하며, 특히 광대한 자연에서 오는 불확실성의 공포를 줄이기 위해 패턴을 파악하고 싶어 했던 역사에서도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수학에 대한 믿음은 오래전부터 많은 학자들에게 그 명료함과 더불어, 강력한 설명과 예측 능력으로 큰 인상을 주었고, 모험심 강한 학자들은 이 명료함과 강력함을 수학의 테두리를 넘어, 자연과학으로, 공학으로, 사회과학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연장하여 활용하기를 원했습니다. 칸트는 당대 뉴턴의 역학에서 비롯된 수학적 설명 방법의 강력함에 매료되었는데, 이 강력함이 비단 자연 현상이나 우주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도 설명할 수 있는지 탐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즉 이성의 공리들 (동일성원리, 비모순율, 충족이유율 등)이 인간의 내면과 윤리에도, 그리고 감정과 생각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탐구했던 것이죠. 칸트는 그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는 후에 정치학, 경제학, 심리학 같은 사회과학으로의 수학적 이론 혹은 모형화에 대한 시도의 철학적 근간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는 저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성공의 확장력’이라고 불리는 특징입니다. 즉, 수학이 특정한 영역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강력한 성능을 발휘하였으니, 그 이론이나 원리를 다른 측면에도 같은 가정을 하여 (즉, 유비를 통해) 적용하려는 욕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물질의 구성단위를 원자로 보고, 물질을 원자로 쪼개거나, 다시 원자를 합쳐서 물질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현상들도 쪼갤 수 없는 공리로 분해한 후, 그것을 다시 조합하여 전체의 본성을 설명하겠다는 방법으로 연결됩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접근은 당시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발명한 미적분학(calculus)의 원리와 정확히 같습니다.


저자들은 이 두 관념을 apathes (동요하지 않음 무감각함)이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아패틱 (apathic)과 아패틱으로 분류되지 않는 패틱(pathic)으로 구분합니다. 아패틱은 사물들을 동일성원리, 논리, 수학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맞출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미적분학의 예로 든다면, 미적분학은 아패틱한 것을 기초로 삼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아패틱한 수학은 추상력에 기반을 둡니다. 추상력은 이상화하고 단순화하는 능력, 사물들을 생략하는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패틱한 것들은 차이 없이 분리될 수 없거나, 합쳐질 수 없는 것 (변화하거나 전환되기 쉽다는 그리스어)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아패틱에서 안전하게 생략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그렇지 못한 것을 굳이 생략하게 되면 어떤 지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저자들의 걱정이자 이 책을 쓴 동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수학에 의거하여 아패틱 vs 패틱 구도를 나누고, 아패틱의 공리 체계 안에서 인간의 지식을 구성하고 추구해도 안전한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p.27에 바로 그러한 저자들의 의도가 잘 나타납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고 할 때 우리 선택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들이 규칙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던지는 질문, 질문을 만드는 관점과 분야, 연구 주제에 달려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누구이고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또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그 선택이 정해진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모든 질문과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을 명령할 수 있는 불변의 규칙이나 불변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은 우리가 한다. 그 선택의 이면에는 종종 자유라고 부르던 것이 놓여 있다. 우리는 이 자유를 인간의 지식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저자들은 이 책 내내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며, 우리가 조금 더 인식론적 겸손을 갖출 필요가 있음을 역설합니다. 그렇지만 아패틱에 반발하는 다른 지식인들의 접근도 뚜렷한 문제가 있음을 계속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책의 초반에 나오는 슈펭글러의 관점에 대한 것이 그렇습니다. 슈펭글러는 

“영혼이 수학에 의해 파괴됐고, 이 수학이 인간을 지상의 주인으로 만드는 동시에 기계들의 노예로 만들기도 하는 악마적 지식의 원천”

이라고 증언했지만, 슈펭글러의 접근 역시 세계를 탈주술화하고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되돌리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자들이 보기에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유럽 지성계의 고민은 이렇습니다. ‘슈펭글러로 대표되는 학파가 보기에 당대의 인류가 겪고 있는 고난은 수학, 논리학, 이성, 그리고 아패틱함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입장’ vs. ‘러셀, 프레게 등으로 대표되는 학파가 보기에 이 아패틱함을 완성하는 요소들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입장’의 대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철학의 본성을 둘러싼 갈등이 살인, 심지어는 대량 학살의 동기가 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충돌이기도 했습니다. 저자들이 보기에는 실제로 그러한 사건은 1차 세계 대전 같은 역사의 큰 불행으로 발현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동일성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아패틱 vs 패틱 사이의 갈등의 근원은 결국 수학의 기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수학의 기초까지 가기 전, 저자들은 후설의 철학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후설은 수학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야기하자면 아패틱한 수학과 패틱한 수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패틱한 수학은 추상적인, 그래서 공리의 집합으로 구성될 수 있는 수학이고, 패틱한 수학은 우리의 경험에 기초한 수학으로 후설은 생각했습니다. 후설이 이렇게 생각한 까닭은 우주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문제에서 승리한 근대의 수학적 과학은 우리에게 보편적 진리의 확실성을 약속했고 각각의 승리는 새로운 영토를 정복한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보편철학’과 ‘인간성’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후설은 이 간극을 메꾸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특히 인간성 훼손의 복구는 바로 이 패틱한 수학, 즉, 직관적 수학의 재발견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설이 보기에 이 직관적 수학은 과도하게 추상화된 근대성의 비본래적 공리 아래에 은폐되어 있었던 것이죠. 문제는 이 은폐되었다고 보이는 직관적 수학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카시러와 하이데거는 애초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직관에 기반한 수학은, 본래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고 아패틱한 성질의 수학과 같을 수 없음을, 즉, 존재할 수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수학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는 고대 그리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자들은 아낙시만드로서의 주장, 소크라테스의 변증법, 플라톤의 공리, 아리스토텔레스의 회의주의를 차례로 짚어내며, 그리스 철학자들이 고민한 흔적을 조밀하게 서술합니다. 이 과정에서 수학적 공리 체계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몇몇 중요한 관념 법칙들이 소개됩니다. 예를 들어 비모순율 (어떤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하다.), 배중률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의 선택만 있을 뿐, 다른 가능성은 불가능하다.) 같은 원칙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공리에 입각해 플라톤이 정리한 공리들은 다시 한번 되새길만합니다.


1.     인과율: 최고의 형상이 아닌 형상인 사물들은 최고의 형상에 참여해 형상이 된다.

2.     분리: 최고의 형상은 홀로 그 자체이고, 최소한 존재의 측면에서 최고의 형상에 참여하는 사물들과 분리되며, 그래서 이 사물들과 같지 않다.

3.     불순함-감각: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사물들은 반대의 속성을 가질 수 있는 한 불순하다.

4.     순수함-형상: 형상들은 반대의 특성을 가질 수 없다.

5.     유일성: 형상들의 모든 속성에 대해 정확히 한 가지 형상만 존재한다.

6.     자기 술어: 형상들의 모든 속성에 대한 단 하나의 형상이 최고의 형상이다.

7.     단일성: 각 형상은 하나다.


플라톤은 이러한 공리에 입각하여, 그의 대화록 ‘에피노미스’에서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을 지혜로 이끌어 줄 공부는 무엇인가? ‘수에 대한 지식’만이 인간을 지혜로 이끌 수 있다. ‘수는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고 악을 품고 있는 모든 것에는 수가 하나도 없다.’ 즉, 악은 수의 부재이고, 선은 수의 현존이자 계획이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수를 통해 동일성 이론에 생기를 불어넣는 영원을 향한 그의 갈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에 주로 반기를 들었는데, 특히 동일성이라는 지식의 기초 탐색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도 최소한의 동일성 이론 자체를 필요로 하긴 했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에테르(aether) 이론인데, 이는 에테르에서 천체가 만들어진다고 가정하고 천상은 동일성이, 지상은 차이가 지배한다는 이론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이론은 실로 2000년 간 근대 유럽에서 물리학이 성립하기 전까지 서구의 자연에 대한 관점을 지배하는 이론이 되기도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예수 사후 전후 근동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리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그리스 철학에 내재된 회의주의 vs 형상의 구도가 그리스도교 맥락에서 재구성된 것임을 저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의 우상비판이 그렇습니다. 바울은 ‘하느님은 영원하고 끝이 없는 분, 그러나 확실히 그분은 변하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음. 그분은 아들을 파견했고, 창조물을 낳았음. 그분은 보이지 않지만, 인간은 창조물을 이해하는 마음을 통해 신의 존재와 그의 영원한 힘을 추론할 수 있음. 다만 인간이 창조주를 무시하고 ‘모상을 닮은 창조물’을 선택하기 때문에 ‘무지한 마음은 어두워진 것임’ (롬 1:3-4, 19-25) 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이론에도 이러한 고민과 대립 구도가 이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라는 지성적 구조 (ratio, 이성)는 우리 정신에 그 자신을 부여하고, 감각과 개인의 관점과 관계없이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모든 정신에게도 자신을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이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며, 움직일 수 없고, 변할 수 없으며, 영원하다고 본 것입니다. 이 불멸의 수적 진리는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공통된 진리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수는 존재하고 영원하지만, 우리는 변하는 존재이고 영원한 수를 사유할 능력이 없으므로, 어떤 영원한 것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야 했고, 따라서 영원한 하느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 동일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인간은 7+3 = 10인 것을 알 수 있고, 하느님처럼, 수는 변하지 않고 생성되지 않으며, 따라서 수는 참으로 있는 것이라는 논증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함정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신성에 수학 지식을 부여하면, 수(척도와 무게)가 창조 이전에 신 안에 있었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수(무게와 척도)를 가졌을까요? 이것들은 하느님의 본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고, 그래서 그 본성을 제한하기도 하는 것일까요? 이는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이 아닐까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법은 다소 도망가기 식이었습니다. 즉, 신은 수(numerus)이면서 수가 없는 수(sine numero)라는 결론을 내린 것인데, 이는 결국 신과 수 사이의 경쟁 회피를 시도했음 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 이슬람권에서도 수를 기초로 한 논증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일자’의 개념이 강조되었는데, 특히 어떤 수든 태초에는 바로 이 일자로부터 탄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폰 노이만이 공집합으로부터 자연수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논증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수는 일자와 다양한 창조물 사이를 연결하는 강력한 길이라고 이슬람권에서 보았으며, 전체 수는 모두 일자로부터 생성된다고 논증한 것입니다. 이슬람 형제단의 과학의 궁극적 목표는 신의 참된 지식을 얻는 것이었는데, 이는 꾸란 112장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도출됩니다.

“산술학, 기하학, 자연학, 그리고 다른 이성적 과학에 적용되는 동일한 생각의 규칙들이 신과 영혼에도 적용되는가? 더 잘 예측할 수 있는 자연 세계를 연구할 때처럼, 영혼의 탐구, 심지어 신에 대한 탐구도 안정된 기초 위에 진행될 수 있을까? 만약 이 규칙들이 세계와 영혼뿐만 아니라, 신도 구속한다면, 어떻게 신의 전능함을 말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는 동일성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했을까? 신의 유일한 동일성과 단일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동일성과 일자에 대한 이성적 원칙들과 동일성원리의 힘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즉, 동일성과 단일성의 유형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슬람 현자 이븐 시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완전한 인과관계 속에 있는 우주를 생성했습니다. 이 우주에서는 전능한 신조차도 과학의 합리적 법칙에 구속되는 것이죠. 그는 꾸란 112장에 대한 주석으로, 전체 과학적 탐구의 최종 목표는 신의 본석을 파악하는 일이며 신의 속성, 신으로부터 온 행동의 출현 양식을 이해하는 일임을 명시했습니다. 즉, 이븐 시나는 모든 것 (신, 인간, 물리적 세계도 포함)을 논리 정합적으로 포괄하는 체계를 구축하려 했던 것입니다.


근대 유럽으로 넘어와도 아패틱 vs 패틱을 둘러싼 저자들의 철학 탐색은 계속됩니다. 데카르트는 무한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만약 무한한 존재라는 관념이 있다면, 이런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존재뿐이기 때문"

이라는 논증을 시도했습니다. 즉, 마음속에 절대적으로 완벽하고 무한하며 전지한 존재라는 본유적 관념이 있다면, 이 관념 자체가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라고 본 것이죠. 그렇지만 이는 일종의 순환논리입니다. (데카르트의 순환) 데카르트의 신은 플라톤의 신과 달리 수의 필연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에 반해, 로크는 빈서판 학설을 들고 왔습니다. 우선 데카르트의 본유 관념을 거부했고, 단순 관념들의 건강한 (수학적) 조합과 반성에 의해 어떤 관념들은 확실성을 가진 참된 지식 (경험적 진리, 우연적 진리)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의 불멸성을 거부하는 유물론적 주장의 최첨단에 있던 철학적 주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빈서판 학설은 영원에 대한 믿음에 대한 도전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종교에 대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로크의 철학에 필연적(보편적) 진리 개념으로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수학의 기초가 모순율과 동일성만으로 구성 가능하다고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철학으로 옮겨가려면 충족이유율(“왜 다른 것이 아닌 그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설명하는 이유”)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라이프니츠는 동일성과 차이라는 원리를 이용하여 물리학, 형이상학, 심리학의 그리스도교적 통합을 추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최소작용의 원리는 역학에서는 왜 어떤 운동이 특정한 궤도를 따라가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이유로 드는 것이 바로 작용이라는 물리량을 자연은 최소화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일종의 충족이유율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라이프니츠가 들고 나온 개념 중 또 중요한 것은 바로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원리 (라이프니츠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만약 두 사물이 서로 완전히 닮았고 ‘단지’ 수적 차이만 있다면 (solo numero), 혹은 시간/공간만 다르다면, 이때 이 둘은 사실 동일하다(하나다)라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만약 식별 가능한 개별자들이 존재한다면, 신은 두 개가 서로 바뀌는 세상을 쉽게 창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세상을 지금처럼 만들 충족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창조물들 사이에 이런 동일성은 존재할 수 없고, 식별불가능한 개별자들은 존재할 수 없다. 비모순율을 지키는 신은 세상을 필연과 우주의 법칙에 따라 만들었고, 모든 가능한 세상 가운데 가장 좋은 세상을 만들었으며, 세상 안에 있는 모든 영혼과 모든 개별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유일하고 독특하다.”

물론 이 법칙은 후에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과학혁명 시대로 넘어와 모든 사상가들은 축소할 수 없고 나눌 수 없으며 변하지 않는, 영원히 확실한 핵심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를 ‘원자’, ‘단순한 것’, ‘단자’, ‘단원소(singleton)’ 단위’, ‘일자’ 등으로 부르면서, 모든 것의 바닥에 있는 기본 입자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수학은 이러한 기본 입자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 수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선험적. 수학적 진리가 선험적으로 인간 영혼 안에 새겨져 있다는 의미

2. 수학은 정확함. 수학 안에서 엄격한 동격과 동일성, 동일함의 완벽한 유형 확립 가능. 

3. 수학은 필연적. 세상의 어떤 ‘경험’도 수학적 진리가 모순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부정될 수 있다고 우리를 확신시키지 못할 것임.

4. 수학은 물리적 세계에 적용 가능.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사실을 알려 주는 수학의 외면적 예측력은 놀라운 힘임. 이 힘이 우리 정신과 세계 사이의 안정된 다리를 놓으려던 많은 사람들을 유혹해 수의 속성에 의존하도록 만들었음.


이에 가장 많은 정성을 쏟았던 철학자는 칸트일 것입니다. 칸트는 시공간의 모든 특성과 관계를 경험과 무관하고 정신의 본질에 원래 있는 것(본유하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논리를 사고의 규범으로 만들려는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면 안정감과 확신이라는 편안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죠. 칸트는 

“어떤 개념도 그 자체로는 자기 안에 무한한 표상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될 수 없다. 그럼에도 공간은 그렇게 생각될 수 있다.(무한히 나뉘는 공간의 모든 부분은 동시적이기 때문.) 그러므로 원래 공간의 표상은 선험적 직관이며,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인식의 두 가지 원천이다. 이 원천에서 다양한 종합적 인식이 선험적으로 도출될 수 있고, 특별히 공간의 인식과 공간들의 관계에 관한 순수수학은 이 선험적 종합 인식의 훌륭한 사례를 제공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의 흐름들은 역사 속에서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이라는 맥락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지식이 창조되기 위해서는 결합과 분리라는 인간의 기본 사고 기능이 필요하고, 이 기능이 생산한 진리의 최고 보증을 수 안에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결론까지 도달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진리를 생산하기 위해 정작 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수학자, 논리학자는 공리와 규칙을 설계합니다. 이러한 규칙은 관념 속에서 어떤 수학적 대상의 모음들을 조합하고, 분리해도, 작업하는 수학적 대상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수학적 대상들은 언제나 엄격하게 동일한데, 이는 수학자와 논리학자들이 이 공리와 규칙 안에서만 작업하고, 공리와 규칙에 부합하는 대상만 다루기를 선택할 결과일 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공리와 규칙 안에서만 수학적 대상은 진정 증명되고 논증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수는 기본적으로 아패틱함 (모아지거나 분리될 때 동일함을 유지하는 대상, 물건, 사물, 범주, 개념, 존재)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여전히 이에 대해서도 염려를 표현합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해 특정한 질문을 제기할 때 사유 대상들이 전제하는 가정들과 이런 대상들에 맞는 접근법도 함께 탐구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들이 보기에 수를 제외하고 절대적으로 패틱하거나 아패틱한 것은 없습니다. 순수한 수학적 대상을 사유하기 위해 만든 합의의 테두리 안이 아니라면, 그 밖의 다른 모든 경우에 아패틱과 패틱을 판단하는 조건은 상황, 위치, 질문에 따라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들은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독단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이 예로 든 다윈의 사례를 봅시다. 수 세기 동안 생물학과 자연사 연구는 유기체 종과 다른 자연의 종을 정의하는 본질적 동일성을 규정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다윈은 같은 종들 안의 미세한 차이에 관심을 두면서 자연선택의 전제 조건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진화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즉, 비수학적 사례들에서는 패틱과 아패틱의 구분은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것이 잘 나타납니다. 이는 비수학적 대상에서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 구도는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일성과 차이, 혹은 아패틱과 패틱 대립 구도 속에서 한쪽을 선택하고, 동일성의 지속을 강조하거나, 차이를 향한 피할 수 없는 잠재력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이나 필연이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 아님을 저자들은 다시 한번 역설합니다. 인간의 지성사가 그동안 목도한 대로, 사유 대상을 아패틱한 존재로 다루는 것은 엄청나게 유용한 편의성을 제공합니다. 복잡한 자연 현상을 간단한 수학적 방정식으로 표현하고, 심지어 예측하거나 감춰진 사실을 밝혀낼 수도 있으며, 정량화하기 어려운 특징도 다양한 이론 체계 안에서 측정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시킬 수도 있습니다. 즉, 아패틱한 동일성의 힘을 동일성이 전적으로 적용되지 않은 영역으로까지 확장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동일성원리와 아패틱한 규칙들이 압도적으로 복잡하고 영원히 변화하는 우주에 수학적으로 확장되면서 (즉, 이 규칙이 엄밀하게 적용되지 않는 영역까지 확장되면서) 인간 지식과 지구 위 생명의 기회는 극적으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패틱과 패틱,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선택은 우리 자신과 우주에 관한 질문을 던질 때 스스로 해야 하는 선택임을 잊어서는 안 됨을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아패틱한 수학의 강력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상은 물리학일 것입니다. 저자들도 이 부분에 상당한 고찰을 할애합니다. 사실 현대 물리학의 성립은 이러한 수학적 강력함, 그 강력함을 이루는 수학의 공리성과 아패틱함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간, 에너지, 시간, 질량, 전자 같은 기본입자, 우주의 물리적 특성에 대한 정말로 물리학의 핵심 지식들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 수학에서의 아패틱하고 변하지 않는 동일성의 원리에 철저하게 기초하여 출발할 수 있을까요? 과학, 특히 물리학은 계속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보편적인 불변성을, 즉, 동일성의 원리와 아패틱함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며 추적, 추구해 왔습니다. 데카르트는 ‘전체적으로 과학은 언제나 하나이자 동일함을 유지하는 인간의 지혜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태양 빛이 자신이 비추는 다양한 사물에서 차이를 가져오지 않듯이 과학도 적용되는 주제가 아무리 달라도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죠. 그러나 저자들은 이 핵심적인 질문의 답은 No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는 물리학자들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는 물리학 내부에서도 갈등을 빚게 만들었습니다. 통계물리학의 아버지 루드비히 볼츠만은 입자들이 같은 온도 같은 압력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속도는 달라질 수 있음을 논증했는데, 이는 미시 세계에서의 통계학을 거시 세계에서의 열역학과 연결시키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입자들의 동일성원리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볼츠만에 따르면 속도가 다른 입자들은 결국 식별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입자의 식별가능성이 공리로 성립해야 볼츠만의 통계열역학도 성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항하여 또 다른 열역학의 아버지이자 전자기학의 아버지인 맥스웰은 입자의 식별불가능성을 지지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질점(입자)은 이전의 점과 같다는 보장을 할 수 없으므로, 식별불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입자들의 궤도는 연속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자연은 도약하지 않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연속적으로 이동한다.’라고 주장한 라이프니츠의 법칙과도 맞닿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자연은 도약할 수 있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반드시 연속적으로 이동해야만 하는 것은 아님을 말입니다. 그것은 20세기 초 양자역학이 출현하면서부터였습니다.


입자의 동일성 혹은 식별불가능성에 대한 부분은 사실 물리학, 특히 통계물리학에서는 여전히 난제 중에 하나입니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엔트로피 역설입니다. 예를 들어, 서로 같은 입자가 어떤 상자 안에서 격막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격막이 사라지면, 즉, 섞이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들 입자들은 완전히 똑같기 때문에 섞이기 전후의 엔트로피는 같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아주 미세한 특징 하나만 차이나는, 즉, 다른 입자라면 격막이 제거된 이후, 입자들의 상태는 점점 무질서해질 것이므로 엔트로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할 것입니다. 아주 가벼운 원소인 아르곤을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는 아르곤이 단 하나의 원소로서 동일한 수백만 개의 아르곤 입자가 있다고 해도 이들은 모두 동일한 입자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아르곤 중 일부가 아주 미세한 차이를 낼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들이 섞였을 때 엔트로피가 증가할지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있을까요? 그 차이가 만약 객관적인 차이가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인식에 따른 차이에 기인한다면, 그래도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적록색맹인 사람이 보기에 똑같은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같은 초록색 공 10개와 붉은색 공 10개가 격막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섞인다면, 이 사람이 보기에는 섞인 이후의 엔트로피는 증가하지 않을 것이지만, 색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본다면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것처럼 (즉, 더 무질서해지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엔트로피는 물리학에서 기본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공리계 안의 아패틱한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인 관찰에 의존하는 물리량이라는, 즉, 패틱한 것이라는 뜻일까요? 엔트로피는 우리 자신의 크기, 본성, 감각뿐 아니라, 연구하는 대상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무엇을 알고 싶은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성립할 수 있는 주장일까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헝가리의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는 이에 대해 엔트로피는 의인화된(anthropomorphic) 개념이라고 주장합니다. 위그너는 

“물리학 법칙의 공식화에 수학 언어가 보여 주는 적절함은 기적이자 놀라운 산물이다. 우리는 이 선물을 이해하지 못하며, 이 선물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선물에 감사해야 하고, 이 기적의 유효성이 미래 연구에서도 유지되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물이 좋은 싫든 기쁘게, 어쩌면 또한 당황스럽더라도 넓은 지식의 분야로 확장되기를 바라야 한다.”

라고 수학적 추상화의 유용함과 위대함을, 기이함을 역설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엔트로피에 대해서는 의인화된 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일견 납득되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위그너는 

“의식을 참고하지 않고 양자역학 법칙들을 온전히 일관된 방식으로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비단 엔트로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양자역학 대상들도 결국 패틱함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위그너는 아패틱한 수학적 공리 안에서의 물리학과 패틱한 엔트로피 혹은 양자역학의 대상이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을 한 적이 없습니다.


물리학에서 아패틱한 수학이 늘 통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이중슬릿(double-slit) 실험일 것입니다. 이 실험은 양자역학의 기묘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아패틱과 패틱의 대립,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아패틱이 의존하고 있는 배중률을 깨뜨리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전자, 광자 같은 양자역학적 기본입자가 이중슬릿 실험에서 보이는 기묘한 특징들로 미뤄봤을 때, 양자역학의 기본 입자들은 지금까지의 수학적 배중률을 만족하지 않음은 확실합니다. 슬릿을 한 개씩 가리고 차례로 실험한 결과의 합과, 슬릿을 모두 개방하여 한 번에 측정한 결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는 단일 슬릿 상황에서는 전자들이 고전물리학의 입자처럼 행동하다가, 이중슬릿 상황에서는 전자들이 마치 그 상황을 인지라도 한 듯, 파동의 행동 양식을 취하며 서로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즉. 전자에게는 A or B라는 선택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AorB), (A간섭B)라는 선택지가 추가적으로 생긴 것입니다. 이는 배중률을 정확하게 위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신기하게도 두 슬릿 중 어느 슬릿을 통과했는지를 인간이 측정하기 시작하면 전자는 파동이 아니라 다시 입자처럼 행동합니다. 즉, 측정이라는 행위가 전자의 파동이라는 Nature를 붕괴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 이중슬릿 실험 외에도 양자역학의 기묘한 현상 중 하나인 양자얽힘은 아인슈타인을 괴롭힌 사례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얽힘이 인과율에 위배된다고 믿었는데, 이 현상을 유령 같은 원격 상호작용이라며 비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양자얽힘은 대기권에서 위성통신이나 지상에서는 거대한 양자컴퓨터의 작동 핵심 알고리즘으로 이미 상용화되어 활용되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나오는 또 다른 기묘한 현상인 중첩, 불확정성, 측정 혹은 관찰에 의한 교란, 개별성 대 동일성 같은 문제들은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기존의 공리적 체계와 수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법칙의 안정성에 더욱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일성과 덧셈의 결합법칙, 배중률과 비모순율은 이중슬릿 실험에서는 성립하지 않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로 인해 양자역학에서는 고전역학까지만 해도 잘 통했던 수학적 아패틱함, 즉, 논리학적, 집합론적 공리를 개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아패틱과 동일성, 그리고 이 둘이 낳은 인지적 지식들을 양자역학을 포함한 우주의 기초를 완전히 지배하는 원리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당대의 물리학자들에게는 물론, 철학자들, 수학자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자들이 지적한 대로, 양자역학의 기묘한 그리고 패틱한 특징을 알게 된 물리학자들이 인간의 정신세계로 탐구의 방향을 넓히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볼프강 파울리와 융의 정신과학에 대한 협업,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같은 저작물, 슈뢰딩거의 인도 베단타 전통에 대한 관심 등은 그러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슈뢰딩거는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인간의 정신을 제거하는 것은 큰 실수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물을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되는 사물 사이의 분리의 문제로 회귀합니다.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접근이 있습니다.

1. 동일성에 초점을 맞춘 입장: 데이비드 봄으로 대표되는 학자들은 관찰자와 관찰된 것 사이의 분리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상대성이론에서는 세계가 기본 구성 요소들로 구성된다는 개념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는데, 따라서 기본 구성 요소들로 재구축하는 것을 시도하기보다는, 사건의 과정과 우주적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세계를 보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는 봄이 “유사한 차이점들과 차이 나는 유사성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라고 주장하며 파편화된 접근법에 반대한 입장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2. 차이에 초점을 맞춘 입장 (파편화 옹호): 헤르만 바일로 대표되는 학자들은 수학과 달리, 시, 신화, 종교, 역사, 철학 등 모든 인간의 언어와 관련된 지식은 ‘인간의 무한한 자기기만 능력’에 의해 오염된다고 보았습니다. 자연과학은 상징적 구조물이고, 과학의 결과는 ‘단순히 상징의 형식적 비계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바일에 따르면 모든 자연과학은 단 두 개의 상징인 공집합과 { } 위에 만들어질 수 있는 형식적 구조물일 뿐입니다. 이 구조물을 객관적이고 논쟁의 여지없이 만드는 이성(로고스)은 언제나 진보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자연과학의 기초와 구조물은 아패틱하고, 아무런 잡음 없이 정신에서 정신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전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아닌 인간에게 관심을 돌리면, 상징의 거대한 골격의 구성 요소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다른 요소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내면적 인식에 기초한 해석에서 나오고, 바로 거기서부터 파편화가 일어납니다. 바일에 따르면 수학과 물리학은 우리를 통합으로 이끌고, 시, 철학, 종교, 역사 등 (존재의 보호막이 되는 그 밖의 상징체계들)은 우리를 파멸(파편화)로 이끈다고 봅니다. 


저자들의 여정은 물리학을 넘어, 시와 사회과학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저자들은 릴케와 발레리 같은 시인들의 추상적인 시를 언급하면서, 시인에게 경험에서 개념을, 덧없는 것에서 영원한 것을 떼어 놓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은 물리학자에게 입자처럼 보이면 파동을 조사하고, 파동처럼 보이면 입자를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릴케의 시를 언급하며 저자들은 우리가 만든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모든 구분이 우리를 무엇인가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고, 단순한 이 기억 속에 새로운 지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조금씩 저자들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들이 사회과학으로 넘어와서 이어가는 논의들은 보다 직설적입니다. 저자들이 보기에 사회과학은 인간 정신과 사회를 이성, 필연, 공리 혹은 법칙 같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맞추려는 다양한 시도 중 하나입니다. 루소와 로크의 철학에서 보이듯, 사회 혹은 인간 개체를 계산 혹은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경제학의 시조로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전반기에 모든 영역에 대한 숫자로의 표현 (인쇄된 숫자들의 쇄도)이 확장되었는데, 이는 사회, 정치, 경제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회과학에 본격적으로 자연과학의 미적분학, 통계학 같은 도구가 도입되면서, 전체와 개별 사이의 관계, 다자와 일자, 사회와 정치체계, 가족과 개인 사이의 관계가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의 1인 1표 개념은 동일성원리에 입각한 것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은 결정론적 물질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경제학의 시조들이 언급한 최대화, 혹은 최소화 같은 개념의 성립은 이들을 계산할 수 있는 도구를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같은 개념을 언급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수학의 최적화 도구를 인간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19세기 중반에는 통계적 사고가 출현했는데, 특히 케틀레가 천체물리학 법칙들을 사회에 적용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 개인이 아닌 인구 집단의 행동과 속성에 대한 질문에 본격적으로 통계적 방법을 적용한 케틀레의 시도는 심지어는 푸리에와 맥스웰 같은 물리학자들의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맥스웰은 케틀레의 ‘오류법칙’을 기체분자의 속도분포 이론에 적용함으로써 열역학의 기본 원리 확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맥스웰은 논리학이나 경험론이 지식의 궁극적 기초를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들이 소개한 맥스웰의 짧은 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정신의 벽돌을 준비하러 가라!
모든 구석에서 벽돌을 가져오고,
당신의 기초를 모래 위에 단단히
최고의 감각이라는 모르타르로 고정시켜라
꼭대기는 높이 하늘로 솟을 것이다.

저자들은 맥스웰의 짧은 시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동일성과 아패틱이라는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벽돌’로 확실성이라는 건물을 이 세상 안에 지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이 건물에 영향을 미치는 유동성, 패틱한 것, 차이가 존재하고, 이것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의 조건이고, 이 조건에서 벗어나려 할 때 바벨탑을 지었던 사람들과 같은 교만과 신성모독에 빠질 것이라고 암시한다고 말입니다. 사회과학의 일종의 신성모독은 조금 더 극단적인 방향, 즉, 경제학에서의 수학적 공리를 찾으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심지어 경제학은 경험에 앞서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이어받아 현대 수리경제학의 아버지 격인 모르겐슈테른과 폰 노이만의 기념비적 저작 ‘게임이론과 경제 행동’에서는 경제학의 새로운 아패틱 기초를 만들려는 시도도 이어졌습니다. 모르겐슈테른은 저작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경제 행동의 전형적인 문제들이 적절한 전략게임들의 수학 개념들과 정확하게 동일하다는 것이 만족스럽게 증명되기를 희망한다.” 


모르겐슈테른과 폰 노이만은 물리학을 예로 들며, 경제학도 그런 성공적인 롤 모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즉, 물리학에 수학이 대단히 성공적으로 적용된 것처럼 경제학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러한 낙관주의는 결국 틀렸음이 판명되었습니다. 이론에 의한 예측이라는 최고 기준은 여전히 비현실적이며, 물리학과의 과도한 유추가 함정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직유의 함정’이라고도 불립니다. 예를 들어 돈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유체역학의 이론 (Navier-Stokes equation)을 가져오거나, 물가 상승을 설명하기 위해 화학반응속도론 등을 가져온다면, 수학적으로는 유용한 장치가 될 수 있으나, 그들 사이의 유비관계가 직유 그 이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경제학에는 물리학이 수학에서 가져온 동일성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경제학에서 만약 수학적 아패틱함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우선 동일성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제학에서 필요한 동일성 가정은 무엇일까요? 저자들은 마치 수학에서 1 (일자), 물리학에서 원자 같은 개념에 대응하는, 기본 개념으로서 경제학에서는 ‘단일한 개인의 의지’를 언급합니다. 이는 ‘로빈슨 크루소’ 모델로 불립니다. 집합론의 공리적 타당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사회 교환경제 이론에서 고립된 개인을 내세우는 매우 단순화된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현대 경제학에서 이러한 단순화된 모델에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이 모델이 다양한 사회적 영향에 노출된 개인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영향 요소들은 확실히 큰 차이를 만들지만, 최대화 과정(즉, 로빈슨 크루소 같은 파편화된 개인의 집합으로 사회의 속성을 만들기)의 형식적 속성을 변화시키는지는 의문스럽다고 저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정말 고민해야 하는 것은 고립된 개인과 사회적 영향을 받는 개인을 동일하게 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자아인 로빈슨 크루소와 관련된 가정에서 자신을 인식하는가? 우리는 인간 행위자인 우리 자신, 혹은 인간 행위자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욕망을 수량화하거나 순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나?’


여기에 한 가지 가정을 더 고민해야 합니다. 

“합리적 인간 주체는 완벽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선호도 체계를 가진 개인이어야 한다. 즉, 어떤 두 가지 대상 혹은 어떤 두 가지 상상의 사건에 대해서도 하나를 선호하는 명확한 직관을 가져야 한다.”


모르겐슈테른과 폰 노이만의 시도는 이러한 가정에 기반을 둔 채, 위의 핵심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심리적 측면에 강조되는 인간 행동을 수학적으로 묘사할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다고 가정했고, 기본적 심리 현상들의 공리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위의 핵심 질문에는 대답을 못 한 것입니다. 이는 

“로빈슨 크루소 같은 공리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인간 개체와 얼마나 ‘충분히 비슷’한가? 그리고 우리는 그 차이가 좋은지 혹은 나쁜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 장치를 계속 사용하여 저자들은 개인이라고 해도, 개인의 선호도 부등식은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뀔 수 있는데, 이는 기본적인 수학적 공리 위반임을 지적합니다. 실제로 최근의 실험실 연구기법에 따르면, 개인의 선호도는 금전뿐만 아니라, 도덕 및 윤리적 고려 사항의 존재, 타인에 의한 행동 관찰의 성격과 정도, 결정이 포함된 맥락, 결정을 내리는 개인의 자기 선택 게임의 상황 등에도 영향을 받음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즉, 실험실에서조차 욕망은 맥락에서 독립적이지 않고, 선호는 반드시 이행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완전한 선호 체계를 가진 개인’이라는 가정은 현실화될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폰 노이만 이후의 합리적 의사결정의 수학적 이론의 핵임은 “인간의 모든 행동은 안정된 선호 집합에서 각자의 효용을 최대화하고 다양한 시장에서 다른 공급물과 정보를 최적의 양으로 모으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볼 수 있다.”라는 게리 베커의 요약으로 정리됩니다. 여전히 현대 경제학자들에게는 동일성 가정이 화두입니다. 이는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 즉, ‘다른 것들이 같다면’ or ‘다른 변수들이 동일하다면’ 같은 표현으로 대표됩니다. 그러나 경제학은 물리학과는 달리, 이 동일성 가정을 통해 부정확성은 미미하게 줄어들고, 예측력은 빈약하게 발전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학 외에도 심리학 같은 사회과학에서도 이러한 수학적 아패틱함, 공리주의가 통용되기 어려움을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생각의 논리적 법칙들이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비모순율보다도 훨씬 참이다.. 즉, 과학과 확실성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동일성과 비모순율, 즉, ‘동일성’ 공리를 이 모델 안에서 보존하는 것은 정신생활의 역학에 적용될 수 없다”

고 주장합니다. 프로이트는 '양립불가능한 충동은 반드시 서로를 감소시키거나 없애버리지는 않으며, 이러한 양립불가능한 충동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와 동인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프로이트의 다음과 같은 사색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궁극적인 문제, 과학과 삶이라는 거대한 문제와 관련된 곳에서 우리 각자는 뿌리 깊은 내부 편견의 지배를 받고, 우리의 사색은 자기도 모르게 그 편견의 손에 놀아난다.”

프로이트를 예로 들며 저자들은, 만약 사회과학이 우리의 욕망과 행복의 본성을 아직 제대로 따져 묻지 못했다면, 더 나쁘게는 사회과학이 그 본성을 혼란스럽게 이해한 기초 위에 구성됐다면, 우리의 정치-경제적 기구들은 위험한 독단의 바퀴를 굴리고 있는 셈이라고 염려를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 독단이 초래할 위험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경고하면서 말입니다. 경제학과 심리학에 대한 저자들의 사색을 놓고 보건대, 저자들은 사회과학같이 우리의 삶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즉, 정책, 정치, 경제 등의 학문에서 물리학보다 더 불확실한 직유의 한계, 공리성의 무리한 연장,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견강부회 가능성을 더 크게 염려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들의 마지막은 시간에 대한 동일성과 윤리학의 문제로 달려갑니다. 시간의 동일성에 대해 저자들은 이것이 비모순율이라는 사유법칙의 근거를 이루는 유용한 공리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전능한 신을 제한하는데 이용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자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간의 동일성이 지금까지 알아보았던 다른 동일성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면, 시간을 기초로 활용할 수 있을까?”


물리학에서는 과거와 미래, 지금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서 시간의 흐름은 중요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지금’의 경험은 언제나 물리학의 범위를 넘어서 존재할 것이라 확신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모든 공간에서 같은 순간을 객관적으로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것이 드러났는데, 이는 동시성조차도 상대성의 대상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연속체로만 다루게 된다면 ‘지금’은 다른 순간들과 식별 불가능한 것이 되는데, 이는 상대성원리를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물리학은 고전역학 시대까지는 시공간을 아패틱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숫자로 자연스럽게 표현했으며, 이는 미적분학의 근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패틱한 숫자 안에서 물리학이 정의하는 시간은 엄청난 규모의 수의 집합을 필요로 했고, 그 집합 안에서만 연속체 관점에서 시간이 정의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공간을 이성의 영역(아패틱)으로, 시간을 직관의 영역(패틱)으로 보았습니다. 수로서의 시간 (기계적, 외연적, 물질적, 시계의 시간))이 정신의 시간(직관의 시간(duree))에 적용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자들의 마지막 장은 윤리적 관점에서의 ‘동일성 vs 차이’에 대한 사색으로 마무리됩니다. 저자들이 그리스 철학, 이슬람 철학,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리, 근대 철학과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심리학, 역사학, 종교학 등을 넘나들며 계속 알아보려 했던 것처럼, 필연적인 동일성이나 차이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우리 지식의 완전히 안정된 기초는 없다는, 즉, 일자-다자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결정해 주는 공리도, 사유법칙도, 수학적 유추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다소 무의미해 보이는, 혹은 불확실해 보이는 관점도 동일성 혹은 차이를 갈망하며 추구되어 온 기존의 철학 혹은 사유 방식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줄 수 있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저자들은 티베트 불교의 사례를 듭니다. 즉, ‘중도의 길’을 예로 듭니다. 중도의 길은 동일성과 차이를 규정하는 필연적 법칙이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생긴 그릇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윤리적 판단을 위한 필수 장치로서 ‘반복’이 언급됩니다. 반복을 통해 동일성과 차이라는 두 가지 측면은 분리돼 경험된 후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 속에 경험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저자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동시성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들의 핵심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당신이 동일성과 차이의 끝없는 신비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수록 당신의 개별적 추구 능력 (확신과 의심을 키우는 능력, 새로운 기초와 그 기초 아래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발견하는 능력)도 더 커질 것이다라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책은 좁게 본다면 서구의 지성사를 정리한 짧은 빅히스토리 도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류가 어떻게 사유의 체계를 만들어 왔고, 그 체계 위에서 지식을 구성해 왔는지를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근래에 보기 힘든 다학제적 접근을 취하는 철학책이자 역사책, 그리고 과학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는 대부분의 수학자들은 증명에 대한 엄밀함만큼이나, 공리의 독립성과 확실성에도 많은 고민을 합니다. 애초에 그 공리가 충분히 확실하지 않으면 그에 기반한 증명의 전개는 허무한 결론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엄밀성을 추구하는 수학 연구의 저널에서도 이러한 엉뚱한 공리와 증명 전개로 인해 거절되는 논문이 부지기수입니다. 수학도 이럴진대, 물리학이나 경제학, 공학이나 심리학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물리학 연구 저널에도 오로지 수학적 공리에 입각한 이론적인 근거만 가지고 새로운 발견을 했다고 주장하는 연구들이 논문으로 실리기를 바라며 오늘도 수십, 수백 편씩 제출되고 있지만, 그중 상당수는 과거의 논리를 재탕한 것이거나, 물리가 아닌 수학에 가까운 연구 결과들일뿐인 것들 것 많습니다. 공학에서는 수학적 원리에 입각한 물리 이론을 응용하여 시스템을 만들고, 새로운 현상을 해석하는 연구를 하지만, 이 역시 근간이 되는 이론과 모형의 정당성을 파헤치면 지반부터 흔들리는 것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근거 없는 가정이나 단순화, 의미가 모호한 직유에 가까운 모델들이 여전히 산재해 있습니다. 


이러한 학문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지식, 지성의 결정체라고 불리는 학문들이라는 것의 근간이 얼마나 약한 지지대 위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에 대한 설명 체계는 여기서 더 발전할 여지가 없는 것일까요? 현재 강력-약력-전자기력까지 통합된 '대통일이론'을 넘어, 중력까지 합칠 수 있는 '모든 것의 이론'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인간의 심리는 정말 수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일까요? 인간의 사회는 물리학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일까요? 통계학은 개인의 개성을, 혹은 오류를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물음들은 여전히 학문의 최전선에서 지식을 쌓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학자가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궁극적인 물음들일 것입니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그 앞의 미지의 영역을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지식 행보가 어떤 기초 위에 있었는지를, 그리고 동일성과 차이라는 대립 구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성찰은 오히려 이런 시점에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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