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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May 02. 2024

폴 오스터가 만들어낸 우연의 세계

타자기 하나로만 만들어 낸 고독과 결핍 속의 의미 탐색 여정

미국의 소설가 Paul Bejamin Auster (1947-2024)


미국의 작가 폴 오스터Paul Auster가 4.30자로 영면에 들었다고 한다 (향년 77세). 47년 생인 그는 여러 편의 중장편 소설과 에세이집, 전기, 극본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일부 작품은 스스로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학부 저학년 시절, 하루 세 시간씩 통학하던 지하철에 읽을 거리를 찾기 위해 학교 중앙도서관의 외국작가 소설 서가를 랜덤하게 탐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공중곡예사(Mr. Vertigo)'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다. 다른 작가의 문체와는 확연히 다른 문장 스타일과 몽환적인 작중 분위기, 뭔가 현실과 비현실 어딘가에 애매하게 위치한 작중 인물들과 그들의 그럴듯한 이야기가 만들어 내는 우연의 연속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플롯, 그것을 그저 무심한듯 툭툭 그려내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은 그의 작품에 한동안 빠지게 만드는 동인이 되었다. 도서관에 있었던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달의 궁전, 뉴욕삼부작,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등을 읽으며 나는 오스터라는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세계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에 즐거웠다. 물론 당시 나의 문학적 감수성은 일천했기에 그의 작품은 그저 재미로만 읽었지, 따로 의미를 부여하며 곱씹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학부생 시절 다양한 책, 그중에서도 이런 소설들을 접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30대, 40대가 되어 다시 읽기 시작한 오스터의 작품은 스무살 시절 읽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스터 자신은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산 것 같지는 않다. 폴란드 유대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오스터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뉴저지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다가 영화 공부를 병행하기도 했었다. 어려운 시절, 첫번째 결혼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던 것 같고, 경제적 어려움과 가정의 불화로 인해 결국 첫번째 부인과는 얼마 못가 이혼했던 것 같다. 첫 부인과의 결혼에서 얻은 장남은 오스터가 재혼한 후 그의 마음의 평생의 걱정거리가 된 것 같았다. 장남은 어렸을 때부터 오스터의 두번째 부인, 즉, 아들에게는 새어머니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이리저리 엇나가며 속을 썩이더니, 결국 그 자신은 물론 심지어 그의 어린 딸, 즉, 오스터의 손녀마저도 2년 전 약물중독으로 급사하는 참척을 겪었다. 


오스터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형식으로 표현하자면 미국의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으나, 그런 형식적 분류보다도 그의 책을 탐독하면 그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오스터의 팬으로서, 내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을 이해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는 평생 랩탑이나 PC 등으로 작업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스터는 오래된 타자기 하나만으로 그저 하루에 12시간씩 꼬박꼬박 출퇴근하듯 글을 써내려 갔고, 그렇게 써내려 간 종이들의 뭉치는 한 권씩 차례로 소설로든, 에세이든, 전기 작품이든, 산문이든, 세상으로 나왔다.


전자식 워드프로세서와 타자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백스페이스backspace를 하기 어렵다는 것일 것이다. 물론 타자기도 인쇄한 후 수정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실시간으로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글을 다량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 직무를 갖는 작가에게 있어 타자기란 하등 유리할 것 없는 고리타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타자기의 타자 소리를 특별히 좋아하거나 종이와 물리적 키감 같은 아날로그한 감성에 푹 젖어야만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는지 하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생산성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전자식 워드프로세서로 진작에 전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타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문학적 특징이 있다. 그것은 move forward가 강제된다는 것이다. 즉, 글의 이어짐에 있어 일방통행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일견 단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오스터 같은 작가들에게는 오히려 특별한 액셀레이터가 된다. 오스터는 여러 작품 속에서 그의 스타일을 관통하는 몇 가지 문학적 장치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특징, 그리고 나도 늘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계속 인지하게 되는 특징이 바로 '우연성'이다. 물론 이것이 오스터가 우연에 맡겨 글을 휘날리는 스타일로 글을 아무렇게나 대충 쓴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우연성'이란 오히려 고도로 계획된,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연결된 것 같은, 그러한 실타래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우연성이 문학적 의미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생각의 흐름에 끊김이 생기면 안 된다. 예를 들어 A라는 작중 화자가 어느 스산한 가을, 뉴욕의 밤거리를 걷고 있는데 늘상 지나쳐 가던 평범한 가로수의 한 가지가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관측했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그 다음에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냥 우연에 맡겨 버리면 정말 개연성 없어 보이는 연결 구조가 끊임없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작중 화자 A는 그 빛남의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 해, 밤거리의 4차선 도로를 횡단하지만 마침 그를 못 본 트럭에 A가 튕겨져 나가 그 가로수 옆에 있던 가게로 그를 강제로 진입하게 만들 수 있다. 그 가게는 마침 문을 닫기 전이었는데, 그 가게의 허리 구부러진 주인장은 그의 몸뚱아리로 A를 받아내다시피 한다 같은 식의 전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우연의 연속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backspace가 있으면 안 된다. 4차선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진흙투성이 시골길이었다고 고치는 것이 낫겠군, 아니야 가로수보다는 나트륨등이 깜빡거리는 오랜  녹슨 가로등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어, 작중 화자를 등장시킬 것이 아니라 A의 친구라고 설정하자 그것이 낫겠어, 같이 계속 생각의 새로고침은 작가의 머리속에서 이어질텐데, 전자 워드프로세서는 그 새로고침을 충실한 집사인 양 그대로 실행해준다. 그러면서 한 때 모니터의 커서와 함께 깜빡거리던 그 우연의 문장들은 허공 어딘가의 영역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원래 이어가려던 즉흥적인 그렇지만 인상으로 가득했던 스토리들은 수많은 갈래길을 마주한 채, 마치 관찰 한 번만으로 수억 개의 평행우주가 붕괴되는 양자역학적 상태함수가 되고 만다. 이렇게 사라진 평행우주 속에는 작가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오스터가 처음부터 이러한 작품의 스타일, 혹은 문장 이어가기, 우연성의 우연성을 염두에 두며 오래된 타자기를 예찬하고 그것에만 집착하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자신의 오래된 작가로서의 습관이 스타일로, 다시 그 스타일이 습관의 강화로 양방향에서 되먹임구조를 만들며 그렇게 오스터의 문장 스타일과 이야기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평단의 관점이나 해석에 대해 오스터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학적으로 우연 혹은 랜덤에 기반하여 어떤 과정을 탐색하는 방법론은 확률미분방정식으로 잘 이론이 정립되어 있고, 물리학에서는 이러한 방법론을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같은 계산과학방법론을 이용하여 다양한 불확실 세계의 확률 분포를 모사한다. 다만 문학에서의 우연과 수학 혹은 물리학에서의 랜덤은 다소 결이 다르다. 문학의 우연은 별 상관성 없어 보이는 인물이나 이야기, 장치들의 연결이 스스로 생명력을 만들면서 방향을 갖춰가는 구조라면, 수학이나 물리학의 랜덤은 자연에서 피할 수 없는, 혹은 자연적인 노이즈와 불확실성을 다루기 위한 개념이다. 랜덤에서 만약 어떤 상관성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상관성이 계속 살아남거나 뭔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는 그것을 랜덤이라고 부르기 어렵게 된다. correlated noise, correlated disorder 라는 개념은 내가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오랜 연구 주제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correlated disorder가 되면 완전한 disorder와는 다른 맥락을 가지게 된다.


폴 오스터를 문단에 데뷔시킨 그의 첫 작품은 이른바 '뉴욕 3부작' 이다. 이 작품은 1986년 전후로 차례로 발표된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긴 방'의 연작을 가리킨다. 폴 오스터가 청년에서 중년으로 접어들던 시절, 그리고 오랜 무명 시절과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쓰기 시작한 이 기념비적인 초기작들을 관통하는 주제 역시 우연성이다. 다만 이 시기의 오스터가 천착한 개념은 단순한 우연보다도, 그렇게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가느다란 실타래로 그리게 되는 작중 인물들의 고독함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은 때로운 작중 인물들에게 기회를 주지만, 결국 그러한 기회들은 계속 인물들을 좌절시키고 마침내 절망에 이르게 만드는 장치들이 된다. 아마도 그러한 인물들에 오스터는 당시의 자신 자체를 투영시키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스터의 소설들은 대개 작가 자신의 삶과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특정 사건이나 인물, 혹은 시대나 집단을 탐구하는 르뽀 같이도 하고,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를 차례로 주워담아 겨우겨우 헐겁게 이어붙인 탐정 소설 같기도 하다. 핍진성이라고는 전혀 타자기 상에서 고민했을 것 같지 않은 환상소설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고, 로드무비, 버디무비를 연상케 하는 작품들도 있다. 오스터는 어떤 특정한 형식의 작품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떤 형식으로든, 작품속에서 독자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왜 오스터가 작중 인물들의 오락가락하는 삶 속에서 그들을 통해 인간을 고독하고 어렵게 만드는 원초적인 도전 요소에 집중하게 되었는지다. 오스터는 뭔가 늘 결핍, 부적합, 미완성, 부족함 등을 여기저기에 흩뿌려 놓는다. 우연이라는 것 자체도 애초에 핍진성, 개연성의 부족함의 결과로 나오게 된 장치들일 뿐이다. 주인공에게는 뭔가 늘 부족하고 쫒기고 어렵고 고난이 생긴다. 배가 고프고 뭔가가 있다가 없어지고,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며,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연속된다. 이러한 장치들이 너무 과하게 사용되어 마치 부조리극 같다는 느낌마저 준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무엘 베게트 류의 작품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오스터의 광팬 중 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스터가 우연성을 통해 작품에서 결핍을 묘사하는 것은 '날실의 모티브로서 혈연,  씨실의 모티브로서 끊임없는 모티브의 연결 가능성을 확대하는 우연성'을 가져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스터 작품의 한 축은 끊임없이 풀려가는 실타래고, 다른 한 축은 그 풀려가는 실타래를 겨우겨우 끝만 연결하여 길다랗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평일 것이다. 


이러한 오스터의 작품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을 꼽으라면 이미 작품의 이름 속에 우연이 들어가 있는 '우연의 음악'일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도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타입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원래 직업도 소방관이었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갑자기 받게 되어 전혀 겪어 보지 않았던 도박 중독자의 삶으로 빠져들다가, 빚더미에 앉아 평생 노동교화형 같은 삶으로 자신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고가는 사람이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잘못된 선택의 연속은 그의 삶을 파괴에 가깝게 몰아가는 장치인데, 흥미롭게도 주인공은 그 파괴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 형벌을 주듯, 그 처참한 인생을 그저 짊어지려 한다. 겉으로 보면 스스로 불러온 우연의 재앙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오스터가 독자들 혹은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결국 그러한 인생은 짧디 짧으며 홀연히 사라지는 찰라의 순간들은 각 순간들이 우연의 일환인 것 같아도, 결국 그것들이 모여서 삶이라는 깨지기 쉬운 덩어리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지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쨌든 그 사람의 책임이자 권리라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없이 허무하다면 허무하고, 교훈을 찾으라면 찾을 수 있는 것이 오스터의 작품이지만, 이러한 2차적, 3차적 의미 해석 차원을 넘어서, 그저 그의 작품은 읽는 것만으로도 뭔가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해 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에도 오스터의 작품이 열린책들 같은 출판사를 통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고, 팬층도 두텁다고 알고 있다. 주요 대학의 영문과에서는 오스터를 주제로 학위를 받는 학자도 나오고 있는 것 같고, 조금씩 오스터의 작품 세계에 대한 연구들도 진척되는 것 같다. 이제 오스터도 질곡 같은 삶을 마감하였으니, 사후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핸 탐색과 의미 발견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를 이 세상에 오래 머물다 가지 않을 이방인으로 정체성을 부여했을 오스터가 다음 세상에서는 또 다른 우연과 마주하며 또 다른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그저 그러려니 하며 그의 오래된 타자기를 계속 두드리는 것을 상상해 본다. 


R.I.P. Paul Benjamin Auster (1947-2024)


https://www.nytimes.com/.../30/books/paul-auster-dea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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