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인자성 맥락에서의 복잡한 행동을 이해하려는 최전선
HR 분야에서는 ‘태도가 전부다’라는 말이 한 때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신규 직원을 채용할 때 그 사람의 적성이나 능력에 앞서, 그 사람의 태도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구호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태도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직무에 부적합하거나 능력이 부족하다는 핵심적인 단점까지 다 커버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연히 같은 조건이라면 더 우선시해서 봐야 하는 것이 태도이고, 사실 같은 조건인지 따지기 전에 핵심적인 판단 준거로 작용해야 하는 것이 태도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로버트 M. 새폴스키가 지은 책 ‘행동Behave’에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태도가 전부다’라는 구호를 빌려 ‘맥락context이 전부다’라고 요약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맥락은 의미의 맥락이 아닌,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중요한 맥락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며 다층위에 걸쳐 있으면서도 또 계속 변화하는 까다로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을 맥락에 맞게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맥락은 흔히 언어적 소통 과정에서 언어 뒤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많이 언급되곤 합니다. 그래서 행간의 의미를 읽는다 같은 표현도 종종 쓰이곤 합니다. 언어적 소통뿐만 아니라, 비어언적 소통, 예를 들어 제스처나 얼굴 표정, 특이한 행동 등에서도 의사전달이 가능합니다. 물론 비교적 의미가 잘 정의되는 언어적 소통에 비해, 비언어적 소통은 의미가 모호하거나 개념의 범주가 불확실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과 의미를 전달받는 사람이 공유하는 정보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이 발생합니다. 특히 메시지의 핵심 부분에서 오해가 발생한다면 의사소통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으려는 의미의 배경을 잘 공유하고 있고, 서로 사용하는 소통의 수단, 특히 언어적 수단 외에 행동 같은 비언어적 수단에 대한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이러한 오해는 많이 줄어들 것이고, 소통의 목적은 잘 달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각자의 행동과 언어를 아우르는 맥락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도 이러한 맥락 불일치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이 모인 사회에서는 어떨까요? 표준화된 단어와 발음, 표정으로 일관된 아나운서가 TV 뉴스에서 시청자를 바라보며 마치 로봇처럼 또박또박 전달하는 짧은 뉴스에서도 시청자들은 제각각 전달받는 뉴스에 대한 인지, 나아가 이해가 달라집니다. 어떤 뉴스는 오래 기억에 남는 것도 있고 어떤 뉴스는 금방 휘발되는 것도 있지만, 이러한 정도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음주운전 사고에 대한 뉴스에서도 음주 운전자의 성별이나 직업에 신경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음주운전 사고가 일어난 시간과 장소에 더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이러한 초점의 차이는 결국 각자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관점과 맥락이 일치하기 어렵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실 포유류, 특히 영장류나 인간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개체로서의 삶이 아닌 작은 집단, 심지어는 꽤 큰 무리를 이루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의사소통 수단이 그만큼 풍족해지고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간이 아닌 다른 포유류, 특히 영장류 집단에서는 맥락의 불일치에서 오는 갈등은 잘 관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눈앞의 공포와 분노 유발 요소,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에 반응하는 것은 개체는 물론 집단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대부분의 포유류는 비교적 확실한 신호 전달과 교환에 의거한 생존방식을 익혀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규모가 큰 사회를 이루며 문명을 발전시켜 온 인간 사회 내부에서는 대부분의 사회 갈등이 맥락의 불일치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새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우리와 같이 나눠볼 수 있다고 판단하는 지점이 시작됩니다.
과연 이 ‘맥락’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를 시도할 때 어느 수준까지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바로 이 주제에 천착하여 1,0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막힘없이 써내려 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성 들여 배치한 순서를 독자들이 차례대로 파악해 주기를 그리고 다시 모아주기를 바라며 독자들을 벽돌책 속으로 과감하게 초대합니다.
로버트 새폴스키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생물학과 및 의과대학 소속의 신경과학자이자 수십 년 간 아프리카에서 개코원숭이 같은 영장류 집단의 행동 양식과 스트레스를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하는 동물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30년 넘게 영장류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하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그들의 사회적 습성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한편, 영장류를 포함한 포유류의 뇌에서 왜 각각의 개체들이 특정한 행동을 보이는지를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끈질기게 추적합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의 공식적인 지적 목표는 인간의 가장 복잡한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생물학의 접근 방법을 쓰겠다는 것, 그렇지만 그것을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범주 안에만 가둬두는 성급한 구획화를 피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여러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 일단 인간을 당연히 유인원, 영장류, 그리고 포유류의 일부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구분될 수밖에 없는 지점을 놓치지는 않고 싶어 합니다. 그 차이에 우리의 인간성을 이해하는 방법, 나아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 숨어 있다고 믿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새폴스키가 우선적으로 깊게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것은 주로 개체로서의 인간의 행동이 아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보이는 행동의 이면에 어떤 생물학적 원리가 깔려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물론 새폴스키가 훈련받은 과학이 신경과학이나 동물학 같은 생물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새폴스키는 이것을 단순히 뇌과학, 신경생리학의 관점으로만 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점점 스케일을 넓혀가면서 각 스케일에서 이해된 특징들의 연결 구조를 찾고자 합니다. 그는 그렇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혹은 사회 속에서 보이는 행동을 하나의 큰 틀이자, 여러 의미가 연결된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보이는 '최선의 행동'과 '최악의 행동'은 마치 거울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이 양극단에 있는 것 같은 두 행동이 왜 하나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여러 층위에 따라 다양한 맥락을 놓고 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양극단에 있는 두 행동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는 양 극단 사이의 스펙트럼이 광범위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애초에 하나로 쉽게 일직선으로 뻗은 고속도로처럼 연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양극단으로 나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인간 행동의 최선 혹은 최악의 행동이라는 것을 다양한 층위의 맥락에서 본다는 것, 즉, 그 행동으로의 연결되는 다양한 인자의 존재는 인정하되, 그 연결 구조의 복잡다단함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동시에 인정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책의 서두에 나오는 뇌과학적 관점에서의 행동으로의 연결 구조 탐색만 하더라도 이미 충분히 복잡다단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우리 뇌가 해부학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거대한 조직이라는 것 외에도, 우리 뇌의 여러 영역은 요즘 유행하는 인공지능의 신경망 구조와 1:1로 대응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연결 구조를 갖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결국 미래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뇌 구조와 별로 상관성이 없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신경학자 폴 매클린의 제안대로 우리 뇌는 편의상 세 층위로 나뉠 수 있다고는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자로 잰 듯 구분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여전히 각 층위라고 부르는 영역에서도 하위 영역들이 독립적인지 여부나 대체 가능성, 혹은 숨어 있는 새로운 신경 세포 등에 대한 연구가 다 완성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우리 뇌와 우리 행동 사이의 연계를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사실 뇌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를 연구하고자 하는 연구는 지금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아직도 연구할 것은 산더미 같으며, 따라서 아마 100년 내로 우리 뇌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과거에 비해 fMRI, CT 같은 첨단 장비들이 속속 연구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고, 동물 실험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실험이 더 정교해지면서 우리는 우리 뇌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 있긴 합니다만, 실제로 그 뇌와 우리의 행동 혹은 습성이나 심리가 정확히 어떻게 함수적인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 입니다. 뇌과학 영역 중에 뇌의 각 영역들이 세포 수준에서 혹은 심지어 분자 수준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연구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 분야를 일명 ‘뇌지도학’이라고도 칭하는 커넥토믹스connectomics 라고도 부릅니다. 실제로 이러한 연구를 위해 뇌과학자들은 C. elegans 같은 선충을 이용하여 선충의 모든 신경 세포와 선충의 행동 양식을 대응시켜 파악하는 연구를 완성한 바 있습니다. 문제는 선충에 비해 포유류나 영장류, 나아가 인간의 뇌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 연결 구조를 파악하는 것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1장에서 밝히고 있듯, 신경과학은 우리의 뇌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뇌의 특정 영역이 우리의 특정 행동 혹은 동기나 반응 등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혹은 반대로 어떤 행동이 우리 뇌의 어떤 영역을 자극하는지를 이해하는데 아주 훌륭한 수단이 되어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경과학이 우리 행동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근원으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새폴스키가 재차 강조하듯, 뇌는 다양한 요인들이 수렴하여 행동을 만들어내는 최종적 공통 경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다른 포유류나 영장류와 달리, 왜 복잡한 뇌구조를 기반으로 다양한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맥락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주요 체크 포인트입니다. 다소 전문적인 낯선 용어와 복잡한 뇌 여러 영역의 연결 구조로 인해 처음 이 분야에 들어오는 독자들에게는 어려운 내용이 서두부터 부담을 안겨 주지만, 그 부분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이 두꺼운 책의 좋은 길라잡이가 되기 때문에 1장을 주의 깊게 잘 읽어 두는 것은 이 책 전체를 조망하는 데 있어, 특히 책의 핵심 주제로 접근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저자의 눈길은 이제 블랙박스에 들어가는 인풋input 쪽으로 옮겨갑니다. 뇌의 특정 영역을 자극한다는 그 자극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 대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를 위해 동물행동학이라는 분야를 꺼내 옵니다. 동물행동학은 스키너 류의 행동주의와는 달리 행동의 다양성에 초점을 둡니다. 동물행동학이 발견한 것은 각 종마다 가장 지배적인 감각이 있다는 것이고, 신경과학은 그 감각이 변연계에 가장 직접적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특히 인간에게는 시각 정보가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저자는 설명합니다. 단순히 얼굴 색깔 같은 정보를 넘어, 얼굴 형태나 자세 등에서도 감각적 정보가 뇌로 직결되면서 처리되고, 그 정보가 행동으로 연결된다는 것이죠. 시각, 청각, 후각, 혹은 페로몬 같은 감각적 자극 요소 외에도 언어 효과가 동물행동학 맥락에서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역시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언어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에 딱히 새로울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특정 단어가 무의식적으로 사고와 감정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해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언어와 행동을 중개하는 것은 뇌가 되기 때문입니다. 95%의 긍정적인 결과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5%의 부정적인 결과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수학적으로는 같은 이야기지만, 무의식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즉, 동물행동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는 뇌라는 블랙홀로 몰려드는 감각 신호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잘 감지되지 않는 언어나 심지어 이데올로기 같은 추상적 개념, 그리고 사회문화적 배경 같은 비감각적 신호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최근의 연구 성과는 흥미로운데, 이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덜 자율적이고 덜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감각이나 잠재의식에 포함된 신호가 주입되기 전의 단계는 어떨까요? 이를 위해 저자는 호르몬 같은 화학 물질을 꺼내 듭니다. 예를 들어 이미 대중적으로 공격성 호르몬으로도 잘 알려진 테스토스테론 같은 남성 호르몬은 정말 우리의 감각 이전에 우리의 공격적 행동을 결정하는 근원 신호가 되는 것일까요? 저자는 이 오래된 믿음에 반기를 듭니다. 예를 들어 일부 공격성은 사회적 학습에 의한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오히려 공격성이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테스토스테론은 과한 자신감과 낙천성을 부여할 수 있는데, 이는 충동성과 위험 감수 성향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고, 이것이 공격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관찰될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이는 뇌 안에서는 테스토스테론이 이마앞엽 곁질의 활동을 억제하고 편도체와의 기능적 결합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편도체와 시상의 결합은 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공격성으로 연결된다는 주장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테스토스테론의 효과는 맥락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맥락이 기존의 공격적 성향과 맞는 맥락이라면 그 공격성이 증폭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테스토스테론이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 내에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그것이 무엇이든 하게 만든다는 이른바 ‘도전 가설’로 연결됩니다. 그 무엇이든 에는 공격도 포함되지만 신사적인 행동도 포함된다는 것이 중요한 발견일 것입니다. 이는 신경펩타이드라고 부르는 옥시토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즉, 신경펩타이드 호르몬은 일방적인 행동 양식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비단 호르몬 같은 화학물질뿐만 아니라,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술이 공격성을 이끌어내는 메커니즘을 원래 공격성향이 있는 개체들이나 술이 사람의 공격성을 높인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만 발현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는 사회적 학습이 생물학 관점에서 행동을 설명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이야기합니다.
5장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레벨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성체 신경생성에 대한 것입니다. 뇌에서 벌어지는 것, 혹은 뇌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관여하는 호르몬 등을 언급하기 전에, 애초에 모든 신호가 모이는 뇌의 구성단위인 신경 세포가 ‘가소성’이 있다면 어떨까 가 바로 이 논의의 핵심입니다. 즉, 외부의 환경에 따라 뇌 구조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경고합니다. 이러한 신경 가소성이 뇌를 리셋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성급하게 연결되는 것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경가소성은 일상적 수준에서만 가능할 뿐이지, 완전히 엑스맨처럼 재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오히려 과감하게 신경 가소성의 다른 면을 환기하며 주장합니다. 신경가소성의 원리를 이용하여 어떤 행동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느낌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달라진 세상은 달라진 세계관을 낳고, 그것은 곧 뇌의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경 가소성은 일상의 수준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맥락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행동으로 연결되며, 행동의 연속은 결국 그 사람의 인생이 변함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6장에서 저자는 다시 한번 이마엽 겉질을 들여다봅니다. 여기서 저자가 보고자 하는 것은 이마엽 겉질이 성숙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고, 청소년기에는 아직 그것이 미숙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뇌의 다른 부위에 비해 이 영역 발달에 지연이 있는 까닭으로 저자는 진화적 요인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볍게 기각합니다. 청소년기에 이마엽 겉질 발달이 충분히 다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모험심이나 창조성을 발휘할 여지가 생길 수 있지만, 동시에 더 많은 청소년기 개체가 그 모험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의 보존 관점에서는 마이너스에 해당합니다. 대신 그가 내놓는 추측은 의도적인 지연입니다. 즉, 겉보기와는 달리 이마엽 겉질이 제대로 발달하려면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겁니다. 특히 뇌의 가소성을 고려했을 때, 뇌에서 가장 복잡한 기능을 늘 감당해야 하는 이마엽 겉질의 발달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임은 일견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잡한 기능은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제대로 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성공적인 대답을 발견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이것이 이마엽 겉질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된 유전자의 제약을 가장 덜 받고 오히려 성장기의 경험에 의해 더 영향을 많이 받는 영역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결국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경과학의 이면에 있는 유전학뿐만 아니라, 신경 가소성과 사회적 맥락에 의해 재배선되는 뇌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7장에서 저자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이어 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유전학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가 들여다보는 것은 뇌의 후성유전학입니다. 예를 들어 성장한 환경, 부모의 성향, 자라난 동네의 수준, 학창 시절의 교우관계와 스승, 심지어는 식단 같은 요소들이 뇌의 유전자를 바꿀 수 있다는 것(혹은 뇌의 배선을 재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 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의이자 경고 메시지를 저자는 다시 강조합니다. 이러한 연구의 이면에는 후성유전학 만능주의로 흐를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자는 강조합니다. 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일시적이라고 말입니다. 즉, 뇌의 가소성에 영향을 미칠지는 몰라도 그것을 후성유전학적 맥락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실제로 아동에게 있어 어린 시절의 자극과 환경은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장인자, 유전자 스위치, 말이집 형성률 같은 개념의 틀로만 정의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자는 다양한 맥락에서 아동기의 성장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며, 특히 아동기의 성장 환경이 성인이 되었을 때의 행동과 연결되는 구조를 밝히는 통찰을 다방면에서 찾아야 함을 역설합니다.
후성유전학 이야기를 꺼냈으니, 당연하게도 다음 장은 유전학에 대한 것입니다. 뇌도 보았고, 호르몬도 보았으니, 유전자를 볼 차례가 된 셈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신경과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인 저자는 확실히 유전학자의 입장과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저자가 유전학에 대한 이해가 일천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저자는 유전자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행동의 모든 특질은 유전자 변이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다시금 이 유전자의 작동마저도 맥락 의존적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유전자와 행동의 연결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전자 하나가 특정 단백질 합성에 1:1로 연결될 수도 있지만, N:1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N:M으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특정 단백질은 다시 mRNA 발현에 관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경 전달물질이나 호르몬, 신경 세포의 발달이나 가소성에 대부분 이러한 단백질 발현이 관여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특정 유전자의 변이가 특정 행동의 주원인으로 1:1 대응된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결론이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특정 맥락에서 유전자가 발현하는 단백질 종류나 농도가 달라지거나, 단백질 구조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다시 mRNA 발현에 다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유전자를 통해 인간의 행동 특이점을 해석하는 관점은 반드시 사회적 맥락의 다층위 구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유전자 정보를 모두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모두 예측할 수 있다는 필연성이 성립하기 어려움을 내포합니다. 유전자는 맥락 의존적 성향이 있기에 행동 이면의 경향성, 잠재성, 특정 자극 취약성 등을 지시할 뿐입니다.
그러면 유전자나 호르몬, 신경과학이나 신경 세포의 가소성 같은 생물학적 접근 방법 외에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은 없는 것일까요? 사실 이미 이러한 생물학적 접근 방법 자체가 고도로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지금까지 저자가 강조했던 것을 기억하면, 당연히 저자는 이제 점점 보다 큰 스케일의 이야기를 펼칠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9장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이 장부터는 조금 다른 결로 책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문화 차이가 최선 vs 최악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어떠한 패턴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즉, 서로 다른 문화가 서로 다른 뇌를 만드는지 혹은 그 역인지가 궁금한 것이죠. 아니면 아예 공진화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이전까지 저자가 취해 왔던 생물학 기반의 접근에 비해 사실 훨씬 더 어려운 연구가 됩니다. 생물학 기반의 접근은 대부분 재현 가능하고 실험실 혹은 일정한 조건이 갖춰진 실험 환경에서 통계적으로 처리될 수 있는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지만, 사회와 문화로 맥락을 넓히면 그러한 연구가 훨씬 더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데이터 수집은 물론이고, 데이터 처리, 특히 가설의 검정 단계에서 많은 오류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행동을 다루는 상당히 많은 사회과학 연구들은 이러한 실험 설계의 오류, 데이터 해석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재현의 어려움은 물론, 심지어는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론이 나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의 틀 안에서만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것은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사회성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성 맥락을 따질 때 저자가 주목한 것은 문화입니다. 저자가 취하는 문화의 정의는 '유전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는 행동 양식과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양식에는 보편성이 있는 것도 있고 차이점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문화권에서 서로 다른 행동 양식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차이점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동아시아의 집단문화와 미국의 개인주의의 차이점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일 것입니다. 문화 차이는 서로 다른 도덕 체계를 낳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점이 인간의 행동에 끼치는 배경에 깔린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서로 다른 도덕 체계가 나오는 방식은 어떻게 시작될까요? 우선 문화 차이는 감각 처리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시선의 처리 방식도 배경을 보는지, 주인공을 보는지로 나뉠 수 있을 텐데, 이는 맥락을 중시하는 집단적인 문화와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문화의 차이로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문화의 차이는 고정된 것은 아니며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임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저자는 이 책 전체에서 늘 특정 관점이나 맥락으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것을 고정된 관념화 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며 빈번하게 독자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줍니다. 문화적 차이로 이해하는 인간 행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반드시 특정 지역의 동일한 집단일 필요도 없으며, 그것은 유전자 레벨에서 결정되는 것도 아님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중국이라도 그냥 동아시아의 집단문화로만 치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남부의 벼농사 지역(집단주의)과 북부의 밀농사 지역(개인주의)의 문화는 실제로도 많이 다른데, 이는 사회적 상호의존 여부가 집단 vs 개인주의를 가르는 주된 요인이 됨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문화적 차이는 특정 도파민 수용체 유전자 변이의 출현 확률까지도 결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의 문화적 집단주의는 7R 유전자 변이체를 도태시키는 선택압과 함께 공진화했다는 발견이 그것입니다. 이는 문화적 대비가 도덕, 감정 이입, 양육 관습, 경쟁, 협동, 행복의 정의 등 예상 가능한 모든 측면에서 드러나면서도 유전자 수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문화 맥락에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공진화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뇌가 문화를, 문화가 뇌를, 다시 그 뇌가 문화를 형성하고 변이 시키는 반복된 진화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아동기의 뇌는 그 아동이 속한 문화의 주입에 영향을 크게 받는데, 아동은 쉽게 자신의 주변 동료에게 그 문화를 퍼트릴 수 있습니다. 앞서 본 것처럼 청소년기까지는 이성적, 논리적 추론을 담당하는 이마엽 겉절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황인데,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청소년기의 뇌에는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신경과학적인 채널보다는 또래로부터 받는, 혹은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받는 문화의 자극이 더 큰 영향을 주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해 저자는 뇌와 신경과학, 유전자, 호르몬과 사회문화적 맥락의 공진화까지 살펴봤습니다. 이는 모두 인간의 행동을 다각도로 이해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접근법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행동 자체는 고정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행동도 진화의 예외가 아닐 텐데, 그러면 진화가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 질문입니다. 유전학자 테도오시우스 도브잔스키의 표현대로
‘생물학의 모든 것이 진화에 비추어 보아야만 이해된다’
고 했는데, 저자는 인간의 행동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형질의 유전적 수단으로써의 후대로의 전달, 돌연변이와 유전자 재조합에 의한 전달 형질의 변이 발생, 변이 중 일부가 다른 변이보다 더 뛰어난 환경 적응도를 보인다는 원칙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동도 이러한 진화의 원칙에 따라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저자의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생물학이 그렇습니다. 이 학문은 '사회적 행동이 진화에 의해 최적화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즉, 행동의 진화에도 유전자가 이기적 각축을 벌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수준뿐만 아니라, 이는 집단의 수준에서도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동물들이 최적 협력 전략을 선택할 때의 원칙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저자가 들고 오는 흥미로운 사례는 게임이론으로 설명하는 진화생물학입니다. 특히 이론적인 게임이론 시뮬레이션과는 달리, 생물학에서는 늘 신호 전달의 오류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고려하는 연구의 설계와 그로부터 발견한 특징들은 매우 흥미로워 보입니다. 게임이론에서는 팃포탯tit-for-tat 전략이 유리하지만, '늘 배반하는 전략'에는 결국 밀립니다. 그렇지만 실제 동물의 세계에서는 팃포탯 류의 협력이 관찰되므로,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비협조적인 전략이 우세한 전략으로 늘 간택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견 불리해 보이는 협력 혹은 팃포탯 전략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팃포탯을 취하는 개체가 2개 이상이 되어 동일 집단 내에서 일종의 성장 핵을 형성하면 가능해진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이는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물리학에서도 혼합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분리되어 두 상으로 나뉠 때, 최초의 씨앗 역할을 하는 것은 동질성이 있는 두세 개의 분자들의 작은 뭉침nucleation부터 시작하기 때문임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진화생물학의 맥락에서 이렇게 개체선택, 친족선택, 상호 이타주의가 발현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면, 상당히 많은 행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되는 것이 집단 선택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체의 유전형과 표현형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유전형은 어떤 행동 혹은 생물의 현상이 그에 대응하는 유전자 조성에서 생긴 변이 때문인지, 그 변이에 영향을 끼친 것은 어떤 요인들이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반면 표현형은 그 현상으로 인해 뇌구조나 뇌의 기능, 나아가 어떤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그것이 다시 번식의 유무로 이어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 중심 견해를 지지하는데,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생물체는 유전자가 스스로를 후대로 복제하는 수단일 뿐이고, 행동은 그 복제를 촉진하는 부수적 현상일 뿐이라는 견해입니다. 반면 표현형이 더 중요한 관점이라고 보는 견해는 번식 과정에서 실제로 개체가 선택되는 것은 표현형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케이크 레시피가 있어야 케이크를 만들 수 있지만, 정작 어떤 케이크가 맛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케이크 자체입니다. 레시피로는 아무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합한 것이 다수준선택이라는 개념입니다. 복제되는 것은 레시피이고, 선택되는 것은 맛이라는 입장이죠. 신집단선택은 이 다수준선택에 기반을 둡니다. 이는 A는 개체 측면에서 B보다 우세하더라도, 집단을 이루면 B가 A보다 더 우세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를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인 사람이 사회생물학의 대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윌슨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진화의 원칙이 인간의 행동 진화에는 아주 잘 맞는 것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신집단선택에 대한 직접적인 유전자 수준의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간결한 설명으로 집단선택을 설명하고자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그 이면에 그러한 선택을 결정하게 하는 유전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행동에 대한 설명과 유전자는 늘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집단선택은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또한 고생물학에 기반을 둔 단속적 진화론은 유전학에 기반을 둔 점진적 진화론에 의해 자주 비판받습니다. 그렇지만 진화에는 점진적, 단속적 변화가 모두 일어납니다. 사회생물학은 종종 정치적으로 왜곡되어 활용되는 문제로 인해 늘 많은 비판을 받습니다. 특히 사회생물학이 생물학을 이용하여 기성 상태를 정당화한다는 (즉, 진화적으로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은 그러한 것이 최적 혹은 최선이라는 뜻이므로, 현 사회가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은 진화적으로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 비판은 여전히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극한으로 대립하는 영역이라면 사회생물학이 서로를 향한 공격 수단으로 자주 활용되는 것을 보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심지어 사회생물학은 보수적인 사회다윈주의라고도 비판을 받는데, 이방인 혐오나 남성 독식 등도 타당한 이유에서 진화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을 암시한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물론 사회생물학은 이러한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있는 현상을 그대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의 당위성까지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1-10장의 전반부가 끝나고, 책은 후반부로 접어듭니다. 1-10장까지만 읽어도 충분히 복잡하고 동시에 흥미롭지만, 사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부터일 수도 있습니다. 전반부는 인간 행동을 이해함에 있어 여러 층위에서의 다양한 요소를 살펴보고 각 요소들의 연결을 해석하는 이론적 탐구에 초점을 맞췄다면, 후반부는 그러한 탐구의 요소들을 종합하여 인간 행동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반부를 생략한 채 후반부만 읽어도 주제 파악에는 큰 지장은 없겠지만, 그래도 후반부에서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전반부에서 왜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간 지적인 탐험과 씨름과 전쟁과 갈등을 계속 겪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자신이 속한 집단과 아닌 집단의 구분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다른 많은 동물들처럼, 인간은 종종 동조와 소속과 복종에의 욕구를 강렬하게 느낍니다. 즉, '우리'와 '그들'의 구분은 필수적이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앞서 집단선택이나 문화적 맥락을 살펴본 바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은 대부분 평화적이지는 않습니다. 대대적이고 압도적인 야만 행위부터 약한 공격까지, 집단을 구분하는 행위는 대개 세상에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편 가르기를 아예 없애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필요한 적대 행위를 줄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자가 강조하는 방법은 여러 개입니다. 우선 내 집단이든, 다른 집단이든, 집단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집단의 일부가 아닌, 개체로 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계의 차이를 줄이고, 모두에게 동등한 조건에서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는 작업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뒤따릅니다. 집단의 구분에 있어 범주화는 수단일 뿐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개인을 집단에 강하게 속하게 만드는 혹은 개체로 하여금 다른 개체를 개체가 아닌 집단의 일부라고 간주하게 만드는 편리한 장치가 됩니다. 특히 개인이 하나의 집단이 아닌 다른 범주에서 다른 종류의 집단에 속할 수 있음을 기억한다면, 사실 집단의 구분은 하나의 기준이 아닌 복합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임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기준에서는 다른 집단이지만, 어떤 기준에서는 같은 집단일 수도 있다는 뜻이죠. 같은 집단 내에서도 사실 인간의 행위는 복잡하게 나뉩니다. 이것을 지배하는 첫 번째 도구는 위계입니다. 물론 집단 내의 지위 차이는 인간만의 본연의 속성은 아닙니다. 지위 차이가 애매한 경우, 오히려 개체는 뇌의 편도체가 이끄는 대로 집단 내에서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집단 내의 지위 차이는 인간의 뇌에도 영향을 주고, 뇌는 다시 집단 내의 위계질서에 영향을 주는 공진화를 이룹니다. 미묘한 지위 고하 파악은 상당히 고 맥락의 정보 처리를 요구하기에, 뇌에서도 이마엽 겉질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간이 다른 사회적 동물과 구분되는 점이라면 그것은 다양한 범주에서 나뉠 수 있는 복수 개의 집단 내에서 자신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지위가 사회경제적 맥락에서의 서열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부와 가난의 구분이 시작되는데, 이는 인간 역사 전체에 있어 거대한 추동 요소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지위의 유지 혹은 경쟁, 간혹 이타적으로 공익 증진을 위해 협력을 하는 과정에서 발명된 정치 체제라는 것 역시 결국 집단 내 인간의 지위 인식에 대한 본연의 기능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 차이는 결국 집단의 공익을 추구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데,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각자의 인지적 부담 (즉, 즉각적 판단의 유무), 재평가와 인지 부조화 해소에 대한 태도의 차이, 새로움, 애매함, 불편 등에 대한 인식의 차이, 앞날에 대한 불안감의 차이 등이 있습니다. 즉, 정치적 갈등은 이러한 집단 내 혹은 집단 간 인식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이해를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이러한 차이가 개체의 뇌에 있는 편도체에서 발생한 불안의 경련, 기억의 수정, 감각 처리 영역들의 혼란에 의한 착각이나 환각 등이 유발될 정도로 개체의 집단 동조화에 의한 것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단에 속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도덕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도덕성이란 '적절한 행동 규범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서 그 규범을 문화적으로 공유하고 전수해야 한다는 믿음까지 포함한 개념'입니다. 여기서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도덕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은 주로 도덕적 추론의 결과인가 도덕적 직관의 결과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이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때, 그 기준을 생각과 감정 중 어느 것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직결됩니다. 이러한 질문은 저자가 계속 탐구해 온 질문들, 즉, 그러한 판단 기준에 보편성이 있는지 혹은 차이성이 있는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문화적 맥락 때문인지 아니면 생태적 요인 때문인지 등의 질문으로 꼬리를 물며 이어집니다. 도덕적 결정에서는 기본적으로 논리적 추론이 중요합니다. 추론은 주로 뇌의 등쪽가쪽이아앞엽 겉질에서 담당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추론은 칸트 같은 도덕 철학자들에게는 미안하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상주의자들은 도덕적 추론과 결정이 철저히 이성에 기반을 둔다고 이야기하겠지만, 판단의 순간에는 이성이 끼어들기도 전에 생리적 판단이 먼저 내려질 수도 있습니다. 이성은 오히려 사후에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즉, 암묵적이고, 직관적이고, 정서에 기반한 도덕적 결정이 주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직관주의). 직관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간과 시간을 과도하게 할인'합니다. 즉, '현재'의 '지금' 위치에서의 판단 과정에서 직관에 의해 내려지는 판단은 다른 장소나 맥락, 미래의 시점에 대한 판단을 과도하게 축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성적인 논리에 입각한 것이 아닌, 직관에 의한 판단이 사실 지독하게도 근시안적인 것임을 의미합니다. 당장 판단이 이뤄져야 하는 환경에서는 이러한 할인이 유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고의적, 능동적, 국지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상황이라도 우선적으로는 직관적 뇌 회로가 더 활성화됨을 의미합니다. 또한 도덕적 결정은 맥락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특히 맥락의 변화가 도덕 판단의 국지성을 바꾸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는 같은 상황에서라도 문화적 맥락에 따라 도덕적 결정이 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흥미로워집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도덕적 판단의 보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면 황금률, 자율성, 공동체, 신성의 도덕률), 그 보편성마저도 실제로는 각 문화권에서 다른 가중치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협력과 경쟁, 명예에 대한 모욕, 수치심 혹은 죄책감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이 차이를 분석합니다. 저자는 또한 집단 간의 갈등에서 도덕이란 결국 누구의 권리가 더 옳은가? 의 질문을 둘러싼 문화적 충돌로 귀결된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충돌은 문화상대주의적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닌 그들이 틀렸다고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때로는 최악의 행동을 하도록 몰아갈 수 있습니다. ‘나냐 우리냐’의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 본능적인 이기적 성향에 저항하려고 할 때, 우리의 신속한 직관은 대체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그들의 대립 상황에서는 직관을 멀리하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직관 대신 생각, 추론, 철저히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시각에서의 질문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질문은 상대의 입장에 대해서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도 적용해야 합니다. 즉,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역지사지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감정이입일까요? 즉,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하고, 심지어 덜어줄 수도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뇌에는 그러한 고도의 지적 작업을 할 수 있는 회로가 내장되어 있을까요?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인간은 물론 영장류나 포유류도 다른 개체가 고통스러워할 때 공명하는 상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감정이입은 적어도 포유류가 진화해 오면서 갖추게 된 기능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감정이입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상대를 위하는 행동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간극은 앞서 언급한 맥락의 국지성, 현시성과도 연결됩니다. 먼 나라의 어린이가 굶고 있는 사진을 보면 감정적으로 동정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성금을 내는 행위로까지 연결되는 빈도는 생각보다 낮습니다. 이는 애초에 우리가 이러한 동떨어진 상황에 대해서까지 행동으로 옮길 마음이 가장 적게 드는 방향으로 본성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주로 자신이 겪어 본 고통에 대해서만 감정을 이입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어쩌면 진화의 방향이 그렇게 이루어져 왔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감정이입이 잘 되고 공명이 쉽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끔찍한 현실로부터 회피하려는 행위로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동정적 행동은 타인의 고통을 절실히 고통스러워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 그저 오래전부터 몸에 익힌 나머지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의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감정이입과 동정적 행동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그 거리를 판단하는 것은 철저히 무의식적인 뇌의 작동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행동을 다양한 맥락에서, 특히 사회문화적, 그리고 생물학적 맥락에서 이해의 층위를 높이는 것은 우리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어떤 학문을 연구하는 까닭은 물론 그 학문 자체의 완성을 위한 순수한 목적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어쨌든 모든 학문은 결국 인간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기에, 다름 아닌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것의 사회적 이득 혹은 이점을 생각해야 한다면,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의 제도와 법체계, 혹은 시스템과의 연관성부터 생각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뇌과학, 나아가 신경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도가 높아지고, 뇌의 다양한 영역에서 작동하는 신경 세포의 메커니즘, 혹은 그 이면에 있는 호르몬과 유전자의 암호가 풀리면서 이제 인간에 대한 행동 이해는 그 행동의 기저에 깔린 동기가 단순히 심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와 공진화한 뇌의 특성에서도 비롯됨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범죄자의 범죄 행위를 그 행위의 경중 혹은 책임의 소재와 범죄 의도성의 성립 등만 놓고 판단하는 현재의 대부분의 형법 체계는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최근 점점 주목받고 있는 신경법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신경'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영역은 오늘도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경미학, 신경철학, 심지어는 신경경제학, 신경경영학, 신경건축학도 나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전가의 보도처럼 인간의 특성, 그중에서도 행동을 신경과학 관점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신경과학의 자신감은 기존의 학문 분야 전체에 걸쳐 마치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신경과학의 맥락에서 법리를 따져보자는 신경법학은 기존의 사법체계를 대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범죄자의 뇌 MRI 사진과 뇌 세포 샘플을 분석하고 그래서 그가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결정론적 메커니즘을 인정하여 죄의 무게를 경감해 줄 수 있는 정상참작을 할 수 있을까요? 혹은 아예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혹은 심지어 미리 무작위로 사람들에 대한 뇌 분석을 끝내어 잠재적인 범죄자를 가려내거나 건강 혹은 운전 보험 등의 보험료를 차등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행위들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저자의 의도를 생각한다면,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뇌에 대한 분석 결과만으로 그러한 판단을 일방적으로 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설사 MRI 영상이나 EEG 그래프가 꽤 정밀하게 얻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충분한 통계적 비교검증 (더하기 빼기 대체 등의 실험 설계 등)이 완료되지 않으면 단순한 뇌과학 실험 측정 데이터는 사실 판단에 필요한 참고 중 하나 정도만 될 뿐입니다. 특히 현대의 사법체계는 행동과 사고(의지)를 구분하는데, 만약 행동과 사고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연결된 구조로 보아야 하는 맥락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면, 범죄 여부를 판단하거나 범죄를 예방하거나 범인을 골라내기 위해 누군가의 머릿속을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다(혹은 보아야만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됩니다.
사실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인간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 사이에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그 간극에는 자유의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여러 과학교양서에서 이 자유의지의 실체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 결과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신경과학 관점에서는 자유의지의 실체는 결국 생물학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자유의지가 인간들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인간 고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믿는 기존의 철학, 심지어 종교적 믿음마저도 송두리째 뒤흔드는 주장입니다. 특히 많은 종교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신성 (즉, 인간은 신을 닮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자유의지에 대한 과학적 판단은 과학 그 이상으로 파급력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도 결국 이 지점에 천착하게 됩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자유의지를 받아들이는 관점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완벽한 자유의지를 발휘한다. 2)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없다. 3) 그 중간 어디쯤이다. 물론 첫 번째 입장은 과거의 유물이 된 지 오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즉, 생물학이 우리를 조금도 구속하지 않는다고 믿기에는, 우리가 가진 과학이 충분히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보기에 현대인은 대부분 세 번째 입장에 있는 것으로 관찰합니다. 그 한 종류로서 ‘경감된 자유의지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842년 이래 거의 한 세기 반 동안 지속되던 맥노튼 규칙McNaghten Rule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죄인의 정신이상을 근거로 범죄에 대해 정상참작을 할 수 있다는 항변 논리가 성립됨을 의미합니다. 즉, 확실한 정신병은 자유의지가 온전히 발휘되는 것을 막으므로 (즉, 자유의지가 경감되므로), 온전한 자유의지인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는 볼 수 없으니 그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가 꽤 오랜 시간 동안 서구의 사법체계에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저자는 이 '경감된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우리 뇌 속에는 생물학적 뇌와 별개로 자유의지를 조종하는 ‘작은 인간’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풍자적으로 비판합니다. 즉, 아무리 대부분의 인간 행동이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더라도, 일부의 기능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생물학과 자유의지가 공존할 수 있다는 입장이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어디까지가 생물학의 영역이고, 어디서부터가 자유의지의 영역이라는 것일까요? 이러한 구분은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일까요?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청소년기의 범죄자, 혹은 뇌의 일부가 사고로 망가진 범죄자, 혹은 선천적으로 유전적 질병으로 인해 뇌의 일부 기능이 차단된 범죄자는 뇌 손상 혹은 미성숙한 뇌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 능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 여야 하는 논리로 연결됩니다. 문제는 그 뇌 미성숙, 혹은 손상의 ‘정도’를 어떻게 나눌 것이냐는 것입니다. 아예 '있고 없고'의 문제라면 구분은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미성숙, 혹은 일부 상실 정도의 문제라면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해집니다. 저자는 이 ‘작은 인간’으로 대표되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사회적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도, 이 마저도 결정론적이고 유물론적인 뇌라는 사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청소년기의 이마옆 겉질 미성숙 문제도 이렇게 다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뇌과학 관점에서 이 미성숙한 겉질은 신중하고 느린 추론이 성인에 비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신중하고 느린 추론이 관여하지 못하는 행위의 책임 범위에 대해서는 순간적 충동 통제보다 더 신중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유의지와 인간의 행동의 연관을 논할 때 그 유명한 ‘리벳의 실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Libet, B., Gleason, C. A., Wright, E. W., & Peral, d. K., “Time of conscious intention to act in relation to onset of cerebral activity(readiness-potential): The unconscious initiation of a freely voluntary act,” Brain 106 (1983), pp.623-642.
1983년 미국의 신경외과의사인 벤저민 리벳이 계획하고 실행한 이 실험의 함의는 우리 뇌가 우리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리벳이 설계한 실험은 이렇습니다. 일단 실험자 뇌의 운동피질이 있는 두정엽에서 발생하는 뇌내 활동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전극(EEG)을 부착합니다. 이 전극으로 실험자가 특정 행동을 시작하려고 준비할 때 전압의 변화(준비전위readiness-potential)를 측정합니다. 실험자들은 아무 때나 자유롭게 손가락을 움직여 어떤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할 수 있는데, 리벳은 실험자들에게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면, 그때의 시간을 관찰해서 정확하게 기록해 달라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손가락을 움직이기 0.55초 전에 준비전위의 변화가 감지되었으나, 피실험자들이 보고한 것은 0.2초 전에 결정을 내렸다는 데이터였습니다. 이는 피실험자의 뇌가 실험자가 의식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겠다는 결정을 하기도 전에 (즉, 약 0.35초 앞서서) 이미 운동신경에 신호를 보내기 시작함을 의미하는 결과였습니다. 이는 우리의 의식, 혹은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 행위의 주체로서의 의지가 아니라, 뇌의 작용을 사후에 해석하는 장치일 뿐임을 의미하는 결과여서, 학계에 충격을 줌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함의를 조금 더 끌고 가면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망상에 가깝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2020년대인 현재에도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실험을 설계한 리벳 자신은 다른 관점을 가집니다. 리벳은
‘우리가 어떤 결정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기도 전에 뇌가 행동을 개시한다는 건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움직임을 선택했다는 생각은 틀린 셈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지연 시간 동안 그 행동을 거부하기로 의식적으로 선택할 잠재력이 있다.’
라고 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하지 않을 자유의지’는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경감된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행동의 생물학적 인과성과 자유의지를 둘 다 수용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논지를 발전시키려면 한계선의 위치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아 때 모종의 원인에 의한 뇌손상으로 소아성애자가 되지 않는 선택이 불가능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하더라도 (즉, 그가 의지와 상관없이 소아성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가 소아를 추행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즉, 그런 성향이 (충동이)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을 자유의지는 있다는 뜻입니다. 경감된 자유의지의 해석은 이렇게 생물학의 테두리를 어디로 정할 것인지가 중요한 의미 설정의 기제가 됩니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적성은 생물학에, 노력은 자유의지에', 혹은 '충동은 생물학에 충동에의 저항은 자유의지'에 할당한다는 이원론으로 귀결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원론으로 자유의지의 범위를 규정짓는 것은 정당한 방법일까요? 예를 들어 현재의 형법에 대해서라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실험 결과를 들고 와서 아래와 같은 주장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우리의 자유의지가 사실은, 정신분열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뇌활동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빚어진 결과라면 범죄자에게 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위의 물음에 대해 아마 대부분의 법학자는 거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특히 형법학자라면 리벳 등의 실험이 범죄와 연관되는 의식적 의지와 상관성이 없다고 거부할 것이며, 설사 있더라도 그 범위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규정할 것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스티브 모스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모스는 신경과학을 법정에 끌어들이는, 즉, 신경법학에 회의적인 학자입니다. 모스는 법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극히 실제적이고 평가적인 규칙과 제도의 체계,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의 행동을 여러 차원에서 안내하고 규제하는 데 있다고 특징짓습니다. 따라서 그는 신경과학의 발전된 데이터가 과대표 되어 부당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에게 있어 신경과학이 법학으로 파고드는 최근의 경향은, 과거 심리학적 결정론이나 유전학적 결정론이 그랬던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신경과학이 이들보다 더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더 자세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나 압도적인 규모의 데이터로 더 많은 가중치를 받는 것이 위험할 정도입니다. 저자는 신경과학의 연구 성과가 확실한 인과성 판단 없이 상관성만으로 인과성을 주장하는 것도 경계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모스의 신경법학 비판에 약간은 회의적인 것 같습니다. 모스는
“원인은 그 자체로는 감경 사유가 되지 않고, 감경 조건에 해당하는 강제와 같지도 않다.”
라고 주장하는데, 저자는 인과적 우주 바깥의 작은 인간 (즉, 강제에 압도되지만 원인은 다룰 수 있는 자유의지의 영역)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원인과 강제를 구분하기 어렵다고 비판합니다. 그렇지만 모스의 주장이나 저자의 반박이나 공통적인 난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요인을 정확히 특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유의지의 영역에 넘어와서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예측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통계 분석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개개인의 행동 예측은 전혀 다른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뇌의 혈관벽이 선천적으로 약한 사람이 특정 연령대가 되었을 때 뇌동맥류를 겪을 가능성을 비교적 정확하게 계산(예측)할 수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마엽 겉질에 광범위한 손상을 입은 사람이 아동 학대를 하게 될 가능성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전자는 필연적인 혹은 직선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에 반해, 후자는 직선적이지 않은 고맥락적 과정을 거쳐 행동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인과성을 발견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저자는 후자가 바로 다인자성multifunctional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핵심적인 특성임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다인자성에서 독립적인 인자들을 더 많이 고려하면 할수록 조금 더 직선적인 (혹은 필연적인) 수준에 이르는 행동 혹은 특성 예측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다인자성에 포함되는 다양한 인자들이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두 인자가 실제로는 독립적이지 않다면 이는 오히려 행동이나 특성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을 예측할 때, 가정환경의 맥락을 측정할 수 있는 인자에 의해 예측 정확도가 20% 올라가는 것과, 그 사람이 다닌 중학교의 학폭 경험에 의한 요인에 의해 예측 정확도가 15% 올라간다고 했을 때, 실제로 두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고 해도 예측도가 반드시 35%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정환경의 요인이 중학교에서의 학폭 경험에 어떠한 영향을 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경감된 자유의지'라는 개념도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과거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의 근거가 된 논거를 바라보는 것 같은 낡은 개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담당하는 작은 인간의 존재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더라도, 그가 담당하는 영역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방증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모르는 영역이 점점 좁아질 것이고, 그래서 자유의지라는 개념에 맡겨 왔던 인간 행동을 향한 다리가 나중에는 필요 없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주장이 지금 당장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이 정리될 수 있다는 뜻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당분간은 (아마도 꽤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사회에는 좋은 싫든 이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만 메울 수 있는 틈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시행착오를 우리는 사회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제안합니다. 자유의지가 틈을 메꾸는 이 시대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향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입니다. 첫 번째는 그냥 자유의지를 기각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입장이 범죄자들의 생물학적 요인만 고려하여 그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결정론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갱생과 통제의 방법이 보강되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처벌에 따르는 도파민의 분비, 즉, 쾌락으로 이어지는 처벌이라는 행위에 내재된 본능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처벌이 미덕이라는 생각(혹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도파민의 회로에서 비롯된 작용)을 의식적으로 기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뇌전증을 가진 사람이 운전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마치 뇌전증 환자에 대한 처벌로 간주하여 그로부터 대중이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경로가 생긴다면, 그것을 차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이를
‘처벌은 당연하고 도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져야 한다’
는 논지로 재차 강조합니다. 물론 이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현재의 사법체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중범죄자를 감옥에 가두고 노동교화형이나 독방형에 처한다는 처벌을 대중에게는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대중과 격리하여 먼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게 만드는 것으로 갈음하는 위장을 지속하는 것은 사실상 현재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탁월한 비유를 하나 꺼내듭니다. 예를 들어 차에 이상이 생겨서 정비사에게 그 차를 맡긴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정비사는 주의 깊게 차를 검사했고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 정비사는 내가 아는 지식과 기술로는 이 차의 이상을 발견할 수 없는데, 차주인은 차가 이상하다고 하니, 이 차는 악령이 깃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훈련받은 정비사라면 차의 매뉴얼을 다시 살피고, 설계도 자체를 들여다볼 수도 있고, 특정 시기에 제조된 특정 브랜드의 특정 모델이 리콜되었다는 몇 년 전의 뉴스를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정비사가 아니라 여기에 자동차 공학자, 심지어 물리학자가 팀을 이룬다면, 이 자동차에 작용하는 모종의 전자기장의 영향을 밝혀낼지도 모르고, 연료를 이루는 분자들의 화학적 조성의 변화에 주목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는 것의 범위를 넘어간다고 해서,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지금까지 그 아는 것의 영역을 넓혀 온 방식과 전략에 따라 미지의 영역을 미지로 인정하되, 그 영역으로 더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이 비유를 통해 계속 강조합니다. 저자는 과학자로서 과학의 진보에 대해 강력한 믿음이 있으며, 이 때문에 현재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들이 결코 계속 모르는 상태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 모르는 것에 대해 쉽게 도덕적 혹은 윤리적, 심지어 신성의 유무를 함부로 태깅하는 행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자의 주장은 현대의 법정에서는 다소 몽상가의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엄연히 범죄자가 존재하고 피해자가 존재하며, 그 피해자는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도 잃어버렸을 수도 있는데, 과학을 들먹이며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는 당분간 판단을 유보하자고 하는 주장은 세상물정 모르는 속 편한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주장은 그렇게 단순하게 속 편한 주장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해 인간을 고장 난 자동차처럼 비유하는 것은 실로 과도하게 기계론적이고 유물론적인 관점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차라리 이렇게라도 바라보는 것이 쉽게 미지의 대상을 악마화하고 죄인으로 낙인찍는 것보다는 낫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견은 갈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지금까지 진보해 온 방식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중세 이후 과학의 진보는 주로 자연에 대한 관찰이 수학적으로 추상화되고 그것을 다시 자연을 이해하는 물리적 이론과 모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론과 실험이 서로 공진화하면서 발전을 거듭해 온 방식에 의거합니다. 즉, 측정 가능한 자연과 그것을 수학적 모형으로 추상화하고, 다시 물리적 개념을 규격화하여 덧입힌 이론이 잘 발달되어 차곡차곡 구축되어 온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로 인해 화학은 물론, 현대 생물학도 분자 수준에서, 심지어는 원자와 전자 수준에서 아주 정밀하게 재정의될 수 있었고, 이는 유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했으며, 나아가 통계 모형은 진화 이론의 고도화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학적 진보 방식이 인류가 제대로 들여다본 지 100년 남짓된 우리의 뇌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합니다. 여전히 인간의 뇌는 너무나 복잡하고 우리가 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선충의 신경계를 모두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 뇌의 커넥톰을 모두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뇌의 모든 기능을 다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마치 아주 해상도가 높은 위성을 이용하여 지구 표면의 모든 지형을 1 m 단위로 다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그 지하에 있는 구조물이나 그 지역의 식생을 모두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러한 지도는 우리 뇌에서 우리가 몰랐던 부분을 더 많이 알려줄 것이고, 아마도 작은 인간이 설 자리를 더 좁게 만들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물리학이 그렇게 발전을 거듭했어도 여전히 우리가 우주에 대해 모르는 것이 95% 혹은 그 이상인 것처럼, 생물학 혹은 신경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끝까지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저자도 이 영역이 조만간 모두 다 정복된다고 확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고, 그 영역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장에는 현재의 문제를 미래의 세대로 넘기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현재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미래 세대에 맡기겠다는 것은 마치 현재 치유할 수 없는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환자를 냉동인간으로 만들고 수 세기 후에 깨워서 미래의 의사들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자는 주장과 비슷합니다. 물론 정말 수 세기 후의 스마트한 의사들이 그 환자를 냉동 상태에서 무사히 잘 깨워서 깨끗하게 병을 치료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환자가 냉동 상태에서 무사히 깨어난다는 보장도 없고, 깨어난다고 해도 치료가 가능한 수준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자의 핵심 주장에는 상당수 동의할 수 있을지라도, 저자의 과학의 선형 발전에 대한 의존은, 현재의 문제를 과소평가하고, 그 문제의 당사자들이 겪는 피해를 지나치게 할인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에게 피해를 입힌 뇌질환 범죄자가, 그 뇌질환이라는 사유를 생물학적 정상참작으로 인정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를 함부로 죄인으로 낙인찍으면 안 되고, 그는 감옥이 아닌, 정신병원에서 안락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피고인 측의 신경과학자가 과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근거로 주장한다면, 원고 측에서는 당연히 이에 반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피해자들에게는 이는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 대한 유혹을 스스로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어, 결국 술을 마시고 생존이 걸려 있는 운송 수단을 몰다가 사고를 냈으니, 정상참작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실 이 문제는 저자가 계속 염려한 대로, 현실적으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지도 모릅니다. 과학자들이 할 일은 아마도 이러한 평행선처럼 보이는 현실적 문제와 과학적 진보 사이의 틈을 어떻게든 다양한 아이디어와 실험으로 메꾸는 것일 테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틈이 메꿔지는 속도나, 그 방향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신경과학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고, 특히 사회적 맥락에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규정하는 것은 현재는 물론, 미래 세대와의 합의가 필요한 일이며, 따라서 절대 쉬운 작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이 때문에 저자의 시각을 공격하는 학자들도 여전히 학계에 많이 있으며, 저자의 주장은 미국의 법학계에서도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유의지의 문제는 범죄 같은 최악의 행동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정확히 똑같은 논리로 최선의 행동에 대해서도 논란을 만들어 냅니다. 저자의 논지는 그래서 최악의 행동과 최선의 행동을 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신경과학과 사회적 맥락, 그리고 자유의지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성이 작동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얼버무립니다.
책의 말미는 조금 더 논란적인 방향으로 흐릅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인 ‘전쟁과 평화’에서, 앞서 알아본 다양한 맥락을 종합해서 볼 때,
“우리의 상황은 나아지고 있고 (즉 최악의 행동은 줄어들고 있으며, 최선의 행동은 늘어나는 중이라는 의미), 앞으로 더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며, 그를 통해 가장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근거를 확보하는 것”
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대상은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입니다. 그의 유명한 그리고 매우 논쟁적인 저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가 분석의 대상이 됩니다. 이 책에서 핑커가 펼치는 주장은 과거 사람들은 끔찍할 정도로 야만적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덜 끔찍해졌음 (즉, 계몽주의의 확대)으로 요약됩니다. 핑커가 이렇게 주장하는 주요 논거는 이른바 '이성의 에스컬레이터'라는 개념입니다. 감정이입 대상, 즉, 우리 편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되었고, 평균 IQ도 높아져서 평화의 장기적 지속이 주는 이득을 논리적으로 인지하게 된 것이 그러한 이성의 확장 효과를 이루는 요인입니다. 핑커가 이성을 주로 강조하는데 반해, 이 책의 저자는 이성만이 주인공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 책 전체에서 내내 강조되듯, 맥락을 고려한 상호작용, 즉, 이성과 감정의 상호작용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특히 핑커가 강조한 핵심 논거, 즉, 지난 천 년 동안 인간은 점점 평화로워졌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저자는 핑커가 정규화를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반박합니다. 인구 전체 규모에 대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수 비율을 따지는 것과 더불어, 전쟁의 지속기간까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죠. 이는 일견 타당한 지적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지적을 따르자면, 20세기에 인류가 목격한 최대의 비극인 2차 세계 대전은 지난 1천 년뿐만 아니라, 아마 인류 역사 전체에서도 가장 최악의 전쟁으로 뽑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대전이 불행하고 또한 불안한 이유는, 비교적 짧은 지속 시간 (대략 4년)에 걸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는 특정 지역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전 세계로 번졌다는 것, 그리고 가공할만한 무기들의 등장으로 대량 학살이 너무나 쉬워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보다 훨씬 기술이 발달하고, 즉, 더 무기가 강력해지고 더 정확해진 21세기인 지금, 그런 대전이 또 일어난다면 이 전쟁은 불과 몇 주 만에 10억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그야말로 인류 멸망급의 대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 강력하고 더 집중적이고 더 비극적인 사태가 생길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핑커는 인류가 2차 대전 이후 이룩한 수십 년 간의 평화의 시대가 인류 역사의 진보를 의미하고, 이는 우리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하지만, 저자의 지적처럼 이는 서구 중심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특히 90년대 이후 하나로 통합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의 무역은 언제까지나 자유무역기조로 남아 있었을 것 같았지만, 최근 들어 미-중 간의 무역 전쟁, 기술 전쟁에서 볼 수 있듯, 그리고 그것이 촉발한 여러 강대국들의 경쟁적인 산업정책과 보호무역 기조로의 전환에서 볼 수 있듯, 평화로운 자유무역, 글로벌화된 경제 시스템이란, 사실 최근 수십 년 동안에만 발현된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다시 이러한 경제 전쟁, 기술 전쟁이 격화되면 그 결말은 인류가 지난 몇 천 년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보아 왔듯, 결국 강대한 세력 간의 물리적 다툼, 즉, 전쟁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과 소련 사이의 반세기에 걸친 냉전 시대 동안 3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핵전쟁이 발발하지 않은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는 정말 천운 중에 천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핵무기의 의도치 않은 투발이나, 오발, 실종 등의 위급 사태를 의미하는 브로큰애로우broken arrow 사건은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수십 번이나 발생해 왔으며, 각 사건은 언제든 핵전쟁으로 일촉즉발 상태가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인류는 정말 운이 좋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인류가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회피할 수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운에 운이 계쏙 겹쳐서 일어난 지극히 로또스러운 사건일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의 겹침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 것입니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인간은 합리적 최적화 기계가 아닙니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기 전에 자신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경도되지 말고, 자신이 배가 고픈 상태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다양한 전쟁사 속의 기이한 평화의 순간을 언급하며, 우리가 현재 우리가 아닌 다른 집단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현재의 증오가 있다면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야 함을 권언합니다. 신경과학적 오류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의 현명하지 못한 결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역사 속에는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한 사례와 인물이 수도 없이 많음을 저자는 계속 강조합니다. 그러한 사례를 기억하고, 그것에 기대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이 책의 주요 논제와 발견을 요약하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다인자성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인간 행동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틈이 남아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여러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당연해 보였던 것을 문제라고 새롭게 인식하고, 가망 없어 보이던 문제를 해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저자가 펼치는 낙관주의가 정말 그러한 방향으로 인류가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저자도 그저 유인원의 생물학이나 신경과학에 대해 일부만 알고 있는 좁은 분야의 전문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30년 넘게 아프리카에서 개코원숭이 같은 영장류와 현장을 공유하며 관찰한 수많은 연구 결과들, 다른 학자들의 기념비적인 연구 결과를 재해석하는 지적 성실함,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배격할 것은 배격하는 학문적 회의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되,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인간이 나아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기여하려는 태도는 우리가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며 다시금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는 과학자의 본성이자, 그가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합니다.
이 책에는 중요한 과학적 사실에 대한 업데이트와 함께, 상당히 논쟁적인 저자의 해석 혹은 관점도 있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 같은 사실을 정면에서 배격하는 것도 있고, 여전히 서구의 문화나 가치관에 경도된 편견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두꺼운 벽돌책은 누구에게나 일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사회에서 누군가와 어울려 살아야 하며 끊임없이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할 수도 있고, 누구나 내일일은 절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동은 물론, 우리 집단 내의 행동, 다른 집단(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행동 이면에 있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되, 나머지 영역을 자유의지에 쉽게 맡겨버리는 지적 게으름은 피해야 하는 것, 그리고 다양한 맥락에서 우리 사회는 물론,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효용은 상당합니다.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벌이는 연구의 분투 과정을 속속들이 확인하는 것은 덤이며, 다양한 분야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수많은 흥미로운 사례와의 만남은 지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부록에 성실하게 실려 있는 전문적인 신경과학이나 생물학 내용들에 대한 개론도 차분하게 같이 읽을 가치가 있으며, 학자로서 성실하게 정리한 참고문헌이나 각주 등도 한 번씩 같이 확인하며 읽어간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본성에 선한 천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과학에 기반한 지적 모험을 계속 시행하고, 누군가가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보석 같은 발견을 동료들에게 기꺼이 공유하며,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견지할 수 있다면 후세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를 보며 힐난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감사하고 우리의 지적 모험을 위한, 그리고 행동 개선과 제어를 위한 용기에 더 찬사를 보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