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전달한다는 것은 지식 그 너머의 방법론을 전달한다는 것
최근부터 애매한 문제의 소지가 커지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다. 당연히 기본적으로 과학이든 어떤 분야든, 그것을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은 사람들 중, 그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중간다리 역할은 늘 필요하고, 실제로 사회에서도 그러한 수요가 시장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경우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영국의 크리스마스 강연 같은 행사로까지 올라갈 것이고, 그 이후에도 근대과학의 전통이 일찍 정착된 서구권에서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문적 연구뿐만 아니라, 톤 다운된 내용으로 책은 물론, TV 다큐멘터리든, 영화에서 짤막하게 출연하는 과학자 역할이든, 다양한 형식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근대 과학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늦게 정착된 우리나라에서는 과학 커뮤니케이션도 상대적으로 늦게 정착되었다. 한 세대 전에는 주로 이러한 역할을 현업 과학자들, 그중에서도 약간 연구 현장에서 조금 힘이 빠진 중년 이후의 과학자들이 교양 과학서나 대중 강연 (사실 대부분 중고등 학생들 대상) 형태로 담당을 했었다. 사실 내가 중고등학교 학생이던 시절만 해도 서점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대중 과학 교양서의 저자들은 외국 학자들이었고, 한국 학자들이 저술한 K-교양과학서는 찾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양적인 경제 성장뿐만 아니라, 기초와 응용과학 면에서 질적, 양적으로도 인력 팽창이 이루어진 덕에 이제는 서점가에서 한국 학자들이나 커뮤니케이터들이 지은 교양서, 혹은 조금 더 어려운 전문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튜브 등장 이후에는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유튜버들이 담당을 해 오고 있다. 유튜브 시대에서 아마도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라면 그 콘텐츠의 전문성이 있는 현업 학자가 대중의 눈높이에 알맞은 언어로 좋은 시각화 자료와 풍부한 사례를 곁들여 친절하게 설명하고 그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이 현업 과학자, 공학자들만의 전유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의 소양을 갖춘 generalist들이 더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더 대중의 눈높이에서 해당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아마 반도체 공학자들,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최신 소식을 빠르게, 그리고 나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사람들은 증권가의 반도체 담당 애널리스트라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그렇지만 사실 웬만한 과학적 내용들은 이미 몇 번씩 소비되고 다루어진 것들이라, 결국 어느 시점에는 커뮤니케이션 방법과 스킬에 능한 사람들은 전문성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사실 현업 과학자나 공학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좁은 연구 분야를 넘어가면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다. 같은 전공이라고 하더라도 요즘처럼 파편화된 영역이 범람하는 시대에는 현업 학자들도 커버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실 이 때문에 많은 과학자들이 본의 아니게 유튜브 등에서 자신의 분야를 넘는 문제를 아는 척하다가 밑천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것은 사실 나라고 해서 예외도 아니고, 누구나 학문을 배운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사실 과학 커뮤니케이션, 특히 최신의 과학을 다루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주의 깊게 전달해야 하는 것은 그 최신 과학의 연구 성과가 얼마나 화려하고 대단한지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학자들의 분투, 그리고 그렇게 분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나 그 문제의 특성, 궁극적으로는 그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잘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단순히 지식으로서만 과학의 최전선을 전달하는 것은 지극히 휘발성이 강하고 과학의 연구 방법론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년 전에 본 어느 과학 유튜브 채널의 5분짜리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천체 물리학 관련 어떤 사실을 접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그 기억은 채 한 달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튜브 특성상, 그리고 채널의 수익성을 위해서라도 대개 전체 사실과 큰 관련이 없는 매우 지엽적이고 혹은 심지어 자극적인 제목을 화려하게 붙이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것들은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예를 들어 그 천체물리학에서 'A학자, B저널에서 블랙홀의 증발 가능성에 대한 시뮬레이션 연구 보고!'라고 제목을 붙이지는 않을 것이고, '블랙홀도 결국 증발한다!'라고 아마 제목이 붙을 것이다. 아마 그 A학자가 B저널에 출판한 논문의 주요 assumption이나 한계, 시뮬레이션의 조건이나 그 결과의 위험성 등에 대한 내용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대중의 흥미를 끌만한 부분만 압축 요약되어 5분 이내의 쇼츠로 그럴듯한 그림과 장엄한 음악과 함께 유튜버의 추임새를 집어넣은 영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생성형 AI가 너무 흔해져서 이런 영상이나 논문 요약의 방향, 음악 등도 그냥 5분 내로 대부분 해결되니 너도나도 유튜버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를 자처할 수 있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현실이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채널이 다 구독자 수만, 수십만 단위로 흥하는 채널이 되는 것도 아니다. 채널을 흥하게 만드는 것은 과학보다도 비즈니스 감각은 물론, 영상의 퀄리티를 강화할 수 있는 전문적인 팀이 붙어야 해결될 문제이므로 단순히 5분짜리 블랙홀 쇼츠를 만든다고 사람들이 다 클릭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쉽게 소비되는 콘텐츠로서 과학이 소비되는 것이 가속화되면, 과학의 진짜 가치를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기회는 더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과학의 진짜 가치는 지식의 최전선, 문명의 최전선 같은 화려한 수식어 속에 있지 않다. 그러한 지식을 창출하는 사고방식, 즉, 끊임없는 의심과 실패를 거듭하는 실험과 가정과 전혀 맞지 않는 데이터와 죽자 사자 싸우는 동료 과학자의 비판과 그를 이겨내는 디펜스, 재현이 안 되면 초개와 같이 버려버리는 냉철함, 악전고투하며 오랜 프로젝트의 성과를 결국 얻어내는 성취감, 비록 보잘것없지만 아주 작은 벽돌이라도 단단하게 만들어 인류의 정신이라는 거대한 탑의 일부라도 보탬이 되었다는 공명심 등에 진짜 과학의 가치가 있다. 물론 과학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가치를 다 체감 혹은 공감시키는 것이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커뮤니케이션의 한 귀퉁이에는 이러한 가치에 대한 존중과 리마인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이왕이면 이렇게 더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사실 positive 한 면을 권면하기 전에, negative 한 면을 방지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한다. 과학은 여전히 인간이 하는 행위나 사고 중에서는 가장 믿을만하고 문명의 최전선에 있다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대개 첨단, 진보, 혁신 같은 좋은 이미지와 오버랩이 된다. 그러다 보니, 과학은 지식이나 사고 체계가 아닌, 수식어로 더 많이 쓰이게 되는데, 예를 들어 'XX는 과학이다' 류의 카피 등이 그럴 것이다. 대중은 상당히 똑똑하므로 그러한 카피 속에 쓰인 '과학'이라는 표현이 정말 정상 과학, 제도권 과학의 치열한 고민과 사고 체계를 함의하고 있는 표현이라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표현이 지속되면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특히 아직 전두엽 피질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초중고생들에게 이러한 수식어는 잘못된 의미 전달의 기제가 될 수 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 특히 그 분야에서 일정 기간 훈련받았고 학위도 있고, 심지어 관련 분야 현업에 종사한다는 사람들이 책으로든, 강연으로든, 유튜브로든, 과학의 어떤 사실을 이야기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과학'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강력함을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수식어가 들어가면 안 되는 대상들이다. 유사 혹은 사이비과학은 물론, 제도권에서 아직 충분한 논의가 되지 않은 초창기의 연구들까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과거 혈액형 성격설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MBTI에 이르기까지, 원래의 목적을 넘어, 아예 사람을 범주화하고 쉽게 내편-네 편으로 가르는 용도로 이러한 단편적인 기준들이 과학의 수식어를 등에 업은 후, 대중 속에서 쉽사리 생명력이 꺼지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과학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모종의 강력함이 있다면, 재차 강조컨대 그것은 최신 지식이라는 이미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고민과 수많은 좌절과 처절한 싸움과 거듭된 실패 속에 겨우겨우 실마리를 하나씩 잡아서 조금씩 연결해 온 사고체계의 오랜 전통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한 핵심적 가치가 쉽게 휘발성 있는, 그것도 왜곡이 중첩된 내용으로 앞뒤 구분 없이 마구잡이로 활용되는 것은 대중에게도 안 좋지만, 과학에게는 더 안 좋다. 진짜 고민해서 하는 과학과, 쉽게 오독하여 소비되는 과학의 구분이 점점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일반 대중들 속에는 사회의 주요 의사 결정자들도 포함된다. 이공계 배경에서 훈련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분야를 넘어가면 그냥 일반인이다. 따라서 자신이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이나 지식이 쉽게 유튜브 등의 채널을 통해 얻어지고, 그것이 하필 마침 자신이 다루는 주요 정책이나 중요한 의사 결정 단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별로 없을까? 아마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지난 몇십 년 동안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의사 결정자들이 내린 결정은 우리 사회는 물론, 후손들에게까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에 대한 치열한 과학적 고민은 심지어 19세기 후반으로까지도 올라가고, 실제로 본격적으로 과학을 넘어 사회적, 전지구적 문제로 이슈화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60년대부터 있어 왔지만, 1980년대까지 그러한 고민은 기업에서든 정치권에서든 마이너 한 연구로 치부되었고,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겨우겨우 반박할 수 없는 데이터가 누적되고 국제기구가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이 연구는 과학의 영역에서 자리 잡았을뿐더러,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는데, 사실 이는 만시지탄일 뿐일 수도 있다. 1960년대부터 이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과학적 근거가 확립되고, 그것이 의사 결정자들, 기업 관계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온실가스 배출 규모를 일찍부터 통제하기 시작했다면 인류는 지구기후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훨씬 앞당겨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도 2020년대가 된 이 시점에서마저도 여전히 지구기후위기 부정론자들의 목소리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나오고 있고, 이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움직임도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 내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서울리뷰오브북스(SRB)에 마이클 셔머의 저서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에 대한 서평을 썼다. 이 책은 이미 잘 알려진 책이지만, 지금 다시 읽어도 여러 교훈과 시사점을 주기 때문에 어찌 보면 적절한 시기에 리마인드가 되는 서평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 책에서 내가 중심 테마로 잡은 것은 '사람들이 이상한 것을 믿는 까닭은 사람은 패턴을 완성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누구나 점이 몇 개 있으면 그것으로 자신에게 친숙한 무엇인가를 상상하거나 떠올린다. 그러한 점이 더 뚜렷하고 촘촘하면 더더욱 쉽게 패턴을 완성할 수 있다. 실제로는 다른 것을 묘사하는 점들이라도, 한 번 마음속에 완성된 패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패턴을 누군가 부정하려고 하면 화도 나고 그 누군가에 대해 반발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심시어 그 누군가가 그 패턴은 원래의 정답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패턴을 그리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큰일 난다고 하면 더더욱 분노 가득한 반응을 이끌어낼 것이다. 쉽게 휘발되는 과학적 지식의 단편, 그것도 제대로 학계에서 소화되지도 못 한 날 것 그대로, 혹은 검증되지 않는 불확실한 상태 그대로의 데이터들은 아주 살짝만 겉에 시즈닝을 뿌리면 보기 좋은 점들이 된다. 그것을 커뮤니케이터들이 흥미를 끌기 위한 방편으로 미리 정해진 순서대로 대중에게 뿌리면 그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잘못된 패턴을 그리게 만드는 기제가 된다. 대부분의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은 당연히 그러한 악독한 의도를 가진 채 채널을 운영하지 않는다. 다만 슬프게도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점들을 뿌리고 있는 셈이다. 그 점들로 대중이 패턴을 잘못 그리고, 그것을 '과학'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쉽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자신이 패턴을 직접 그리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대리로 만들어준 유튜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악순환은 매우 강력하여 한 번 그 사이클이 형성되면 사실 그것을 멈추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시작부터 이러한 점들을 뿌리는 것은 주의를 많이 기울여야 한다. 만약 잘못 뿌렸으면 잘못 뿌렸다고 시인해야 하고, 수정해야 한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곳곳에 주의 문구를 삽입하고, 이것은 아직 학계에서 검증된 것이 아니라는 disclaimer를 달아야 한다. 센세이셔널한 주장이나 사실은 반드시 다른 제삼자의 관련 전문가의 코멘트를 받아서 대중으로 하여금 다각도에서 해당 사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하고, 최종 판단은 커뮤니케이터가 내리는 우를 범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퍼블리쉬된 페이퍼의 데이터를 재가공할 경우, 숫자와 단위, 시각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특히 그래프는 scale과 maximum, minimum, normalization에 신경 써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시각으로 받아들이기에, 그중에서도 가장 잘 들어오는 칼라풀한 그래프나 그림들은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과학 콘텐츠도 점점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 대중에게 인기를 얻다 보니, 하루에도 수천 편씩 나오는 논문들도 체리피킹하여 그럴듯한 스토리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물론, 과학 커뮤니케이터들도 한 가지 원칙을 다시금 생각하면 좋겠다. Extraordinary 한 주장은 Extraordinary 한 증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도 묵묵하게 현장에서 연구하는 학자들만큼이나 선한 의도로 열심히 좋은 콘텐츠 만들고 대중의 과학과를 위해 노력하시는 커뮤니케이터들을 응원한다. 그들의 저술과 번역과 강연, 그리고 유튜브와 각종 방송 출연도 응원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일단 대중들, 특히 학생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전달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기여다. 그렇지만 그 즐거움이 왜곡되지 않도록, 다소 피곤하더라도 계속 같이 노력했으면 좋겠다. 나도 기회가 될 때마다 기여를 하려고 하지만, 더 전문성 있는 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더 많이 동참해주었으면 한다. 자신의 분야라면 논평이나 코멘트, 해설 등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고, 자신의 분야가 아니더라도 다른 분야에 대해 끼치는 영향 정도는 해설할 수 있다. 좋은 결과이지만 그것의 한계를 명시하되, 그것부터 다시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진보해 온 가장 강력한 문명 성장 엔진이 앞으로도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