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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Aug 25. 2024

자립할 수 있는 언론을 향하여

민주주의 사회의 한 축은 자주 언론이 되어야 한다.

반도체 관련 책을 2권 출판한 후, 지난 2년 정도 국내외 여러 곳에서 강연 요청을 받아 꽤 많은 강의를 하고 다녔다. 물론 요청 들어오는 강연 제의를 다 수락한 것은 아니고, 주로 공기관, 대학, 연구소, 언론사의 포럼, 반도체 회사의 사내 교육 등에 국한 지어 강연을 하고 다녔다. 다만 투자 목적으로 자신의 상품을 해설해 달라고 하거나, 개인 유튜브 채널에 나와서 조회수 올려 달라는 요청은 거절했다. 특히 투자 목적으로 특정 상품을 설계하는데 이름을 빌려달라는 요청은 모두 거절했다. 강연비나 출연비는 제법 많이 주는 조건이었지만, 요청한 기관이 정체성이 확실한 기관이 아니거나, 누가 봐도 영리적 목적이 너무 강한 곳이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는 거절했다.


그런 와중에 강연 요청이 들어온 조직들 중, 기자 스터디 모임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런 요청은 다 수락했고, 내가 기억나는 것만 지금까지 4-5회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이런 모임은 대개 서울에서 개최한다. 더구나 이런 모임은 늘 기자들 퇴근 후인 저녁에 하기 때문에, 이 모임에 가기 위해서는 수원 학교 캠퍼스에서 5시 40분 퇴근 버스를 탄 후 저녁 6시 전후로 사당에 내려서 지하철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해야 한다. 강의 장소에서 3시간 정도 강의와 토론이 끝나면 대개 11시 전후가 되므로, 허겁지겁 거의 막차 놓칠까 서둘러 다시 수원으로 이동하여 학교에 자정 넘어 도착하면,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가지고 퇴근하는 고된 일정을 감내해야 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강연비를 많이 준다고 해도 이런 고된 그리고 시간 소모가 심한 일정은 수락하지 않는다. 오고 가는 시간과 강연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되는 데다가, 끝나면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게 되고, 그 체력 소모 여파는 그다음 날까지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드시 수락하는 강연 조직이 있다면 공기관과 학교 다음으로 기자 스터디 모임을 포함시킨다. 그 이유는 기자들이 전문적인 내용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용하고 정확하고 알맹이 있는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전달한 내용이 모두 기사화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해설한 내용이 100% 제대로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기자 스터디에서 내게 지급하는 강연료는 XX 문화재단에서 지원받는데, 대개 30만원 정도이고 세금 떼고 나면, 사실 교통비와 시간 생각하면 많은 돈도 아니다. 기사화 여부도 불확실하고 보상도 적으며, 오고 가는 체력 소모가 상당하고, 딱히 내 개인의 영달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이러한 활동을 1년에 2-3회 정도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는 이유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기자 스터디에 참여한 여러 명의 기자들이 보다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면 그에 기여하고 싶어서다. 딱히 공명심이나 전문가로서의 잰 체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다. 후자의 목적이 있었다면 편하게 전화 인터뷰로 속사포 같은 문장을 몇 개 읊조렸을 것이다. 굳이 명분을 찾자면 한국 신문사의 기자들이 저널리즘을 구현하는데 1 nm 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만드는 과정에 기여하고 싶어서라고 포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미디어, 특히 신문은 불운하게도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는 언론 매체였다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눈치를, 개발 독재 시대에는 정권과 재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나라가 어느 정도 민주화되고 부를 쌓은 이후에는 오히려 인터넷과 모바일의 등장으로 급격하게 구시대 유물로 취급당하며 세대교체가 되는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애초에 신문의 구독자 숫자 역시 한국어 사용 인구, 그중에서도 글 좀 읽는 성인 인구 정도가 대상이었으니, 개발 독재 시대에는 2천만, 최근에 들어서도 기껏 해 봐야 3천만 정도였을텐데, 그 작은 구독자 시장마저도 이제는 대부분 모바일과 포털에게 주도권을 내준 상태다. 다시 말해 한국의 신문은 태생부터 성장 가능성에 명확한 한계가 있는 그리고 규모가 작은 구독자 시장을 놓고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따라서 신문사의 수익은 구독 수익이 아닌 절대다수가 광고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로 수렴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었을 것이다. 


항산에서 항심이 나온다고, 충분히 재정적으로 독립적인 위치에 있지 못한 매체라면, 그것이 방송이든 신문이든, 자체적인 콘텐츠보다는 외부의 투자와 매출, 예를 들어 광고 수익 같은 도구에 많은 의존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매체도 자선단체는 아니므로, 광고로 먹고사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광고에 대한 의존도가 과반을 넘어, 2/3 이상에 도달할 정도로 절대다수가 되면, 언론으로서의 포지션을 중립적으로 지키기는 어려워진다. 기본적으로 광고주의 눈치를 봐야 하고, 불운하게도 그 광고주는 민간 업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도 포함되므로 기업은 물론 권력 기관에 대한 와치독으로서의 목소리는 볼륨에 상한선이 생기고, 가끔은 재갈이 물릴 수는 상황까지도 자존심 버리며 감내할 수밖에 없다.


수억 명의 영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국의 메이저 언론사들, 특히 신문사들 역시 여전히 광고에서 오는 매출이 크지만, 어쨌든 주도권은 자체적인 콘텐츠에서 오는 구독 모델이 자리 잡고 있다. 콘텐츠를 기반으로 재정이 과반을 넘어, 홀로서기 수준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 콘텐츠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재투자가 진행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콘텐츠는 더욱 경제적으로도 매력적인 매출 수단이 발전할 수 있다. 즉, 이는 이른바 신문사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물론 뉴욕타임스 같은 미국의 메이저 신문사라고 해서 처음부터 이런 선순환 구조를 굴려 왔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터넷과 모바일의 등장 초기, NYT도 구독자 수 급감과 광고 수익 모델 악화라는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인터넷 시대 초기, 실제로 미국의 신문 발행 부수는 1990년을 전후로 감소하기 시작했고, 2003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신문 매출 역시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수많은 중소 신문사 폐업을 촉발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 뉴욕타임스의 부채와 비용도 역대 최대치를 찍으며 NYT 역시 부도 위기설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NYT가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선택한 방법은 다른 언론사가 취했을 법한 구조조정이 아닌, 정반대의 방향, 즉, 신문사 본연의 콘텐츠에 대한 투자였다. 이를 위해 NYT는 편집국 인원을 2010년의 1,200명에서 2020년 1,750명으로 거의 50% 가까이 증대시켰으며, 신입 기자 연봉을 10만 불 넘게 맞춰주면서 공격적으로 유능한 신입 기자들의 채용에도 불을 댕겼다. 당시 미국 신문사 편집자들의 평균 연봉은 4만 5천 불, 기자들의 평균 연봉이 3만 6천 불 정도 하던 시기였는데, 편집자는 50%를 늘렸고, 기자 연봉은 거의 3배를 주면서 공격적으로 인재들을 채용하여 인건비 비중을 늘린 셈이다.


이쯤 되면 금융위기 전후로 부도의 위기까지 몰렸던 NYT가 도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인원을 더 채용하고 연봉을 더 줄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세계 여러 대학의 MBA에서는 이러한 비결로서, 겉으로는 NYT가 당시에 감행했던 디지털 전환에 대한 막대한 투자, 그리고 그로부터 촉발된 선순환을 뽑는다. 즉, 전통적인 아날로그 미디어의 정체성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디지털 미디어로 전환한 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NYT는 기존의 광고국 직원 대부분을 디지털 담당으로 재교육하여 전환 배치하였고, 이들은 특히 페이스북 같은 SNS와의 연동, 잠재적 독자층의 적극적 발굴, 기사 내용의 재구조화와 DB 개선을 통한 검색 효율 강화, 그를 통한 맞춤형 광고주 모집 등의 수단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애초에 왜 NYT가 이러한 디지털 전환을 하게 되었는지가 더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디지털로의 전환은 사실 NYT가 광고 위주의 수익 모델에서 구독 모델로의 전환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SNS와의 연동, 팟캐스트 채널 강화, 타깃 독자에게 맞춤형으로 기사를 제공하는 서비스 개발 혹은 업체 인수, 뉴스와는 상관없는 재미난 콘텐츠 개발, 구독자 층의 cohort 관리 등의 전략은 디지털로의 완벽한 전환이 없었다면 구현하기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결과 현재 NYT의 수익 3/4은 구독에서 나오고,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17%에 지나지 않는다. 그 구독은 종이 신문 구독자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종이신문 구독자는 전체 구독자의 반의 반도 안 된다. 현재 NYT는 아날로그 시절, 최전성기에 기록한 구독자 수인 160만 명보다 무려 4배 이상 증가한 700만 명 대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700만 명의 구독자에는 미국 독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읽고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전 세계의 구독자 200만 명도 포함된다. 디지털로의 전환은 콘텐츠 발행 비용을 낮출 수 있고,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구독자 수가 증가할수록 기존의 아날로그 모델에 비해 더 높은 수익률을 유도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NYT 입장에서는 금융위기 기점에서 행한 결단은 결국 이들을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결정적인 한 수가 된 셈이다. 


그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부도 위기로 갈 수도 있었던 NYT가 단순한 구조조정과 광고 수익 모델에 집중하기보다, 오히려 직원 재교육과 디지털 전환 같은, 즉, 초기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선택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그 배경에 있었던 자원은 무엇인가?


일단 NYT는 광고가 아닌 자체적인 콘텐츠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던 NYT가 자체적으로 투자할 여력은 없었으므로 외부에서 대규모의 투자를 받았다. 또한 팔 수 있는 자산은 모두 처분했다. 투자를 받기 위한 담보는 수십 년 간 쌓인 NYT의 독자적인 콘텐츠와 최다 퓰리처상 수상자 배출 등으로 대표되는 미디어로서의 퀄리티와 신뢰도. 이를 바탕으로 NYT는 막대해 보였던 부채를 줄이고, 자금 여력을 확보한 후, 신문사로서의 정도를 택했다. 그 정도는 다름 아닌 저널리즘으로의 복귀. 즉, Back to the Basic 한 것이다.


보통 재정위기에 처한 일반적인 회사는 자산 처분 다음에 하는 수단이 구조조정이다. 대량으로 직원을 해고하고 직원 복지 혜택을 대폭 축소한다. 그런데 NYT가 취한 방식은 180도 달랐다. 직원을 자르기는커녕 더 많이 채용하고, 편집실의 직원을 재교육하여 디지털 콘텐츠로 재배치했으며, 더 유능하고 퀄리티 있는 기사를 쓸 수 있는 기자를 채용하기 위해 초임 연봉을 대폭 올렸다. 더 많은 유료 DB를 구매하였으며 더 높은 가격으로 더 양질의 사진을 프리랜서 작가들로부터 구매하였다. 뉴욕타임스가 외친 선시어외의 시그널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남미 등으로 전파되었고 세계 각지에서는 자신의 콘텐츠와 문장력을 들고 찾아온 젊고 유능한 기자들이 NYT에 면접을 문전성시를 이뤘다. 저널리즘 본연의 콘텐츠가 강화되기 시작한 것을 본 NYT의 경영진은 이를 그냥 놔두지 않고, 바로 재투자했다. 즉, 이를 디지털 콘텐츠로 여러 방향으로 다듬어 더 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푸시하기 시작한 것. NYT는 신문사가 아닌, 미디어 그룹으로서 IT에 더 많은 투자를 했고, 자체적인 검색 엔진과 DB 개발, 클라우드 시스템 개발에도 투자했으며, 최근에는 AI 에도 투자를 한다. 


물론 모든 신문사가 NYT의 방식을 따를 수는 없다. NYT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전통과 무형의 자산을 오랜 시간 축적한 메이저 언론사였고, 어쨌든 영향력 (판매망, 편집진, 기자진, 누적된 콘텐츠 등)이 보존된 상황이었으며, 충성스러운 구독자가 온전히 100만 단위로 유지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어로 발행되므로 전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언어적 특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NYT 마저도 2008년 금융위기 전후의 결단, 특히 저널리즘으로의 복귀라는, 어찌 보면 업계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정석을 택한 결단과 디지털 전환으로의 변신이라는 어려운 과업을 동시에 완성하지 못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NYT 결단만큼이나 운도 많이 따라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SNS가 금융위기 이후 이렇게 급격하게 성장하지 못했더라면, NYT의 전략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한국의 신문사들의 상황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신문사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광고에 의존하는 절대다수의 한국 신문사들은 그 광고 수익 자체를 포털에게 점점 더 많이 내어주면서 재정적으로 더 약해지는 불운한 나선 구조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한국 신문사들은 광고 수익이 전체 매출의 절반을 넘어 2/3, 3/4에 육박하고 있는데, 광고 수익 자체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덩치는 작아지고 재정은 점점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back to the basic, back to the journalism을 외치며 NYT의 모델을 따라가자고 외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애초에 한국어 구독자 층이라는 시장도 너무 작거니와, 저널리즘을 소리 높여 외쳤을 때 그것을 믿어주고 화답하며 따라줄 독자들을 확보할 신뢰 자산도, 안타깝지만, 많이 사라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사들의 방향은 결국 돌고 돌아 저널리즘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분할 수 있는 것 처분하고, 투자할 것 투자한다는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저널리즘에 투자하기 위해 기자들에게 더 많은 연봉을 지급하고 더 많은 취재를 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며, 더 좋은 DB를 사고, 더 많은 서버를 구축하는 잘 알려진 수단을 확보하라고 외부에서 훈수 두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것이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므로, 다른 방안을 더 많이 모색해야 한다. 별로 가진 것 없는 알량한 지식 몇 개 주워섬기고 있는 일개 교수일 뿐이지만, 기자들이 스스로 스터디모임 조직해서 몇 시간이나 같이 토론하고 강의하고 QnA 하면서 그들의 심층취재에 도움을 주려는 것도 그러한 살길 모색, 특히 저널리즘의 회복에 아주 미력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혹자는 이렇게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당신이 그렇게 재능기부에 가까울 정도로 기자들에게 뭔가 알려주고 교육시켜 주는 것이 결국 사주들의 배만 채우고 특히 경제지 같은 신문은 그 신문에 광고를 싣는 광고주인 대기업들의 입장만 더 대변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알고나 그러는 것이냐고 들 말이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 앞잡이나 한다고 '기레기'라고까지 멸칭되는 기자들이 도대체 뭐가 기특해서 도와주냐고 힐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런 기자들이 당연히 없지는 않겠으나, 모든 기자가 그런 것도 아니다. 제대로 취재하고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정보 주려고 전문가 여러 명 크로스체크 하면서 기사 초판 발행 후, 내게 확인받고 수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비 들여서 해외 학회에 출장 다녀오고 그 학회에서 전문가 섭외해서 밤늦게까지 취재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들이 뭔 대단한 일 하겠다고 공명심에 사로잡혀 어떤 공공의 선이라는 대의만 생각해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도 먹고살아야 하고 집에 가면 가족들이 있고 아이들이 있는 평범한 생활인들, 우리 사회의 동료들일뿐이다. 


한국의 미디어 시장이 좁고 수익성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한국의 신문사들이 모두 저널리즘은 버려 버리고 광고 수익에만 목을 매단다면 그것은 그 방향대로 미디어의 멸망을 불러올 것이다. 그렇지만 뭐라도 취재하고 해설하려는 기자들을 모두 매도하며 한심하다고 비아냥대고 미디어의 콘텐츠가 NYT 발끝에도 못 미친다면서 수준 이하라고 외면하면, 그것은 또 그 방향대로 미디어의 멸망을 불러올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삼권분립보다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저널리즘이 살아 있는 언론사와 기자들, 그리고 편집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들이 back to the basic 할 수 있게 하려면 어쨌든 구독자가 늘어야 하고, 그러려면 콘텐츠가 더 양질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구조조정이 필요하면 의당 해야 할 것이고, 변신이 필요하면 의당 감당해야겠으나, 본령인 저널리즘은 바뀌지 않아야 한다. 그 본질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홀로서기가 안 되는 신문사라면 결국 쇠락하여 망하는 길로 갈 것이고, 불운하게도 한국의 신문사들이 모두 그렇게 쇠락하는 경로로 접어들게 된다면 한국에서는 권력자들과 자본가들, 비리집단과 범죄자들에 대한 와치독이 사라질 것이다. 내가 전해주는 반도체 소식 한 꼭지가 뭐에 그리 저널리즘에 대단한 영향력을 주고 기여를 하겠냐마는, 그래도 최소한의 기여가 된다면 하는 것이 나는 맞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정책 개발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노후 자금을 투자하기 위한 정보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하는 방향타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어떤 기술 회사의 사기 행각을 미연에 알아차릴 소재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소속된 기관이나 집단의 방향타를 고칠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문사 상황의 구조적 한계를 보면서 한국의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저널리즘이 신문사의 본연의 목적이라면 대학의 본연 목적은 교육과 연구, 그리고 사회에 대한 서비스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대학 대부분은 불행히도 재정 자립도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고, 설상가상으로 매년 급감하는 학령인구는 마치 줄어드는 신문 구독자 수와 비슷하게 대학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한국 사립대의 절대다수는 재정의 2/3, 3/4 이상이 등록금에 의존하는데, 문제의 그 등록금은 15년 넘게 동결 혹은 물가 상승률 감안하면 줄어든 지 오래다. 심지어 상당수의 대학 등록금은 영어 유치원 등록금만도 못 하고, 대형 입시학원 등록금만도 못 한 처지다. 그나마도 이 등록금마저 줄어든 학령인구와 대학 진학률로 인해 앞으로 10년 내로 2/3토막, 20년 내로 반토막 나는 것은 거의 정해진 결말이다. 대학들은 자산 처분이나 인수 합병, 글로컬 사업 등으로 2-3개씩 연합체를 꾸리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는 마치 08년 금융위기 당시의 대다수의 미국 신문사들이 하는 자구책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 자구책을 통해 고강도 구조조정을 했음에도 결국 미국 신문사들이 절반 이상 폐업하게 된 것처럼, 현재 추세 대로라면 한국의 사립대 절반은 앞으로 한 세대 안에 자의 반타의 반 문을 닫게 된다. 


물론 한국 대학들도 NYT처럼 back to the basic 하면 되지 않는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더 많은 편집진과 기자를 채용했던 NYT처럼 더 많은 교수와 연구원을 채용하고, NYT가 디지털 전환을 위해 투자한 것처럼, 대학도 더 많은 실험 장비와 교육 시설, 콘텐츠 제작 자원 확보에 투자해야 한다. 그렇지만 한국 대학 대다수는 그러한 재원을 확보할 방안이 없고, 남는 것은 자산 처분과 투자 밖에 없다. NYT도 자산 처분을 했지만, 주요 재원은 외부에서 끌어 온 투자였다. 한국 대학을 보고 투자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 재단이 막강한 일부 학교는 그런대로 버텨보겠지만, 그렇지 못 한 대학 입장에서는 투자할 수 있는 주체는 정부 아니면 외국의 펀드들 밖에 없다. 투자자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 한 대학은 점점 신임 교수 채용 규모를 줄이고 있고, 일부 전공은 정년퇴임하는 교수들이 나가는 방식으로 전공을 없어지고 있기도 하다. 최대한 돈이 되는 전공으로 바꾸고, 자체적인 수익 사업을 하려고 혈안이 된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돈 안 되는 수많은 기초과학과 인문학 전공은 학맥이 끊기게 되며, 애써 수십 년 간 가꿔온 학문적 생태계는 지구기후위기 속 황폐화된 산호초 마냥 붕괴한다. 수십 년간 쓰던 낡은 교육 기자재는 결국 고장 난 채 방치되어 학생들의 교육 퀄리티는 매년 하락하고, 애써 뽑은 젊은 신임 교원은 자신이 가르쳐 졸업시킨 학부 졸업생의 대기업 초봉만도 못 한 연봉, 그리고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연봉 상승률에 기겁하여 몇 년 있다가 학교를 그만두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 대학들의 back to the basic은 한국 신문사들의 back to the journalism을 외치는 것 마냥 공허하기 짝이 없고, 그저 정부의 지원금과 사업에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어쨌든 정리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니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 저널리즘 기준에 못 미치는 신문사들은 폐업 수순을 밟게 되고, 재정이 악화되어 신입생 충원이 안 되는 대학들은 점점 퇴출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2040년, 2050년쯤 되면 한국에서 신문사라고 부를 만한 회사는 2-3곳 남고, 대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관은 10-15개 정도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확률도 높아 보일 것이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신문사 혹은 대학이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좋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와중에 언론의 생태계, 학문의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붕괴된 셈이 되고, 이들이 고용하던 근로자 집단의 붕괴는 물론, 사회에서 해 오던 수많은 크고 작은 작업들과 담당하던 순환 체계, 그리고 와치독으로서의 역할 분배와 재교육 기관으로서의 펌프 역할은 작동을 멈추게 될 것이다. 10여 개 남은 대학, 2-3개 남은 언론사는 그 자체로 혹은 연합하여 독과점 구조를 이루게 되고, 학문과 언로의 다양성은 보장되지 못할 것이다. 대학들은 더더욱 돈이 되는 학문과 랭킹 놀음에만 매진하고, 교수들은 더 많은 외부 사업을 유치하거나 더 많은 창업을 하라고 강권받고 내몰리게 될 것이다. 기자들은 더 많은 광고를 끌어오거나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라고 종용받을 것이다.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고 본연의 임무가 뒷전으로 밀리는 독과점 구조는 점점 더 깨뜨리기 어려워질 것이고 웩더독은 뉴노멀이 될지도 모른다.


무엇인가가 정해진 미래라고, 결말이라고 쉽게 단정 짓는 것은 매우 맘 편한 일이다. 어찌어찌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내뱉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쓸데없이 원리원칙 외치지 말고 편하게 순리대로 사는 것도 편리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외치고 선 긋고 단정 짓기 전에, 뭐라도 해보긴 해야 하지 않을까. 저널리즘에 복귀하고 싶은 기자들이 있고, 학문 제대로 해보고 싶고 후학 제대로 키워 보고 싶은 교수들이 있고, 이러한 한 줌의 기자들, 몇 안 되는 교수들이나마 보면서 그 직업과 커리어를 꿈꾸고 계획하는 그다음 세대의 후학들, 후배들이 있다면, 적어도 이들을 위해서 있는 자리에서 뭐라도 좀 해보는 것이 그저 비아냥대고 비웃고 멸칭으로 내려치고 쯧쯧거리는 것보다는 더 필요하지 않을까. 


백화 되어 회복이 불가능해진 산호초라도 그냥 바닷속에 있으면 수면 밖에서 볼 때는 안 보이므로 괜찮아 보이는 것처럼, 생태계가 붕괴되고 자립할 수 없을 정도로 퇴화된 언론이나 대학이라도, 안 보면 그만, 무시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백화 된 산호는 더 이상 해양 생태계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없어 결국 바다가 죽음의 바다로 변하게 되는 것처럼, 최소한의 학문과 언론의 자유를 이어가고 만들어갈 주체가 사라진, 그러한 주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사회는 죽음의 사회로 바뀌는 것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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