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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Dec 12. 2024

불확실성 시대 속의 산업 강국 린치핀 전략

한국 산업 지형의 업그레이드 전략을 다시 생각한다.

(Introduction)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을 지탱해 온 산업, 특히 제조업의 위기는 우리 눈앞에 도래했습니다. 이는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 떨어져셔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한국이 취해 왔던 전략을 중국이 거의 그대로 답습하면서, 규모는 10-20배로 늘리는 규모의 경제 전략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중국의 밀어내기 생산 전략으로 인해, 이제 중국은 자국 내수 시장은 물론, 글로벌 시장으로 원가 이하로 출혈 경쟁을 감수하면서 물량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중국이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다면 이러한 출혈 경쟁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 업체들에게는 제살깎아먹기 경쟁이 되었겠지만, 잘 아시다시피, 중국의 뒷배에는 CCP가 있습니다. 이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면 중국과 1:1로 산업 규모와 혁신 경쟁력으로 맞붙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한국을 지탱해 온 산업을 쉽게 포기하기도 어렵습니다. 중국과 달리, 한국의 산업, 특히 제조업은 대부분 수출향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첨단 산업, 고부가가치 산업이라 불리는 산업들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의 GDP는 외화를 얼마나 많이 벌어들이냐, 같은 산업에서 얼마나 더 혁신을 먼저 취할 수 있느냐로 결정될텐데, 현재의 산업 지형과 발전 전략은 그러한 변화에 대해 사실 별다른 전략적 포인트를 보여주지는 못 합니다.


이러한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제가 착안한 개념은 예전에 읽었던 세스 고딘의 책 린치핀이었습니다. 이 책에 나왔던 전략에 대해 모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전략은 산업이 아닌 개인에 대해 적용되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스케일을 확장하면 한국의 현재 산업 구도와 혁신 전략에 대해 시사하는 바는 충분히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개념에 기반하여, 제가 한국 제조업계에 던지는 화두는 바로 병목 지점의 선점입니다.


병목 지점은 언뜻 생각하면, 발목을 잡는 장애물 정도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병목 지점을 선점하고 있으면 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콘트롤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바둑에서도 잘 둔 포석 한 점은 대국 후반부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하죠. 장판파의 장비 같은 산업이 한국에게 계속 나와준다면 한국은 혁신의 동력을 조금 더 유리하고 빠르게 취할 수 있습니다.


병목 지점은 그 생리상 일부러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가 서로 연결되면서 흐름이 생겨야 관측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 흐름이 어떻게 그리고 왜 생성되는지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제가 아래 글에서 든 대표적 사례는 반도체 밸류체인에서의 병목 지점들의 연결 구조입니다만, 이러한 메커니즘과 내부 구조는 다른 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마도 이번 생에 목격할 가장 큰 산업의 변화 모멘텀인 인공지능이 이제 인공지능이나 반도체의 영역을 넘어, 조만간 (아마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다른 산업의 영역으로 쓰나미처럼 번져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흐름이 생성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고, 이 흐름 속에서도 반드시 병목 지점은 생성될 것이기에, 그것을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든 미래가 예상됩니다만, 한국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은 이러한 병목 지점이 생길만한 부분이 어디인지에 대해 지난 한 세대 넘는 시간 동안 꽤 산업을 다양하게 끌고 오면서 데이터와 노하우가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과 반도체에서 촉발된 혁신의 쓰나미가 기존의 산업 영역으로 쓸려 들어왔을 때, 그것에 다 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산업의 멈춰진 엔진을 재가동할 수 있는 동력으로 발전시키는 것에서 새로운 흐름이 또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도메인 지식과 인공지능의 혁신이 오버랩되는 지점에서 바로 그 병목 지점이 자연스레 나타날 것으로 저는 감히 예상합니다. 


아래 글을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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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컨설팅에서 유명한 구루 중 한 명인 세스 고딘은 아직 인공지능이 세상을 휩쓸기 전이었던 2010년 ‘린치핀 Linchpin’이라는 베스트셀러 경영서를 쓰면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이 주로 다룬 내용은 개인이 부품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핵심적인 인재가 되려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전략의 예로서 문제 해결 능력, 창의적 사고, 독립적 판단력 등이 언급되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지 15년이 되어가는 현시점, 인공지능은 날로 발전을 거듭하고 로봇이나 자율주행차의 보급은 가속되며 개인이 독립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점차 축소되고 있기에, 린치핀 전략은 이 시대에 더 중요한 통찰을 준다. 이 전략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으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다. 린치핀의 핵심은 차별화된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린치핀 전략은 집단이나 사회를 넘어, 국가로까지 확대 적용될 수 있을까? 개인에게 요구되는 창의성이나 문제 해결 능력을 외삽하여 스케일만 늘리는 방식이 아닌, 국가의 미래 전략에 합당한 방식이 있을까? 이를 알아보기 전에 현재 상황이 다중 위기가 결합된 불확실성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국제정치는 생리적으로 협력과 적대가 조변석개 하지만, 최근의 국제 정치 상황은 20세기 초중반 1, 2차 세계 대전 전간기를 연상케 할 정도로 과열 경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2010년대 들어 격화되고 있는 미-중 패권 경쟁은 현재 전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방위적으로 전선이 넓어지고 있다. 한 때 미국에 이어 글로벌 GDP 2위였던 일본은 쇠락해 가는 자국의 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다시 과감한 투자 드라이브를 걸고 폐쇄적이던 자국의 노동과 자본 시장을 적극 개방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이란 전쟁, 중국-대만 간의 양안 긴장 고조 등 점차 증폭되는 지역 불안정성은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현재의 국제 정세는 안정적인 평화의 시기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정세이고, 이는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인지하게 하고 있다. 유럽 각국은 러시아의 위협 앞에 러시아산 가스와 신재생 에너지에 의존해 오던 에너지 전략을 재수립하고 있으며, 역내 산업 보호를 위한 대 중국 관세 정책 강화 등 견제 정책을 취하고 있다. 조만간 트럼프 2기를 맞게 될 미국은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누적된 무역 적자 개선을 위해 고관세율 정책을 고수하면서, 한 편으로는 제조업 리쇼어링 re-shoring 정책을 강화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간 취해왔던 세계 경찰의 포지션에서 발을 빼면서 고립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첨단 산업에서의 극한 경쟁 역시 다중 위기의 한 요소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무인 이동수단, 첨단 반도체와 로봇, 에너지, 차세대 통신, 우주 항공, 양자컴퓨터 등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대기업들이 벌이는 차세대 기술과 고도로 집중된 자본이 만들어내는 치열한 경쟁은 이제 IT 영역을 넘어, 글로벌 제조업 지형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는 혁신의 모멘텀이 앞으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흐르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 산업에서의 경쟁은 곧바로 인공지능 영역의 경쟁으로, 그것은 다시 로봇이나 무인자동차, 에너지나 바이오산업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경쟁 영역이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혁신의 모멘텀이 생성되는 곳이라면 회사든 국가든 합종연횡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에 과거의 친원관계는 현재의 판단 기준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기 어렵다. 상호협력 분위기와 비교우위 경제 이론 체계 속에서 한 세대 남짓 WTO 출범과 함께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글로벌 자유무역 물결은 이제 모든 국가에게 있어 불확실성 영역에 있는 구세대의유물이 되며 썰물이 되고 있다. 첨단 기술을 확보한 기업은 규제를 피해 보조금이나 세제, 인프라 혜택을 찾아 각국 정부의 산업 정책을 비교하며 마치 쇼핑하듯 국경을 넘나 들며 투자의 선수를 두려 한다. 


국제 정세뿐만이 아니다. 날로 고조되는 기후위기와 그로 인해 더욱 강도가 세지는 기후 재난 역시 국가 간 산업 경쟁의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비교적 예측 가능했던 기후 하에서는 기본적인 농림축산, 수산업 같은 1차 산업의 안정적 운영이 가능했지만, 기후변동으로 인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는 영역은 작물, 수산물, 축산물 등의 생육과 수확에 의존하는 식량산업이다. 또한 탈산소 발전원으로의 전환은 에너지 집약도가 높은 제조업들의 이전과 변환을 점점 가속시키는데, 이로 인해 신재생에너지 기반 전력과 송배전 시설이 충분히 확보된 지역이 곧 다음 세대의 제조업 기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식량과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중요한 산업 영역이지만, 이 두 영역 모두 기후위기로 인해 점차 불확실성의 한가운데로 접어들고 있다. 기후위기는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거시적 변화에 해당하고, 글로벌 기술 경쟁은 인공지능에 의해 비가역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다중 불확실성이 주는 환경적 변화는 기업들의 산업 중심 이동은 물론, 그를 둘러싼 각국 정부의 산업 정책의 공격적 전환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가 단위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핵심은 자국이 다른 나라 대비 더 큰 영향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에 있다. 산업 시대 이후 그 중심에 있는 것은 혁신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이다. 그렇다면 다중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회사와 나라들의 경쟁이 극한으로 치닫는 현시점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린치핀 전략은 바로 이 혁신의 경쟁 구도에서 대체 불가능한 지위로 가는 방법론을 찾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국이 블루오션 전략을 취해야 한다든지 특정 기술에 대한 독점적 지위로 올라가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럴 수 있는 기술이 있고 블루오션을 인위적으로 만들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글로벌 공급망은 독점적 지위를 갖는 집단이 장구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특히 그 집단이 국가일 경우에는 다른 나라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는 것은 예견할 수 있는 결과다. 기술적 맥락에서 본다면 이 국가적 스케일의 린치핀 전략은 각 산업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병목 지점에 영향력 지분을 갖는 것부터 시작한다. 물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병목 지점의 핵심은 그 지점을 지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갈 수 없는 관문을 의미하므로, 그 관문을 지킬 수 있는 실력을 가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다. 한 가지 주목할 특징은 이러한 병목 지점들은 각기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스케일과 분야에 걸쳐 병목 지점을 파악하고 포괄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이러한 전략은 개별 산업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산업 간의 연계 구조, 공급망, 기술의 분기와 발전 양상, 표준과 로드맵 등의 요소를 고려하여 수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전 세계 주요 회사들은 물론 선진국들의 첨예한 관심사는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 안전성 규제 정책도 일부 핵심 어젠다가 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주요 관심은 인공지능이 가져올 불가역적 영향에 쏠려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듯, 이제는 인공지능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낼 영향에는 이른바 챗지피티 ChatGPT 같은 일명 파운데이션 AI와 그것이 이른바 슈퍼인공지능 AGI이 될 것인지 여부, 그리고 인공지능이 새롭게 창출할 시장과 나아가 인공지능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현재의 산업 전체가 겪게 될 변화 등이 포함된다. 현재의 인공지능 산업의 중심에는 미국의 IT 대기업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구글(알파벳), 메타(페이스북), 아마존, MS, 테슬라 같은 미국의 주요 IT 대기업들은 더 큰 스케일의 파라미터 공간에서 정의되는 더 강력한 인공지능 알고리듬을 만들고, 이를 훈련시켜 더 효과적인 정보를 찾고, 더 빠르게 처리하고, 더 풍부하게 생성하고, 더 정확하게 예측하는 영역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가지려 경쟁한다. 잘 훈련된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대규모 클라우드 시스템과 서버에서 SaaS(software-as-a-service)나 추론 기능에 특화된 인공지능 서비스의 핵심 엔진이 된다. 예를 들어 구글이 지배하던 웹 검색 시장을 빠르게 대체하며 최근 점점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모으고 있는 앤쓰로픽Anthropic의 인공지능 검색엔진인 퍼플렉시티 Perplexity는 대표적인 거대언어모델 LLM 기반 추론형 인공지능 기반 검색 전문 SaaS다. LLM 기반 파운데이션 AI를 다음 세대의 정보기반 서비스 산업으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병목 지점으로 본다면, 그 지점을 선점한 기업들은 오픈AI, MS, 알파벳, 메타, 앤쓰로픽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더 개선된 성능의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하루가 멀다하고 세상에 내놓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회사는 극소수다. 집중된 자본력과 높은 성처럼 쌓인 기술력으로 인공지능 산업 전체의 진행 방향이 결정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기업들은 인공지능 산업의 최전선에 있는 병목 지점이 된다.


그런데 한 층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진짜 병목 지점은 고성능 인공지능 정보처리 전용으로 최적화된 하드웨어에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제는 전 세계 시가총액 1위를 놓고 다툴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해진 미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의 GPU가 있다. 엔비디아의 GPU는 약 20여 년 전만 해도 주로 고성능 컴퓨터 게임용 가속 엔진 정도로 활용되었으나, 2010년대 초반, 머신러닝 machine learning 방법론의 무게중심이 딥러닝 deep learning으로 옮겨간 이후 그 지위가 급격히 격상되었다. 딥러닝에 필요한 합성곱 convolution 같이 대규모 행렬 반복 연산에 특화된 하드웨어로서 성능이 널리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엔비디아의 GPU는 본격적으로 인공지능 시대의 하드웨어 최전선에 자리 잡게 되었다. 엔비디아의 GPU는 하드웨어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최적화된 정보 전송, 처리, 버퍼, 메모리 버스 등의 시스템온칩 system-on-chip 설계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산 성능이 월등히 뛰어나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엔비디아가 제공하는 CUDA 같은 사용자 중심 GPU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 2.5D 패키징에 기반한 칩렛 설계 최적화 등의 기술에 기반한 경쟁력마저도 종합적으로 글로벌 탑 수준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다른 반도체 회사 제품으로 대체하기 매우 어려운 칩이 되었다. 이로 인해 GPU 시장에서 2위권으로 볼 수 있는 AMD가 제조하는 GPU는 점유율만 놓고 보자면 5%가 채 되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인공지능 전용 하드웨어 시장은 사실상 엔비디아 독점 체제로 굳어지고 있다. 실제로 주요 IT 대기업을 포함하여, 현재 인공지능 서비스를 하겠다는 기업들의 실제 실력이나 서비스 능력은 그들이 보유한 엔비디아의 인공지능 서버용 GPU칩의 보유 개수로 판가름될 정도다. 이 기준으로만 따진다면 예를 들어, 메타와 MS가 15만 대 보유로 최정상 그룹에 속하고, 알파벳과 아마존, 오라클 등이 5만 대 보유로 2위 그룹에 위치한다. 한국은 2024년 하반기 기준, 국가 전체를 통틀어도 기업, 학교, 정부기관이 보유한 서버급 인공지능 전용 GPU칩이 총 3천 대가 안 되는 것으로 조사된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한국은 안타깝게도 현재로서는 인공지능 산업에서는 이미 병목 지점 선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사실은 엔비디아가 아무리 GPU를 많이 만들어도 현재의 폭발적인 수요 증가세는 엔비디아의 공급 한계를 훨씬 초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엔비디아의 GPU는 인공지능 산업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병목 지점으로 볼 수 있고, GPU의 보유 규모는 그 자체로 신규 진입자 입장에서는 마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층 더 들어가 보면, 이 병목 지점에는 더 핵심적인 병목 지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엔비디아가 반도체 기업이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팹리스 fabless 기업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더 잘 이해된다. 엔비디아는 고성능 인공지능 전용 GPU를 설계하고 이 칩을 활용하여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최적화된 알고리듬을 지원할 수 있는 핵심 설계 자산과 CUDA 같은 인터페이스를 보유하고 있으나, 그 설계대로 제작될 반도체 소자가 집적된 웨이퍼를 직접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 생산은 현재 대만을 대표하는 기업이자, 세계 최정상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담당한다. 엔비디아는 지난 10년 간 TSMC가 주기적으로 계속 발전시켜 온 선단 공정에 자사가 설계한 칩의 생산을 위탁하는 주요 고객 중 하나였다. TSMC는 2015년 세계 최초로 테크노드 10 나노벽을 돌파한 이후, 2018년 7 나노, 2020년 5 나노, 2022년 3 나노, 2024년 2 나노 순으로 선단 공정의 기술력을 지속적으로 높여 왔다. 줄어드는 노드 나노미터의 숫자는 그만큼 더 작은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2차원 평면 위에서 형성되는 핀펫 FINFET 같은 트랜지스터 구조를 생각할 때, 그 집적도는 줄어드는 길이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증가한다. 예를 들어 2015년 10 나노 공정에 비해, 2020년 5 나노 공정은 이론적으로는 4배 증가한 트랜지스터 집적 밀도가 달성됨을 의미한다. TSMC가 발표한 최근 계획대로라면 2026년 1.8 나노, 2028년 1.6 나노벽을 돌파하게 되는데, 1.6 나노와 10 나노의 트랜지스터 집적도 차이는 거의 40배까지 늘어난다. TSMC의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집적 밀도 스케일의 향상을 이끌어 온 공정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파운드리 전문 기업으로서 다양한 칩 구성 요소를 결합하여 하나의 칩으로 만들 수 있는 설계-공정 최적화 기술 DTCO(Design-Technology Co-Optimization), 특히 월 수십만 장 이상의 12인치 웨이퍼를 높은 수율로 양산하는 과정을 통해 칩렛 집적 기술력을 확보한 것도 TSMC를 대체불가능한 파운드리 기업으로 만들어준 요인이 되었다. 2024년 기준, TSMC의 제1 고객은 애플이고, 제2 고객은 엔비디아인데, 두 회사가 TSMC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40%에 육박한다. 애플의 M시리즈 애플실리콘 Apple Silicon 칩은 인텔이나 AMD의 CPU보다 훨씬 전력대 성능비(전성비)가 뛰어나고,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AP로서도 가장 최적화된 칩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아이폰이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갖는 압도적인 경쟁력의 밑바탕이 된다. 즉, 현재 모바일부터 초대형 인공지능 GPU 서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정보처리 성능이 뛰어난 첨단 반도체 칩 제조라는 병목 지점은 TSMC가 사실상 독점적으로 선점했다고 볼 수 있다. 


TSMC는 단순히 선단 공정 기술 경쟁력뿐만 아니라, 이른바 후공정이라고도 불리는 첨단 패키징 Advanced Packaging 공정 기술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예를 들어 엔비디아의 GPU는 TSMC가 제공하는 CoWoS(Chip-on-Wafer-on-Substrate) 같은 패키징 기술로 비로소 하나의 시스템으로 완성되는데, 이 과정에서 TSMC가 제공하는 패키징 공정은 고성능 정보 처리 과정에서 생기는 발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관리 소재, 유전체 신소재, 메모리 모듈과 연결되어 안정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실리콘 인터포져Silicon interposer 등이 집약된 종합 공정 기술이다. 전공정과 후공정 모두 세계 최정상급 기술 경쟁력과 양산 규모를 동시에 갖춘 TSMC를 현재 대체할 수 있는 기업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해 TSMC는 현재 7 나노 이하급 최선단 공정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80% 이상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의 로드맵 대로라면 2 나노 이하, 심지어 옹스트롬(0.1 나노) 수준으로 접어드는 최선단 공정에서는 TSMC의 지배력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일각에서는 이 점유율이 90%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이는 TSMC를 보유한 대만 입장에서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기제가 된다. 전쟁이나 대지진 같은 급변 사태 발생 시, 대만 발 첨단 반도체 공급망이 붕괴될 경우, 이는 전 세계 IT 공급망의 붕괴, 나아가 전 세계 혁신 엔진 붕괴로 도미노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다른 주요 국가들에게 잠재적인 경제 불안 요소가 된다. 이로 인해 한 편으로는 대만 주변 지역 안보를 위해 자국의 군사력을 투사해야 한다는 압력이 생기고, 또 한 편으로는 대만에 과하게 의존하는 첨단 반도체 제조 쏠림 현상을 완화하려는 정책이 추진되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랜드연구소나 CSIS 같은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한국 등에 TSMC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 제조 클러스터를 분산 조성하는 전략도 구상하는 전략 아이디어를 미국 정가와 정부에 제공한다.


사실 인공지능 전용 하드웨어는 엔비디아가 설계하고 TSMC가 제조하는 GPU만으로만 작동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컴퓨팅 하드웨어 아키텍처인 폰노이만 von Neumann 구조에서는 산술논리연산을 담당하는 코어 ALU와 데이터가 저장된 메모리 셀이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긴밀하게 연결되며 작동하는 방식을 따른다. 다만 코어의 동작 속도에 비해, 메모리는 그 원리상 속도가 느린데, 이는 데이터의 입출력, 대기, 전처리, 전송 등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는 메모리장벽 Memory Wall이라고 불리는 구조적 문제다. 이 문제는 코어와 메모리 사이의 속도 격차가 점차 확대되면서 더 심각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GPU의 성능이 아무리 강력해져도 결국 전반적인 정보 처리 속도가 메모리 소자 성능에 의해 결정되는 병목 지점이 생긴다. 엔비디아는 이 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추고자 더 전송속도가 빠르고 더 많은 데이터를 한꺼번에 입출력하며 제어할 수 있는 획기적인 구조의 맞춤형 메모리를 주문했고, 이에 타이밍 맞춰 대응한 업체는 한국의 SK 하이닉스다. 하이닉스는 2010년대 초반부터 HBM1, HBM2 같은 고대역폭메모리 HBM를 DRAM 기반으로 제조하기 시작하였으며, 노하우가 충분히 쌓인 2010년대 중반 이후 HBM3, HBM3E 등으로 세대가 진화하면서 엔비디아의 GPU와 연결될 수 있는 인공지능 맞춤형 메모리 주력 파트너사가 되었다. 현 5세대 HBM3E의 경우 하이닉스의 글로벌 점유율은 현재 55% 이상이며, 2025년의 HBM3E 점유율은 65% 이상, 그리고 2026년 이후 본격화될 6세대 HBM4의 경우 점유율은 8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HBM3E는 물론 HBM4의 최대 구매 대상자가 바로 엔비디아이기 때문이다 (HBM3E 구매 비중 2025년 75%, HBM4 구매 비중 2026년 80% 예상). 엔비디아가 인공지능 전용 GPU 시장에서 보유한 압도적인 점유율만큼은 아니지만, 인공지능 특화 하드웨어의 한 축으로 작동하는 병목 지점을 하이닉스가 거의 독점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의 기술 방식이 지속되는 한, 하이닉스가 가진 HBM 최적화 기술, 특히 더 고층으로 적층하고 더 많은 입출력 채널 밀도를 높임으로써 밴드폭을 확장하는 메모리 제조 기술 경쟁력은 하이닉스가 인공지능 반도체 제조의 병목 지점에서의 영향력을 더 크게 점유할 수 있게 만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여전히 메모리 작동 속도로 브레이크가 걸리는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결국 더 강력하고 새로운 인공지능 전용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한 기술 혁신 압력을 증가될 것이므로 이러한 영향력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아보았듯, 현재의 인공지능 산업이라는 거대한 전장에는 복수의 층위에 걸쳐 여러 병목 지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병목 지점들은 하나같이 압도적인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하여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소수의 기업이 선점한 상태다. 이러한 병목 지점의 특징은 다른 기술로 대체가 당분간 불가능한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신규 경쟁 업체들의 진입이 쉽지 않고, 다른 층위의 기술에 비해 다소 발전이 느리거나 기술 개발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마치 그 병목 지점을 중심으로 교통체증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한다는 점이다.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공지능 특화 반도체 제조의 린치핀이 된 TSMC나 SK 하이닉스가 점유하는 병목 지점의 더욱 아래 단계에 있는 핵심 공정 장비도 그러한 교통체증의 일부가 된다. 예를 들어 전공정에서는 10 나노 이하급 테크노드 패터닝 필수 장비가 된 네덜란드의 ASML가 독점 제조하는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가 있고, 실리콘관통전극tsv 같은 미세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pplied Materials나 램리서치LAM research 같은 소수의 장비 업체들이 독과점하며 제조하는 고성능 에칭 장비가 필요하다. 교통체증이 지속되면 도로 폭을 넓히거나 자동화된 시스템을 도입하고 새로 도로를 구축하거나 실시간 도로를 감시하는 자원이 투입되며 체증을 해결하려 하는 것처럼, 기술의 교통체증 역시, 체증을 일으키는 병목 지점의 개선을 위해 끊임없는 혁신이 시도된다. 특히, 그 과정에서 이른바 와해성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라 불리는 혁신의 맹아가 형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씨앗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전에는 병목 지점에 자리 잡은 핵심 기술을 점유한 회사나 국가는 그 분야에서 영향력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분야에 혁신을 이어주는 지렛대가 되기도 한다. 이는 병목 지점에서의 핵심 기술 보유 여부가 린치핀이 될 수 있느냐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인공지능과 반도체로 이루어진 산업 생태계 사례를 중심으로, 기술의 병목 지점이 린치핀으로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는 인공지능이나 반도체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전 산업에 대한 전략으로 확장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사실 한국 입장에서는 인공지능과 반도체 산업이 갖는 중요성만큼이나, 지금까지 국부 창출을 기여해 온 제조업 역시 중요하며 국가적 차원의 산업 전환기 전략 개발은 옵션이 아닌 필수가 된다. 따라서 기존 산업들의 경쟁력을 보존, 나아가 더 발전시키거나 혁신적으로 전환할 린치핀 전략 개발은 매우 중요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의 산업 구조는 50-60년대 농업, 광업으로 시작하여 60-70년대 비료, 섬유, 화학, 70-80년대 제철, 자동차, 조선 등 중공업, 80-90년대 전자와 반도체, 90-00년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00년대부터 현재까지 IT와 전기차, 에너지, 지식 산업 등으로 글로벌 산업 지형의 역동적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며 발전해 왔다. 1, 2차 석유파동, IMF,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 사태 같은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한국전쟁 후 약 70여 년 간의 지속적인 산업 기반 확보 및 기술 혁신의 추구는 한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으로, 다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그리고 선진국 중에서도 제조업과 IT, 첨단 지식 산업을 동시에 세계적 수준에서 추구하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핵심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갖는 현 위치는 중국이라는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에 의해 위협받거나 이미 추월당한 상태로 쇠락의 기조에 접어들었다. 한때 일본의 디스플레이 업체를 추월했다고 자축했던 대형 LCD 산업은 최근 중국에게 선두를 내어 주었거나 심지어 공장을 매각했고, 리튬이차전지 양산 규모와 기술 수준 모두 중국의 전기차와 배터리 업체들에게 선두를 내어 주었다. 철강 생산량과 조선 수주 규모 역시 중국에게 추월당했고, 메모리반도체 마저 불과 5년 전 기술 격차 6-7년 수준에서, 현재는 기술 격차 1.5-2년 이내로까지 축소되어 이제는 초격차는 언감생심이며, 당장 5년 후의 점유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가 지난 한 세대 넘는 시간 동안 한국 산업의 가장 중요한 린치핀으로 자리 잡았다고 하지만, HBM 같은 새로운 린치핀 역시 결국 전통적인 DRAM 기술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CXMT 같은 중국 최대의 메모리반도체 강자가 보이는 끊임없는 기술 혁신과 양산 규모 확장은 어느 시점에 한국이 가진 메모리반도체 린치핀은 물론, 그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린치핀의 영향력을 희석시키는 기제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국뿐만 아니라, 각국 역시 기술 혁신 전략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고, 국부 창출을 위한 산업 정책 경쟁을 벌인다. 일본은 반도체를 비롯하여 에너지 소재, 자동차 기술력을 기반으로 글로벌 영향력을 되찾으려 하며, 미국은 기술안보 기조의 리쇼어링 정책을 추구하며 자국 중심의 산업 생태계를 재구축하기 위해 자국 기업을 지원하고 해외 기업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 등 전통적인 제조업 강자가 있는 EU는 러시아의 위협과 미국, 중국에 비해 뒤쳐지는 첨단 산업 기술 경쟁력, 에너지 안보 문제에 대한 위기가 고조되면서 역내 국가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 보조금을 대폭 늘리고 해외 업체들에 대한 견제를 이어가며 산업을 보호하려 한다. 인도나 동남아를 비롯한 신흥 시장은 거대한 인구와 지역적 특수성을 앞세워 첨단 산업 기반과 공급망을 확보하려 친기업 정책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각국은 기술을 협력의 대상보다는 안보의 대상으로 먼저 인지하기 시작했으며, 그만큼 경제안보에서 기술안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지고 있고, 자유무역보다 보호무역이 더 중요한 기치로 변하고 있다. 이렇게 경쟁 분위기가 다방면에서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한국은 그간 경제 성장을 이끌어 온 산업의 작동 방식과 혁신 엔진을 새로운 린치핀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 전략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 


전략 구성을 생각해 보기 위해 다시 반도체와 인공지능부터 시작해 보자. 앞서 1부에서는 이미 인공지능과 반도체 산업계에 여러 층위의 린치핀이 있음을 이야기했지만, 한국이 더 전략적으로 점유해야 하는 린치핀은 아직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첨단 패키징은 비단 인공지능 반도체뿐만 아니라, 앞으로 시장이 더욱 커질 주문형 첨단 시스템반도체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기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대만의 주요 기업들이 현재 이 시장을 절반 이상 점유하고 있으나, 첨단 패키징 기술은 더 높은 수준의 새로운 혁신을 요구한다. 이는 첨단 패키징을 매우 중요한 병목 지점으로 만들고 있다. 패키징에서 혁신이 필요한 까닭은 근본적으로 베이스 전극 기판의 패턴 스케일과 칩의 트랜지스터 스케일 간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스케일 격차를 어떻게 좁힐 것이냐가 앞으로 더 중요해질 병목 지점이다. 여기에 더해 서로 다른 칩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하이브리드 본딩hybrid bonding이나 이종 접합heterogeneous integration 같은 기술 역시 중요한 병목 지점이 된다. 또한 근본적으로 고성능 시스템반도체는 많은 연산량을 고속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발열 성능 개선도 또 하나의 병목이 된다. 그렇지만 패키징에서 활용되는 방열 소재나 구조 혁신은 더디다. 한국의 반도체 전략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첨단 패키징 분야에서 부각되고 있는 다양한 기술 병목 지점에 진입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더욱 투자를 늘리고 산업의 표준을 이끌 수 있는 기술을 점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패키징 업체들이 회사 차원에서 연구개발하는 것과 더불어, 정부 차원에서도 새로운 기술을 테스트하고 신뢰성 있는 수준으로 보장할 수 있는 연구개발전용 팹을 신설하여 사업화 가능성과 현업으로의 활용성을 높이는 지원을 해 줄 필요가 있다. 또한 더 혁신적인 신소재를 발굴하고 더 효과적인 패키징 공정을 개발할 수 있는 공적 차원의 기초 연구개발 과제 투자와 인프라 업그레이드 같은 지원도 확대되어야 한다. 이는 대부분 기초과학과 연계되므로 기초 수준부터의 연구개발에 더 많은 그리고 더 장기간의 안목으로 자원이 투자되어야 한다. 


반도체 팹리스 역시 중요한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이는 비단 반도체나 인공지능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넓게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한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수많은 인공지능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들은 세계 최강의 린치핀으로 자리 잡은 엔비디아의 GPU와 경쟁할 수 있는 고성능 인공지능 반도체 개발에 집중하려 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중요해질 시스템반도체의 진짜 린치핀은 이미 엔비디아가 독점적으로 점유한 인공지능 가속기 시장에만 있지 않다. 각 산업의 혁신 엔진이 될 수 있는 도메인 지식에 특화되어 설계된 반도체가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질 수 있고, 그 시장에서 드러나는 병목 지점을 먼저 선점하는 것이 차세대 시스템반도체의 린치핀이 된다. 예를 들어 바이오산업이 대표적이다. 2024년의 노벨 화학상이 단백질 구조 설계에 특화된 딥러닝 모델인 알파폴드 alpha fold와 로제타폴드Rosetta fold에 수여된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 바이오산업 역시 바야흐로 인공지능에 기반한 비가역적인 기술 전환 과정에 들어섰다. 이는 비단 첨단 신약이나 백신, 치료나 진단용 의료기기 기술 개발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이른바 바이오인포매틱스Bioinformatics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유전체 정보 특화 인공지능에 최적화된 시스템반도체가 가질 연산 능력은 매우 중요해진다. 인간 게놈이 갖는 유전 정보량은 무려 3기가바이트에 달한다. 이러한 유전 정보를 수십, 수백만의 인구 단위로 실시간 처리하고 유전자 수준에서 질환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은 앞으로 점점 중요해진다. 이는 단지 급격한 고령화 국가로의 전환이 예정된 한국에게만 중요한 사안이 아니며, 저출생과 고령화 속도가 가속되는 대부분의 국가들에게도 중요하다. 유전체 분석이 개인별 맞춤형 의료로 연결될 경우, 불필요한 의료 자원 낭비를 예방하고 신약 개발 기간이 단축되며, 진단과 치료의 효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바이오와 연계되는 반도체 린치핀은 또 있다. 인간의 뇌는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복잡계 시스템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를 모방할 수 있는 뉴로모픽Neuromorphic 반도체나 브레인 커넥토믹스Connectomics 데이터 처리에 특화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전용 시스템반도체 역시 급성장하는 첨단 바이오산업에서 앞으로 더욱 중요한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치매나 알츠하이머 같은 뇌질환 치료 목적을 넘어, 인간 뇌기능 증강 기술과 직결되므로, 두 영역을 이을 수 있는 시스템반도체 개발 전략이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시스템반도체들은 엔비디아의 GPU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 해당 산업에서 다뤄지는 전문적 도메인 지식이 담긴 데이터 특성과 그 데이터에 특화된 효과적인 연산을 지원하는 반도체가 더 유리하다. 예를 들어 이러한 바이오칩 전문 팹리스들이 만드는 새로운 시스템반도체는 치매 환자의 뇌에 이식할 수 있는 인공 뉴로모픽 칩, 언어 장애를 도와줄 수 있는 신경신호 언어전환칩, 운동 능력이 마비된 환자의 뇌를 도와줄 수 있는 인공뇌 등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합성생물학이나 시스템생물학을 이용한 바이오반도체나 스마트 인공장기, 세상에 없던 인공 단백질을 이용한 항체 설계 등에 특화된 팹리스 반도체 업체들이 나온다면 이들은 각 도메인에서 엔비디아 같은 영향력을 보이는 팹리스들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반도체와 인공지능에 기반을 둔 타 산업으로의 린치핀이 나올 수 있으려면, 바로 이렇게 이종 간 영역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칩을 설계할 수 있는 팹리스 업체들이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팹리스들이 자신들이 설계한 칩을 테스트하여 수요 기업에게 공급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 역시 충분히 확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이러한 팹리스 업체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에 앞서, 기술력을 진보시킬 수 있는 인프라 개념으로 공공 R&D팹과 테스트 시스템을 구축하여 팹리스 업체들로 하여금 칩 시험 생산 접근성을 크게 개선시켜 주는 전략을 구상할 수 있다. 특히 공공 R&D팹은 아예 규모를 확대하여 일종의 공기업 개념인 KSMC(Korea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rporation)로 만드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벤치마킹은 다름 아닌 대만의 TSMC다. TSMC도 1987년 첫 시작은 대만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일종의 공기업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산업은 어떨까? 인구 감소세에 접어든 한국이 앞으로도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영향력을 보존하기 위한 필수 전략 중 하나는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을 수준의 자동화 기술이다. 이는 현재 많이 회자되는 인공지능과 로봇 등으로 구성되는 스마트공장에서의 일부 노동력 대체 개념을 넘어, 시스템 레벨에서 통합될 수 있는 훨씬 더 구체적인 개념의 자동화 시스템 기술에 해당한다. 한국에서 그간 노동집약적으로 작동해 왔던 대부분의 산업은 이러한 전환을 받아들여야 그 다음 세대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이미 한국의 조선업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밀도로 산업용 로봇을 도입하여 활용하고 있는 산업이 되었고, 자동차 조립 역시 점차 대부분의 작업을 로봇이 담당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많은 기존 제조업에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적용되기 어려운 분야가 많이 있다.  어떤 제조업이 앞으로도 한국에 있어 중요하다면 그러한 산업의 자동화 전환 과정을 추진하며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기술을 린치핀으로 삼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앞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 더욱 중요한 핵심 기술이 될 수 있다. 중국은 현재 한국이 그간 강점을 가져온 대부분의 제조업에서 한국과 비슷한 전략을 취하면서도 규모는 훨씬 크게 확장하면서 고속 성장을 해 왔다. 그렇지만 그러한 고속 성장 이면에는 저임금 노동력을 대량으로 투입하여 양적 성장을 추구해 온 전략이 있다. 이러한 전략은 중진국 수준에 도달한 중국에서는 향후 점차 높아지는 노동자 임금 감당이 점점 어려워지므로 지속을 담보하기 어렵다. 또한 중국 입장에서는 수억 명의 노동자를 투입해야 하는 제조업을 쉽게 자동화로 전환하기도 어렵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자동화로 인한 급격한 일자리 감소는 사회불안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미 중진국 함정에서 탈피하면서 빠른 속도로 제조업의 첨단 전환을 이루어내고 있기에 중국에 비해 이러한 노동 구조 전환의 충격이 덜하다. 오히려 제조업 자동화 과정에 필요한 기술이 새롭게 창출하는 산업에 필요한 노동 시장을 먼저 개발하고 그 기술에 숙련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이러한 경쟁력을 창출할 수 있는 제조업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정밀화학, 제약, 촉매 같은 첨단 신소재 기반 고부가가치 산업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파운데이션 AI 같은 알고리즘은 복잡한 최적화 문제 해결에 매우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이산화탄소를 고부가가치 탄소화합물로 전환하는 전기화학 촉매는 구리나 철 같은 단일 금속보다 여러 금속이 미세하게 엮여 합금이 된 나노 스케일의 구조물이 더 효율적인데, 인공지능을 활용할 경우 이러한 촉매 설계가 훨씬 더 정확하고 빠른 시간에 최적화된다. 왜냐하면 가능한 조합 중 최적의 솔루션을 찾는 문제는 딥러닝을 기반으로한 강화학습이 강점을 갖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렇게 설계된 촉매를 실제로 실험실에서 합성하는 것 역시 표준화된 랩 프로토콜이 이식된 인공지능 자율 작동 산업 로봇을 이용하여 365일 24시간 작동 가능한 시스템을 통해 안정적으로 달성 가능하다. 특히 로봇을 통한 제조이기 때문에, 생산품의 오차가 훨씬 줄어들고, 따라서 품질 관리 경쟁력도 강화된다. 이러한 고부가가치 신소재 산업은 기존의 제조업처럼 대규모 생산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중국과의 1:1 양산 경쟁, 원가 경쟁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다품종 소량 생산만으로도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린치핀으로 변신할 제조업에서 반드시 들여다보아야 할 산업은 바로 이러한 인공지능+로봇으로 빠르게 전환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신소재 산업이다. 


한국이 가진 중요한 산업 중 하나는 방위산업이다. 특히 세계 곳곳의 지역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현재의 국제 정세 속에서 군축의 시대는 끝이 보이고 있고, 대신 각국은 안보와 첨단 무기 개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냉전의 산물이라고만 여겨졌던 군비 경쟁을 다시 시작하고 위기 상황 시 상대를 먼저 압도할 수 있는 첨단 무기와 방위 시스템 개발에 대한 투자가 대폭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방위력 개선을 위해 필요한 산업은 중화학공업과 기계공업, 자동차 산업, 화학 산업, 에너지 산업, 반도체 산업과 전자공업 등이다. 이러한 산업이 고루 잘 발달해 있고, 여기에 인공지능과의 결합을 시도하여 한 층 더 효율적이고 경쟁적 수준에서 산업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산업 국가는 한국,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정도로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미국은 이러한 소수의 그룹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반도체와 철강, 화학 산업을 비롯하여, 수많은 제조업을 자국에서 동아시아 지역 등으로 지속적으로 이전해 왔는데, 그 이면에는 주로 자국에서 치솟은 제조업 일자리의 고임금 문제를 피하려는 자본의 이동이 있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최근 신형 군함 건조나 심지어는 6세대 전투기 개발 등이 지체되고 있고, 이는 미국의 장기적 안보 체제에 허점을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트럼프가 47대 미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과 처음 나눈 통화에서 다른 산업도 아닌 한국의 조선업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다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닌 것이다. 전 세계에서 현재 중국을 제외하면 대규모 고기능성 선박을 제조할 수 있는 기반과 기술 경쟁력이 남아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이 차지하는 글로벌 조선업 비중은 매년 축소되어 현재는 10% 이하로 줄어든 상황이다. 이러한 방위산업 역시 기본적인 제조업 역량의 강화와 더불어, 얼마나 첨단 기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느냐에 의해 그 산업의 린치핀이 결정된다. 한국의 방위산업은 북한을 마주하고 있다는 안보적 특수성 외에도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이 다양한 테스트에 적합한 플랫폼이 된다는 고유 특성으로 인해, 다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안보 자산을 고품질로 생산하여 공급하는 것에 강점을 가질 수 있다. 방위산업은 한국 입장에서도 국가 안보의 필수 요소일 뿐만 아니라, 점차 안보적 긴장도가 높아지는 각국의 상황에서는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는 유럽에서는 자국의 방위산업 기반이 약한 나라들이 한국으로부터 무기를 다량 도입하며 방위산업 의존도가 증가하는 것이 관측된다. 한국의 방위산업은 이제 단순히 민주주의의 병기창 포지션을 넘어, 차세대 방위산업 기술의 모태가 될 수 있는 혁신 포지션을 점유해야 한다. 특히 점차 무인화되고 있는 육상, 해상, 공중 전력과 시스템은 반도체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지능화 시스템과의 결합을 더욱 긴밀히 요구하며, 이는 한국이 가진 IT 산업과 반도체산업, 그리고 인공지능과의 연계를 통해 강화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린치핀이 될 수 있다.


한국이 산업의 린치핀 전략을 재구상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산업에는 에너지 산업도 있다. 반도체 팹이나 AI 데이터센터 같은 대규모 전력 소모 산업은 물론, 한국이 현재 계속 가져가려는 제철, 자동차, 중화학, 조건 등 제조업 대부분은 대규모 전력의 안정적 공급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전력 공급은 비단 기저 발전원의 확충뿐만 아니라, 전력의 효율적인 적시 공급을 위한 시스템, 즉, 그리드Grid의 선진화를 필요로 한다. 한국은 세계적인 전력 공학 강국이나, 현재 한국이 확충한 그리드와 발전원은 10-20년 후 한국에서 예상되는 전력 수요 증가분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과는 안타깝게도 거리가 멀다. 특히 발전원의 경우 앞으로 지속적으로 탈탄소 전원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상황이므로, 예전처럼 LNG 발전 같은 화력발전 비중은 제한되고, 그만큼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지는 경제 환경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문제는 신재생에너지 본연의 간헐성과 이를 보강하기 위한 추가로 필요한 대용량에너지저장시스템ESS 등의 기반 시설 확충이 충분히 빠르게 진척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재생에너지 발전 단지에서 실제 전력 소모가 집중되는 지역으로의 송배전 역시 충분한 그리드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 제조업에 필요한 안정적 전력 공급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한국이 현재 보유한 다양한 산업의 경쟁력을 한국 안에서 보존하며 린치핀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인프라에서의 안전핀이 반드시 강화되어야 한다. 태양전지 효율 강화나 수소에너지 생산 효율 강화 같은 기본적인 신재생에너지 시스템용 소재와 소자 성능 강화 기술은 물론, 스마트그리드 설계와 최적화를 그러한 예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대규모 생산에 특화될 수 있는 기술로의 전환을 위해 산업계와 정부가 보다 더 구체적이고 경제성 평가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로드맵을 개정하며 국가전력계획과 정합성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인프라 구축이 추진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고려한 전력계획 수립 과정에서 고려될 비탄소 배출 기저 전원으로서의 원자력 발전은 한국이 반드시 보존해야 하는 에너지 린치핀이다. 왜냐하면 현재 민주주의를 채택한 선진국 그룹에서 원자력 발전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기술과 폐기물 처리 노하우까지 동시에 갖춘 나라는 한국, 프랑스 정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는 한국이 그간 추구해 온 APR1400 같은 한국형 경수로 외에도, 효율성과 안정성을 확보한 소형모듈러원자로SMR 같은 차세대 원자로로 대표되는 기술적 전환기를 앞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원자력 발전 산업이 지속적인 린치핀을 가지려면 향후 대규모 기저전원을 필요로 하는 국내의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및 제조업뿐만 아니라, 해외 기업들과 국가의 산업 전략에 대해서도 에너지 공급자로서의 영향력까지 고려한 전략이 필요하다. 원자력 산업은 비단 기저 전력원으로서의 중요성과 제조업에 대한 린치핀 인프라으로 갖는 의미 외에도, 치료 혹은 양자컴퓨터 용 방사성 동위원소의 안정적 생산, 핵물질과 폐기물 재처리 기술, 그리고 장차 에너지 독립국가가 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인 핵융합발전으로 연계되는 산업 기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이 반드시 장기적 안목으로 지속적으로 지켜나가야 하는 에너지 린치핀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산업의 린치핀 전략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구상하려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상황은 이제 거의 비가역적 현실이 된 기후위기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계속 오르는 것을 막기 어렵고, 원자력 발전이나 신재생에너지로의 적극적 전환을 통해 탄소 배출을 최소화한다고 해도 이미 대기 중에 너무 많이 늘어난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의 농도를 대폭적으로 줄이려면 매우 오랜 시간과 집중적인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후위기는 이번 세기 내내 가장 대응하기 쉽지 않은 비가역적 변동성이 될 것이다. 지구 기후위기는 단순히 평균 기온 상승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간 우리가 익숙했던 계절과 해류의 순환, 강수량과 일조량 주기 등 모든 익숙한 장단기 기상 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점점 예측하기 어려워지며, 기후와 날씨의 변동은 증폭된다. 이는 대형 태풍 같은 기후재난이나 더 심하면 해류 변화 같은 기후재앙 발생 빈도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임을 의미한다. 기후재난에 취약한 산업은 기후위기가 증폭되면서 앞으로 점차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다. 한국이 기후재난을 버틸 수 있는 산업을 재정비할 수 있다면 이는 산업 경쟁력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는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병목 지점을 선점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첨단 바이오 기술을 활용하여 기후재난에도 더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식량자원 등을 개발할 수 있는 기술, 큰 폭의 기온, 강수량, 풍속과 풍향 등에도 능동 대처하며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전력망이나 도로, 항만 등의 사회 인프라 품질 개선 기술,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면서 에너지 효율을 극도로 높일 수 있는 제조 공정 기술 등은 기후위기 속에서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며 더욱 그 가치가 높아질 린치핀 기술이자 산업이 될 수 있다. 특히 한국이 아직 글로벌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는 전통적인 석유화학, 정밀화학 산업은 중국과 정면으로 1:1로 양산 규모와 원가 경쟁력을 놓고 경쟁할 필요 없이, 이산화탄소 전환CCUS 산업으로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기후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산업으로 변신할 경로를 선제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석유화학단지의 복잡한 공정은 투입되는 재료를 석유가 아닌 이산화탄소와 아민amine 같은 유기물로 바꿀 경우, 대부분의 장치를 있는 그대로 활용하며 고품질 탄소화합물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탄소화합물은 연료가 아닌, 플라스틱 재료 등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산화탄소를 고정하는 역할을 하며 탄소 배출을 훨씬 줄일 수 있다. 고급 촉매 기술이 개발될 경우, 플라스틱 원료 생산을 넘어 탄소가 8개 이상 붙어 있는 탄소화합물도 제조할 수 있는데, 이는 항공기의 핵심 연료가 될 수 있다. 반도체 제조업은 대규모 전력 소모를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탄소 배출 전원으로의 100% 전환을 누가 먼저 달성하는지, 기후재난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반도체 팹의 지속가능한 기술을 누가 먼저 선점할 수 있는지, 분산된 팹을 통해 생산되는 칩을 최대한 한 곳에서 몰아서 일괄 생산할 수 있는 유기적 네트워크 팹을 누가 먼저 구축할 수 있는지 등이 주요 관건이 될 것이다. 통신망 역시 기후변동에 취약한 인프라인데, 한국이 가진 5G 이후의 차세대 통신 산업에서 추구할 린치핀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기후위기 대응 가능한 안정적 통신망이다. 


위에서 알아본 다양한 산업들은 한국이 이미 글로벌 수준에서 경쟁력을 가진 산업이나 동시에 조만간 위기에 봉착하게 될 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행히 한국이 추진하게 될 전략, 특히 첨단 산업과 제조업을 결합하여 산업의 판도를 다시 짜면서 린치핀으로 만들 수 있는 전략은 다른 경쟁국들이 답습하기는 어렵다. 중국은 거대한 내수 시장으로 인해 수출보다는 여전히 내수가 국가 경제에 더 중요하고,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과도한 생산으로 쌓인 잉여 자원은 수출을 위한 경쟁력이 아니라, 원가 이하의 밀어내기로 인한 수익성 악화와 디플레이션의 기제가 될 것이다. 일본은 제조업 기반이 여전히 강하지만 한국보다 10년 이상 먼저 쇠락 기조를 맞은 후 다음 단계, 즉, 첨단 산업으로의 전환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에 조금씩 축소 사회로 변모하는 중이다. 1인당 GDP 10만 달러를 눈앞에 둔 미국은 너무 높아진 근로자들의 평균 임금으로 인해 반도체 산업을 포함하여 제조업을 자국으로 전부 리쇼어링 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그 부족분을 대체하기 위한 혁신의 엔진을 하이테크와 인공지능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에너지와 안보의 위기, 그리고 제조업의 쇠락을 겪고 있는 EU는 지정학적 불안정성과 역내 국가간 경제력 격차, 에너지 안보 위기와 첨단 산업으로의 전환 시점을 수차례 실기 같은 원인이 겹쳐 아시아권의 제조업이나 첨단 산업과 경쟁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인도나 동남아 등의 신흥 시장은 높은 경제 성장률과 거대한 배후 인구 규모가 강점이 되지만 언어와 문화 장벽으로 인해 통일된 경제 정책을 추구하기 어렵고, 기본적인 제조업 기술 기반과 생태계가 약하며, 사회 인프라 확충이 더디고, 제대로 훈련받은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한국이 가진 모든 글로벌 수준의 산업이 10, 20년 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는 없지만, 결국 한국은 지난 70여 년 간 겪어 왔던 산업 지형 변화의 파고를 앞으로도 계속 겪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알아본 변신의 방법을 꾸준히 시도하며 돌다리를 두드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각 산업에서의 린치핀을 먼저 발견하고, 인공지능으로 인해 근본적인 산업 린치핀의 정의가 바뀌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며, 전략적으로 국가의 자원을 적시에 투자하고, 기초 지식과 첨단 혁신의 성과를 관리하면서 중장기적인 산업 정책 계획을 계속 업데이트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이라는 배는 앞으로 인공지능이 가져올 거대한 산업 전체의 변화, 기후위기에 의해 예견된 기후재앙, 중국이라는 거대한 경쟁상대가 잠식해 오는 제조업 지형, 첨단 기술을 놓고 벌이는 각국의 기술안보 경쟁과 전략적 합종연횡, 그리고 인구감소 기조라는 크고 작은 파고를 정면에서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파도들은 한국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나라가 겪을 수밖에 없는 폭풍 같은 위기로 변하겠지만, 결국 위기 속에서 살아남는 국가는 그 안에서 파도를 타며 오히려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찾는 국가가 될 것이다. 다행히 한국은 그간 만들어 둔 힘좋은 엔진과 정밀한 방향타와 노하우가 쌓인 해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이 벌어 준 시간을 이용하여 더 강한 엔진을 만들고 더 정확한 해도와 더 긴밀하게 작동하는 방향타를 만들어 정면으로 부딪혀 오는 파도를 타며 넘어갈 수 있는지 여부가 한국이 이번 세기 동안 린치핀으로 살아남아 영향력을 갖는 나라가 될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축약버전의 기고문 링크: https://www.mk.co.kr/news/economy/11192031?fbclid=IwY2xjawHG99VleHRuA2FlbQIxMAABHW16XtyELubo3Et_eaRDwZuT-rFTi94znhO6MJI9wOvhQXcxIKkHuN74zg_aem_ZmFrZWR1bW15MTZieXRl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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