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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산업정책 지속가능성

중국식 모델은 성공할 것인가?

by 권석준 Seok Joon Kwon

최근 같은 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이자, 존경하는 윤비 교수님께서 최근, 중국의 Top-down 식 산업정책에 의거한 중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 속도, 그리고 기술 굴기에 대해 한국이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나머지, 중국식 모델로의 회귀를 생각하는 위정자들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하시며 쓰신 페북 글을 보았다. 나 자신도 그러한 뉘앙스의 글을 최근 들어 다소 빈번하게 쓰고 있고, 한국에서 이공계 분야에 종사하는 교수나 연구자들은 이미 그러한 현상을 연구에서나 학회에서나 피부로 와닿게 느끼고 있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조만간 탈고할 '차바라(차이나반도체라이징)'에서 말미에 쓰려고 했던 글을, 아직 다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염려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미리 써 본다(당연히 피드백 환영합니다.).


과연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의 이른바 'Top-down 식 산업정책'은 결국 중국 공산당 정부의 계획대로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근본적인 구조적 함정으로 인해 그 지속가능성에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될까? 이 문제는 비단 중국만의 문제도 아니고, 글로벌 스케일의 문제이며, 따라서 당연히 한국의 향후 산업경제 정책은 물론,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과도 직결된 문제이므로 여러 전문가들의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중국의 첨단 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산업정책의 특성,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산업정책에 어떠한 시사점을 주는지를 주로 생각해 보려 한다.


중국은 당연히 Top-down 식 국가주도산업정책을 처음으로 펼친 나라가 아니다. 산업사를 배울 때 자주 배우는 대표적 모델은 중국도 아니고 소련도 아닌 프랑스다. 루이 14세 시절, 당시로 치면 산업부 장관에 해당한 고위 관료였던 콜베르는 1664년부터 1683년까지 약 20여 년 간 국가 주도의 제조업 육성 정책을 펼쳤다. 당시로서는 첨단 산업에 해당하는 직물, 유리, 도자기, 그리고 대포나 군함 같은 군수산업에서 프랑스 제조업체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하고 정부 차원에서의 지도력을 강력하게 행사했다. 콜베르가 자주 활용한 수단은 표준이었다. 상품을 만들 때 규격과 품질의 기준을 통일했고, 불량품에 대해서는 벌금을 넘어, 회사 소유주들에게 형사 처벌까지 가할 정도로 강력한 규제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의 이러한 첨단 산업은 프랑스가 주요 유럽의 경쟁국에 비해 다소 기술 수준이 뒤떨어진 상황이었다 보니, 콜베르는 외국 인재 유치에도 열을 올렸다. 특히 유리 가공 기술에서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네덜란드(지금도 네덜란드의 유리 기술은 뛰어남), 군수와 직조에서는 영국, 역시 유리와 직조 등에서는 이탈리아 등에서 엔지니어(장인)를 초빙해 왔다. 콜베르는 제조업 육성 정책을 내수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의 만성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선박과 항로 운영의 전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국영 상선대를 운영했고, 이는 프랑스의 산업 경쟁력을 한 단계 올리는 것에 일조하긴 했다. 그렇지만 20여 년 간의 강력한 국가 주도산업정책에도 한계는 있었다. 프랑스 왕가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국가 재정은 늘 충분하지 않았고, 여기에 끊임없는 전쟁 수행으로 국가 재정은 더더욱 날로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국가가 표준을 독점하다 보니, 기업들은 새로운 제품 개발에 위축되었고, 미리 정해진 품질 기준만 간신히 맞추는 방식으로 처벌만 피하고 보자라는 관행마저 생겨났다. 즉, 민간 산업이 보수적 운영으로 고착되면서 콜베르가 원하던 혁신은 오히려 퇴보하였다. 이는 장기적으로는 프랑스의 경제 활력을 저하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산업정책이 부작용을 낳은 대표적 사례인 셈이다.


조금 더 시간을 근대로 앞당기면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메이지 유신 초기(1870-1900), 일본은 철강, 조선, 전신, 철도, 군수 산업에 매진하였고, 서구 제국들과의 경제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 일본 정부는 주도적으로 이 산업에 대하여 공격적인 산업육성 정책 카드를 들고 나왔다. 메이지 정부가 계획했던 메커니즘은 정부가 국영으로 제철소, 조선소, 전신국을 먼저 설립하고, 이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이와쿠라 사절단 등을 파견하면서 서구의 기술을 흡수하며, 고도로 훈련받은 관료들이 각 산업별 로드맵을 설정하고, 각 단계마다 정부의 보조금을 제공하는 동시에, 내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 보호 등의 정책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특히 19세기-20세기 초반 제국주의 경쟁 심화 기조 속에서 전쟁 수행력을 증강하기 위해 야마가타나 야스다 등 핵심 입지에 중화학공업 육성에 집중 투자했는데, 덕분에 불과 약 30년 만에 일본은 아시아 최강의 군산복합 산업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에서 필요로 했던 자원 수급이 생각보다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국내에서 주로 수급하던 철광석, 석탄 같은 자원이 너무 빠른 속도의 산업 확장으로 인해 이른 시점에 고갈되자, 조선, 동남아, 만주 등 외부로 자원 수급 루트를 침탈 전쟁을 통해 개척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개척은 제국주의의 본성인 무력을 동반하는 방식이었다. 메이지 정부가 보조금을 주면서 키운 기업들은 1890년대 들어 미쓰비시, 미쓰이, 야마구치 등 소수의 재벌에게 매각되는 방식으로 산업 운영이 민간으로 이전되며 민간 자본이 축적되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관료-재발 간 유착이 심화되었다. 당시 일본의 중화학공업 기반은 대부분 이러한 유착 관계로 이어진 재벌 위주로 짜이다 보니, 중소기업의 자생이 어려웠고, 따라서 혁신의 기반이 자생하기는 어려웠다. 이 역시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이 어떠한 종류의 부작용을 발생시키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Top-down 방식의 산업정책으로서 대표적 사례 중에는 당연히 냉전 시기 소련도 포함된다. 그런데 사실 냉전 시대의 소련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이 알려진 반면, 소련의 계획경제 구조는 냉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덜 알려져 있다. 소련은 이미 1-2차 대전 전간기부터 5개년 계획을 꾸준히 정부 주도로 수립하며 1928-1941년 약 14년 기간 동안 메이지 일본과 비슷하게 중화학공업 위주의 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소련의 1930년대 산업 성장률은 무려 연평균 12-13%에 육박했으며, 제철, 기계 공장 설비가 동기간 3배로 증강하면서, 탱크, 전투기 등 군수 물량 생산력은 세계 2위권으로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2차 대전 동안 독소전이라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을 수행한 소련 입장에서 미국의 랜드리스 계획이 없었다면 소련은 결국 패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시기의 소련 중공업 증강 정책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랜드리스 계획이 채 입안되기도 전에 소련은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소련 정부는 국가계획위원회(Gosplan)를 설립하여 분기 별로, 연간 할당 목표를 점검했으며, 각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강제동원하는 방식으로 배분하는 계획도 실행하였다. 그렇지만 소련이 당시에 펼친 산업정책은 지나치게 중공업 위주의 정책이다 보니, 오히려 소비재나 경공업 분야의 발전은 더뎠다(이러한 경향은 냉전 시기 소련의 산업정책으로도 이어졌다). 특히 공산주의 시스템 하에서 정부 정책이 입안되고 추진되다 보니, 중앙집권 경향은 더욱 고착되어 정보 병목 현상이 만연했으며, 현장 문제 해결을 위한 피드백 순환은 매우 비효율적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민간이 주도한 이른바 'bottom-up 산업 정책'을 취한 나라들의 운명은 꼭 좋은 결과로만 이어졌을까? 부작용이 없었을까? 대표적으로 영국이 그러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영국은 1760-1840년 사이 산업혁명 시기에도 정부 주도로 산업 정책이 시행되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이 채용한 방식은 규제가 아닌, 혁신을 유도하는 메커니즘이었다. 영국 정부는 1624년 이후 특허 제도를 강화하여 발명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발명자들이 혁신을 통해 부를 쌓는 과정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특히 발명자들이 개발한 기술이 상업화되도록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 제도도 업그레이드했는데, 이는 현재의 VC와 원리상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 조달 과정이 용이해지니, 주식회사 등의 형태로 기업이 설립되는 것이 자유로워졌고, 특히 대규모 자본이 필요했던 공장 설립, 기계류의 설비 구입에서도 자본이 효과적으로 순환할 수 있었다는 점은 영국의 민간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1774년에는 인도 면제품 개방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자유무역을 보장하고, 해외 시장으로 영국 회사들의 제품이 진출할 수 있는 루트를 열어주었으며, 이는 곧 영국의 경제 규모가 브리튼 섬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하는 규모의 경제 메커니즘으로 탈바꿈하는데 일조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영국의 기업들의 명멸하였으며, 소기업들이 퇴출되었으며, 노동력의 집중을 요하는 산업의 융성으로 인해 도시과밀화가 진행되었고, 빈민 문제와 환경오염 문제가 심화되었다는 문제가 생겼다.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미국 역시 대표적인 민간자본주의 위주의 혁신 정책을 펼친 나라다. 실리콘밸리는 1957년 캘리포니아 주에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처음 설립된 이후, 1990년대까지 주요 대학에서 스핀오프된 수많은 스타트업들의 창업 활성화, 기술이전을 장려하는 연구개발 문화, VC의 활발한 투자가 선순환구조를 이루면서 연평균 20%씩 고성장할 수 있었다. 미 정부가 이에 관여한 부분은 크지 않았다. 다만 주요한 기술 개발의 길목마다 정부의 R&D 투자가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ARPA 같은 정부 기관은 인터넷의 기초를 이루는 기술 개발에 가장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리콘밸리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학교-스타트업-VC가 밀접한 생태계를 이룬 시스템의 자생적 활성화였다. 특히 창고에서 창업한다는 벤처 문화가 일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교수는 물론, 학생들의 창업이 빈번했고, 그중 상당수는 사라졌지만 살아남은 기업들은 현재의 미국 IT를 이끄는 대기업들이 되었다. 물론 민간이 주도하는 혁신 경제이다 보니 투자가 과열되고, 닷컴버블이나 엘리자베스 홈스 같은 기술 사기 사건이 발생하며 거품의 형성과 붕괴가 반복하는 일들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실리콘밸리가 지금까지 미국의 주요 혁신 엔진으로써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정부의 개입이 최소화된 상황에서, 전 세계로부터 가장 혁신적인 인재들이 몰려들 수 있는 유학-이민 제도가 유연했고, 자금 조달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면서, 가장 최전선에서 연구되는 첨단 기술들이 쉽게 상업화 테스트를 받을 수 있는 연구개발 시설이 밀집되었던 클러스터 시스템들이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국의 여러 역사적 산업정책 사례를 생각해 보면, 국가 주도의 Top-down 산업정책은 너무 강력해도 안 되고, 너무 없어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op-down 방식은 어떤 나라가 어떤 첨단 산업으로 진입하려는 시기에, 그 시기 선두 그룹과의 큰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도로 훈련된 똑똑한 관료 조직이 필요하고, 내부에서 인력 교육-훈련 시스템이 성립해야 하며, 부족한 기술이나 자본은 해외에서 도입이 가능한 법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하고, 국가가 거대한 자본을 조달하여 요소요소에 투입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필요하다. 또한 정책이 시행된다고 해도, 단기적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주기적으로(예를 들어 5년 단위로) 경제 계획을 업데이트하면서 국정 과제로 설정된 프로젝트들의 성과 관리를 할 수 있는 관리 체제가 필요하며, 민간에서 충분히 산업이 성숙되기 전에는 민간의 활동을 제한할 수도 있는(자원의 낭비를 막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법 제도 강화가 필요하다.


특히 마지막 부분, 즉, 민간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이나 경제 활동을 제어하기 위해 정부가 깊숙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부분은 많은 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사실 정부가 이를 핑계로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시민의 재산권을 침해하며, 부정부패 구조가 성립하는 것은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한국도 농업 위주의 후진국에서 탈출하기 위해 중화학공업 육성책을 강력하게 펼치면서 환경이나 노동자의 인권, 국민의 재산권 등이 침해당한 케이스는 수도 없이 많으며, 메이지 일본 정부 시절과 비슷하게 정부가 육성한 산업이 민간으로 이양되면서 정부-재벌의 정경유착이 동반된 부정부패 구조가 생겨난 것을 기억해 보자. 비록 산업 개발 초기에 정부의 역할이 지대할 수밖에 없고,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당분간 자본주의에 관여할 수밖에 없다는 필요성은 인정되나, 그것이 단기적 처방으로 그치지 않고 경제의 펀더멘덜에 고착화되는 것은 그 나라 경제 시스템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도 유연성의 부족, 즉, 법-재산권 보호가 경직됨으로 인해 장기적 역동성은 무조건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Top-down 방식의 정부 주도 산업정책, 경제개발 정책은 필히 관료가 입안하고 집행하는 정책의 프로세스가 법적으로 보장받고, driving force가 모든 영역에 우선하여 override 할 수 있음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중앙집권적 권력 통제에 따라 품질이나 표준에 대한 권한 행사는 물론, 정보와 돈의 흐름도 정부가 통제하는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는 구조가 생겨날 수 있다. 즉, 정부는 정보와 자본, 그리고 법적 권한은 물론, 사업의 허가나 규제, 심지어 회사의 해체를 포함한 다양한 수단을 독점하면서 민간에서 자생할 수 있는 혁신의 주도적 성장에 점차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맹점이 정부 주도의 Top-down 산업정책의 위험성이라고 국내외 주요 사회학자들,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는 지점이며, 이러한 지적은 당연히 실증 데이터로 얼마든지 지지되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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