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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Oct 25. 2021

이름과 필연

물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

(아래는 철학자이자 철도 연구자 전현우 선생과 나눈 필담.)

전현우 선생님의 질문: 여기서는 물과 관련해서 실제로 물리화학자들의 직관을 듣고 싶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서 크립키는, 과학의 목적은 물에 대해 무엇이 필연적인 것인지 밝혀내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나은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필연적인 진술의 사례는 "물은 H2O다"와 같이 어떤 물질 명사와 그 미시 구조 사이의 동일성 문장입니다. 또한 여기서 필연적 진술이란, 물에 대해 어떠한 경우에도 참인 진술을 말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물의 표층적 속성은 어떤 경우에는 물에 귀속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연적인 속성들로 평가가 됩니다. 크립키 식의 모형 속에서는, 과학은 표층적 속성이라는 우연한 속성에 대한 지식에서 출발해, 미시 구조라는 본질적 속성(즉 물이라면 꼭 가지고 있어 물을 물로 만들어 주게 될 속성)에 도달하는 과정이 되는 셈입니다.


여하간 질문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정말로 물리화학자들의 작업을 이와 유사한 종류의 필연성과 우연성을 활용해 기술할 수 있을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물은 H2O다"라는 문장(또는 이와 연관된 여러 미시 구조 서술들의 다발)은 필연적으로 참이고, "물은 이러저러한 조건 하에서 끓는다", "물은 투명하다"와 같이 관찰 가능한 표층적 속성을 나타내는 문장보다 더 중요한 의미에서 물을 물로 만들어주는 속성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물리 화학을 잘 모르는 철학자의 착오가 있는 것일까요?


ps. 제가 제대로 질문을 했는지는 적고 있는 지금도 헷갈리는데, 혹시라도 시간이 있으시면 크립키의 책 3장을 간단히 읽고 말씀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 의견: 일단, 저는 전현우 님을 비롯하여 다른 (과학) 철학자분들만큼 과학 철학, 의미론, 인식론, 인지과학 등에 대해 깊게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 의견은 그냥 물을 비롯한 각종 화학물질을 과학자의 관점과 위치에서 훈련받은 일개 과학자의 생각 정도라고 부담 없이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우 님의 질문은 일단 한 번에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표층적 의미나 속성, 그리고 미시 구조라는 본질적 속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몇 번을 곱씹고 나서야 대략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그 의미 관계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제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현우 님의 발제에 대한 답을 남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을 일단 예로 드셨으니, 물에 대해 그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물은 수소 원자 (H) 두 개와 산소 원자 (O) 한 개가 결합한 분자, H2O를 일컫는 말입니다. 수소 원자보다 산소 원자가 전자를 더 좋아하므로 (물리 화학적 용어로는, 전기 음성도 (electro-negativity)가 높다고 표현합니다.), 사실 결합은 H+ 이온 두 개와 O2- 이온 한 개가 결합한 꼴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전자가 산소 쪽으로 좀 더 쏠린 것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이때,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양자역학적 원리에 따라, H2O 분자 한 개는 평평한 막대기처럼 형성되지 않고, 각도가 104.45 도로 둔각을 이루며 형성됩니다. 또한, 수소 원자-산소 원자 간의 거리는 95.84 pm (9.584*10^11 m)를 이룹니다. 이러한 거리나 각도는 '우연히' 생성된 숫자가 아니라, 산소 원자이고 수소 원자이기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숫자들입니다. 즉, 수소 및 산소 원자의 원자핵 potential과 전자 구조를 알고 있다면, 이들에 대한 파동 방정식을 양자역학의 원리에 따라 계산하면 튀어나오는 숫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때, 이런 숫자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숫자라는 것을 너무 확대 해석하면 안 됩니다. 즉, 물 분자가 104.45도의 각도를 이루며 95.84 pm의 수소-산소 원자 간 거리를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운명'이라고 뭉뚱그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애초, 산소의 전자 구조와 수소의 전자 구조는 원소 주기율표에서 부여된 전자의 숫자, 양성자의 숫자, 중성자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그 숫자들은 애초 그러한 숫자를 갖는 원소를 산소나 수소로 부르기로 했기 때문에 부여된 것이지, 산소나 수소이기 때문에 하필이면 그런 숫자를 부여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리 화학적 관점에서 물 분자 같은 화학 물질의 개별 분자를 이해하면, 분자 수준에서의 각종 물리 화학적 특성을 예측하거나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 분자를 이루는 산소-수소의 결합은 위에서 95.84 pm의 bond-length를 갖는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실 이 길이는 고정된 값이 아닙니다. 수소-산소 원자 간 결합은 계속 진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값은 그냥 진동 중에 있는 결합 길이의 평균값일 뿐입니다. 이 진동은 특정한 방법과 주파수에 따라 진동합니다. 첨부한 gif 파일을 보시면 더 자세하게 이해하실 수 있을 텐데, stretching 혹은 bending 같은 움직임이 계속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이러한 진동 운동이 정해집니다. 이러한 진동 움직임과 주기 역시 원칙적으로는 수소와 산소 원자로 이루어진 물 분자를 개별 분자 단위에서 이해하는 양자화학 (quantum chemistry) 관점에서 접근하면 전부 계산할 수 있습니다.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의 전조쯤 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외부에서 일정한 주파수를 갖는 전자기파를 물에 쐬어주면 어떤 파장 대역에서 흡광도 (absorption coefficient)가 가장 세게 나올 것인지 등에 대한 물리 화학적 특성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물 분자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분자는 혼자 있을 때보다, 같이 있을 때, 그리고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질 때 (주로 우리는 그러한 어마어마한 숫자를 아보가드로 수 (Avogadro's number = 6.022 * 10^23 = N_A)를 이용하여 표현하곤 합니다. 물 분자가 N_A 만큼 모여 있을 때, 우리는 물 분자가 1 mole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 봐야, 물 1 mole은 질량으로 따지면, 18 g 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상온 상압에서는 18 ml 수준의 부피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는 사실 매일 마시는 요구르트 한 병만큼도 안 되는 양이죠. 그렇지만, 그 안에는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숫자만큼의 물 분자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 분자가 어마어마 어마 하게 많이 모이면,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흔히 물에 대해 느끼거나 측정하는 특성들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액체 상태의 물이 끓는점, 어는점, 초임계 유체가 되는 점, 물의 표면 장력, 물의 비열, 물의 색깔, 물의 반사도, 물의 굴절률, 물의 전도도, 물의 저항 같이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물리 화학적 특성은 대부분 물 분자 개별 단위가 아니라, 물 분자가 아주 충분한 수가 모였을 때 측정되는 값입니다.


3. 그렇다면, 물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과 물을 1 mole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일까요? 제 전공이 계산과학이니, 계산과학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사실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금물입니다. 1개의 물 분자는, 1 mole의 물에서도 여전히 H2O의 고유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즉, 같은 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계산과학 관점에서 다르다고 이야기한 까닭은, 그저 1개의 물 분자는 계산 양자화학적 방법으로 (ab initio calculation 이라고도 합니다) 계산하기도 쉽고 거의 정확한 반면, 1 mole은 고사하고, 수 만개, 수 천 개의 물 분자가 모인 상태를 동시에 계산하는 것 (주로 Langevin (Brownian) dynamics나 molecular dynamics (MD) simulation 등을 이용합니다.)은 굉장히 어렵고 정확도를 높이기는 더더욱 난해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때문에 그런데, 우선 물 분자끼리는 수소 결합 (첨부한 두 번째 그림 참조)때문에, 물 분자 주변에 고려해야 할 다른 이웃한 물 분자 개수가 많다는 것, 그리고 물 분자가 특수한 조건 (온도와 압력 등의 외부 조건)에서는 다른 분자와 결합하는 행태가 좀 특수하다는 점 등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일전에 어떤 포스팅에서도 언급하긴 했지만, 물의 상 (phase)가 몇 개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연구자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만, 확정된 바는 아직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최신 결과만 언급하면, 물이 고체 형태로 존재할 때는 15-16 개 정도의 서로 다른 상, 액체 1개, 기체 1 개 정도로 일다 17-18 개 정도의 상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계산과 측정 도구가 정교해짐에 따라, 이에 대한 지식의 최전선도 더욱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물에 대해 친숙한 만큼, 사실 물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굉장히 많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특히, 산업혁명 시대, 증기 기관이 발명되고 본격적으로 이동 수단, 공업 생산 수단으로 적극 이용되면서, 물과 증기에 대한 이해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줄이 에너지와 열이 같은 개념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도 이때쯤이었고요, 물의 비열이 굉장히 높은 편이라는 것, 일정 조건에서의 고체 물이 액체 물보다 밀도가 낮다는 것, 여러 물질이 물속에서 용해되는 정도 (solubility)가 생각보다 훨씬 높다는 것 등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촉발된 것도 이 시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들이 쌓이고, 20세기 초반에 원자 및 분자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어지면서, 물에 대한 대부분의 특성은 이제 거의 다 설명되기에 이르렀고, 여전히 미스터리 한 관찰 결과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보고 느끼는 물에 대한 특성은 이제 더 이상 주관의 영역이 아닌 객관의 영역, 미신이 아닌 과학의 영역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4. 이제 다시 현우 님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현우 님 질문의 핵심은, 현우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물은 H2O다"라는 문장(또는 이와 연관된 여러 미시 구조 서술들의 다발)은 필연적으로 참이고, "물은 이러저러한 조건 하에서 끓는다", "물은 투명하다"와 같이 관찰 가능한 표층적 속성을 나타내는 문장보다 더 중요한 의미에서 물을 물로 만들어주는 속성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물리 화학을 잘 모르는 철학자의 착오가 있는 것일까요?"


일단 첫 문장, 물은 H2O다!라고 정언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과학적 관점에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는 CAT이다.'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선 상에 놓을 수는 없겠지만, 물 분자를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안정적으로 결합한 분자라고 정의한 이상, 수소를 H로, 산소를 O로 나타내서, 화학자들의 규약에 따라 H2O라는 분자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냥 약속일뿐입니다. 그러나, H2O라는 분자식은 물의 특성에 대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사실상 전무하므로, "물은 H2O다"라는 문장은 참/거짓을 가릴 수 없는 문장입니다. 괄호 안에 표시한 부분은 나름 의미가 있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물의 미시 구조를 단순히 H2O라는 분자식이 아닌, 첨부한 그림 같은 분자 구조, 그리고 전하 분포와 전자 구조식, 원자핵의 potential profile, 주어진 밀도, 압력, 온도 조건 하에서, 물 분자와 다른 이웃한 물 분자 간의 배치 형태 등에 대한 것까지 모조리 미시 구조라는 정보 안에 집어넣으면, 일단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최신 물리 화학, 물리학, 열역학, 양자화학, 고체물리학 등의 이론적 관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물 관련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개별 분자 수준에서든, 천문학적인 개수만큼 모인 단위에서의 수준에서든, 물에 대한 미시 구조를 이해했다고 한들, 그것이 물의 '참된' 속성을 이해했다는 것과 동치 시킬 수 있다는 점에는 과학자로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참된' 속성이라는 표현이 너무 vague 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물이 가진 특성의 A-to-Z 100% 라고 이해하려 한 들, 그러면 어디부터가 A고 어디까지가 Z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저 인식론적 관점에서, 그리고 물리 화학 관점에서, 일단 우리가 계측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는 특성에 대해서, 물의 미시 구조를 알고 있다면 거의 대부분 알아낼 수 있다는 정도가 아마도 최선의 서술일 것입니다.


"물은 이러저러한 조건 하에서 끓는다", "물은 투명하다"와 같이 관찰 가능한 표층적 속성은 물이 물이기 때문에 특정한 조건에서는 반드시 그리고 언제든 나타나는 속성일 것입니다. 왜 특정한 조건이라는 제약 조건을 거는가 하면, 물의 끓는점 같은 경우, 외부 압력이 달라지면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때문에, 우리가 물의 상태도 (phase diagram)을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또한 '물은 투명하다'는 표현 역시, 전자기파의 어마어마하게 넓은 대역 중, 하필 가시광 대역이라는 좁디좁은 영역에서만 참인 진술일 뿐, 다른 영역에서는 유효하지 않은 서술입니다. 예를 들어, 중적외선 대역에 해당하는 3 um 파장의 전자기파가 액상의 물에 입사하였을 시, 물의 흡광도가 높기 때문에, 아마 우리 눈이 중적외선까지 볼 수 있는 광수용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중적외선 대역에서는 물이 어둡게 보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물이 끓거나 투명해지거나 하는 물의 다양한 특성들은 물이 물이기 때문에 측정될 수 있거나 계산할 수 있는 물의 물리 화학적 특성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물이 1 기압 하에서는 100C에서 끓는다는지, 물은 가시광 대역에서 거의 투명하다든지 하는 물의 특성과 물과의 관계'를 


'수박의 겉은 초-검의 줄무늬지만, 수박의 본래 성질은 빨갛고 달콤하다' 같은 문장과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후자의 경우, 애초 수박을 자르고 맛보기 전에, 수박의 겉모습만 묘사한 것을 수박의 본래 특성과 연결시키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 수박의 본래 특성이라는 것이 빨갛고 달콤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박의 morphogen이 그렇게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면, 사실 수박의 줄무늬가 초-검의 형태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수박의 겉껍질이 갖은 초-검 줄무늬의 특성은 수박이 수박이기 때문에 (즉, 수박이 수박의 DNA와 그를 읽어 들이는 RNA, 그리고 그를 번역하는 단백질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발현될 수밖에 없는 특성인 것입니다. 그 특성은 우리가 DNA 같은 분자 레벨에서 수박을 분석하지 않으면, 그저 겉으로만 관찰되는 표층적 특성이겠지만, 분자 레벨에서 이해한다면, 충분히 수박의 특성 중 일부로서 그럴 수밖에 없는 특성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일 것입니다.


이는 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물 분자의 자세한 미시 구조를 모르고, 물 분자의 양자화학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얼음이 물에 뜨고, 물의 비열이 굉장히 높고, 증기가 압축되면 어마어마한 힘이 생기고, 소금이 물에 굉장히 잘 녹는 등의 '표층적' 특성은 아마 표층적 레벨에서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화학자를 비롯한 다양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쌓여서, 이제 우리는 물에 대해서라면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관측한 대부분의 물 관련 특성과 성질을 거의 대부분 계측하고 계산하면서, '이해'할 수 있고, 일단 물에 대해서라면 물이 내놓을 수 있는 특성을 파악하는 것에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물의 표층적 속성은 어떤 경우에는 물에 귀속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물리 화학을 공부했던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의 표층적 속성을, 제가 이해하는 언어로 번역하면, '지금까지 물의 미시적 구조와 집단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계측 혹은 계산 가능하여 이해할 수 있는 물의 특성'이라고 정의할 때, 이러한 물의 특성은 물에 귀속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의 기초 정보] -> [100 C에서 끓음]는 가능하지만, 역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물 외에 다른 분자들도 적절한 분자 구조와 분자량이 맞아떨어지면, 적절한 조건에서 100도에서 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특성들이 수백 개 수천 개 수만 개 모이고, 그것들의 교집합을 만든다면, 그 교집합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계산 상에서 테스트 해 본 수백만수천만 수억만 가지의 다양한 분자 중에, 물 분자 외에는 없을 것이라 저는 거의 99.9%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수소와 산소의 동위원소 이야기도 해야겠지만, 일단 그 부분은 일정하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왜 100%는 아니고 99.9%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지는 아래에서 논할 것입니다.


물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 몇 가지나 될지는 미지수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범위에서 실험과 계산을 하고, 대부분 이해했지만,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거나 생각해 보지도 못한 어떤 측면에서 물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특성이 어떨 것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페북의 포스팅으로만 그를 판단하는 것과 유사한데, 페북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특성도 물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를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여행도 가고 술도 먹고 하는 다양한 행위가 없다면, 혹은 그가 애초부터 아예 그런 행위에 응하지 않는다면, 사실 우리는 그 사람을 100%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물 분자를 비유이긴 해도, 동치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물에 대해서도 인류가 가진 지금까지의 과학적 지식과 이론 체계로 커버되는 특성은 거의 대부분 이해되지만, 인류가 탐색하지 않은 (혹은 못한) 어떤 측면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거나, 물이 우연히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측면 자체의 존재를 모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 얄팍한 지식으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낸 물에 대한 모든 특성,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이해의 총합이 물 자체의 '고유' 특성이다 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사용한 교집합 비유를 다시 활용한다면, 우리는 특성 집합을 몇 백 개 몇 천 개 반복하여 적용해서, 교집합이 갖는 영역을 최대한 줄였지만, 그 교집합 속에 물 외에, 미지의 X분자가 또 있을지 여부는 100% 확신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100%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집합들 (즉, 다른 계측이나 계산들)을 적용해야 할 것인데, 일단 현재로서는 인류가 가진 지식과 기술을 동원하여 인류가 확보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종류의 집합은 다 동원해서 교집합을 이룬 상태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 교집합 속에 들어 있는 후보는 물 한 개 밖에 없을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고 거의 100%에 가까울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그 끝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100% 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물의 미시 구조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로부터 얻거나 이해할 수 있는 물의 여러 특성이 우리가 실제로 인지하는 물에 대한 전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교집합이 우리가 생각하는 물 자체가 될 것입니다. 이것 외에 사실 '물이 간직한 진짜! 특성, 즉 물을 물로서! 혹은 물을 물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특성'이 혹시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직 발견되기 전일 특성을 착각한 것일 뿐, 그것 때문에 물이 물답게 된다는 것은, 물의 다른 특성들, 그리고 물 분자 고유의 정보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물을 물답게~'라는 표현은 '김치찌개를 김치찌개답게 (배고파서 김치찌개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라는 표현과 같은 선상에서 다룰 수 없는 표현입니다. 상식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답게'라는 표현은, 이미 그에 내포된 일종의 규약과 범용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시원하면서 짭짤하고 매운 국물 맛, 적당히 잘 익은 김치, 맛을 돋워주는 참치나 돼지고기 같은 부재료, 매운맛을 더 해 주는 고춧가루와 빻은 마늘, 시원한 맛을 내주는 파와 양파, 달착지근한 맛을 내주는 설탕과 조미료, 볶은 향미를 더 해주는 참기름 등, 우리가 김치찌개답게~라고 말할 때는 이에 해당하는 요소를 금방 정립할 수 있지만, 물을 물답게~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물의 미시 구조 수준부터, 집단 수준까지 이해한 특성을 벗어나서 이야기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 이상의 미지의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결론이 날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새로운 집합이 발견되어 기존의 집합에 적용한 후에도, '혹시 아직 발견 못한 어떤 특성에 대한 집합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은 끊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문이지만 충분한 답이 되었을지 저 스스로도 의문입니다. 그래서, 발제하신 질문에 대해 적절한 답이 되었을지는 차치하고, 괜히 혼란만 드린 것은 아닐까 염려됩니다. 애초 과학 철학은 제가 잘 아는 분야도 아니고, 뭐라 답할 깜냥도 안 되기 때문에, 그냥 제 느낌과 과학자가 바라보는 관점을 잠깐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제 의견은 전체 물리화학자들을 대표하는 의견도 아니고,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 틀릴 수도 있으니, 제 의견은 그저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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