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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Oct 03. 2021

불확실성 속의 지도자의 덕목

왜 정치지도자일수록 과학적 방법론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딥러닝은 물리학과 만나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physics-based deep learning이다. 예를 들어 유체역학에 적용되는 딥러닝을 생각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체역학의 지배 방정식인 Navier-Stokes equation는 그 일반 해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여전히 증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 방정식을 특정 가정과 특정 조건 하에서 수치해석 방법으로 해를 구해 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치해석으로 해를 구하기 어렵거나, 그 해가 충분히 신뢰할만한 수준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난류 (turbulence)에 대한 문제다. 난류 양태를 보이는 유체는 시시각각 유체의 기본 성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평균 특성을 구하는 것조차 어렵다. 이동 평균도 계속 바뀔뿐더러, 평균으로부터 벗어나는 정도 역시 uncorrelated 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선형 추론에 최적화된 딥러닝을 적용하면 이제는 조금씩 이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진다. 잘 알려진 수치해석 방법 (예를 들어 Reynolds-average NS equation이나 Large-eddy simulation)과 연결하여 VAE (variational auto encoder) 같은 뉴럴넷에 이들 계산 결과를 학습시키면 난류 특성을 보이는 유체의 주요 물성 (예를 들어 속도장 등)의 변화를 지배하는 주된 feature를 뽑아낼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난류의 변동을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딥러닝 기반의 물리현상 '해석'은 당연히 '추론'에 의존하는데, 생각보다 그 추론의 정확도가 높아서 아주 정밀한 (즉, 계산 비용이 매우 비싼) 수치해석 시뮬레이션과 비교해도 정확도가 더 높을 정도까지 발전하고 있다. 딥러닝 특성상 학습 데이터가 더 많아지고 정교해지면, 그리고 학습에 투자되는 뉴럴넷 파라미터 개수와 층위가 더 많이 available 해지면 더 먼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그 정확도는 더 높아지게 된다. 실제 해가 어떻게 될지는 영원히 정확하게 알 수 없을지는 몰라도, 이제는 어쨌든 기술적으로 '충분히' 정확한 미래를 짚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미래가 물리적 현상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반한 지배 방정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딥러닝 기반의 유체역학, 특히 난류에 대한 해석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를 제일 먼저 적용해 보려는 움직임은 일기예보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기예보는 수치해석 중에서도 여전히 가장 어려운 주제 중 하나다. 오죽하면 내일의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기 위해 일주일의 계산 시간만 있으면 된다는 농담이 여전히 통용될 정도이다. 일기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기를 지배하는 지배 방정식을 알고 그것을 풀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1960년대 캐나다의 기후학자 로렌츠도 그러한 생각을 했다. 그런데 로렌츠가 발견한 것은 아무리 지배 방정식이 간명해도 (사실상 NS equation이다), 그것의 해를 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며, 특히 해를 approximation 하여 구하고자 할 때 초기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몇 스텝 이후의 해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현상이었다. 로렌츠의 시도는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다른 학문 분야를 낳았고, 그것은 브누아 망델브로의 혁명적인 초기 연구를 거쳐, 지금의 카오스 (chaos)의 과학으로 연결되었다. 


딥러닝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푸엥카레의 정리 (Poincare's theorem)를 이길 수는 없다. 그 정리는 애초에 수학적으로 증명된 정리이기 때문이다. 딥러닝이 강력해지고 추론 성능이 더 정확해지면 아마 하루 정도의 일기는 꽤 정확하게 예측 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1년 후, 아니 한 달 후의 일기는 예측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기상학자 로렌츠가 유도한 로렌츠 방정식에서 얻는 결과물은 대중에게도 매우 잘 알려진 이른바 '이상한 끌개 (strange attractor)'다. 이 끌개는 주어진 공간을 서로 겹치지 않는 궤도로 최대한 밀집하여 채워야 하는 특성을 만족한다. 이 특성은 어느 척도로 봐도 바뀌지 않으며, 덕분에 파생되는 혼돈계의 특성은 프랙털, 즉, 자기 닮음꼴이다. 이상한 끌개 같은 혼돈계는 미시적으로는 매우 불확실한 상태를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시적으로는 매우 안정된 궤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혼돈 이론에 대한 보다 수학적인 접근은 위상기하학에 기반하여 랴푸노프 지수 (Lyapunov exponent), 랴푸노프 시간 (Lyapunov time)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더 편하게 할 수 있다. 어떤 비선형 동역학 시스템이 어느 정도의 시간 후에 예측 불가능해지는지는 랴푸노프 시간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대략 이 정도 규모의 시간이 지나면 그 시스템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시스템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구자마다 조금씩 수치는 다르지만 지구 atmospheric flow system의 랴푸노프 시간은 대략 7-30일 내외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즉, 짧게는 일주일, 길어도 한 달 후의 일기는 사실상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는 달리 말해 어떤 동역학적 시스템이든, 비선형 항을 품고 있는 시스템이라면 '예측 지평선의 절대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수천 기의 인공위성을 지구 주변에 띄우고, 초 고해상도의 위성 이미지와 레이더 데이터를 조합한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딥러닝 엔진을 적용한다고 해도, 그 초기 조건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예측의 지평선은 한 달 이내로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일주일 예보도 매우 훌륭한 수준이지만, 현실은 더욱 녹록지 않아서 단 하루 후의 일기도 제대로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는 이미 매일의 경험으로부터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이미 수학적으로는 예측 불가능한 지평선의 절대적 한계가 존재하는 시스템에 대해서도 인간은 여전히 앞날을 최대한 멀리, 그리고 더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인간이 아마도 태생적으로 불확실성을 싫어하기 (혹은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먼저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다면, 앞으로 다가올 위험에 대비할 수도 있고, 필요한 도구를 준비할 수도 있으니, 인간이 앞날에 대한 예측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능을 갖춘 생명체로써, 어쩌면 생존 본능에 의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강력한 다변수비선형 방정식에 대한 추론 도구인 딥러닝 역시 이러한 지능을 갖춘 생명체로써의 인간의 미래 예측 욕망의 최전선에 위치한 도구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도구가 얼마나 날카로워지든, 인간은 당장 내일 자신에게 어떤 일이 들이닥칠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구의 atmospheric flow system에는 그나마 지배 방정식이라도 존재하지만, 인생에 있어서는 지배 방정식이라는 것은 정의할 수도 없고 설사 정의할 수 있다고 해도 그 해가 존재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설사 해가 존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역시 푸엥카레의 정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인생의 랴푸노프 시간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아마도 그 시간은 하루 단위일 것이다.

이렇게 하루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인생일진대,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이 두렵고 조금이라도 예측하고 싶어 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간이 인간다워진 문명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과학적 사유 방식과 연구 체계가 조금씩 정립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과학은 인간이 발명한 최고의 사유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언제든 오늘의 교과서 이론도 내일 발견되는 데이터에 의해 권좌에서 내려올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과학이고, 재현되지 않는 연구를 철회할 수 있는 것도 과학이다. 팩트와 통계, 데이터와 수학, 모델과 재현성, 회의주의와 수평관계의 토론에 힘입어 과학은 조금씩 발전해 왔고, 그 결과 인간은 인간 주변의 자연현상은 물론 사회 현상의 일부에 대해서도 불확실성의 범위를 좁혀나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도 20년이나 지난 지금,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과학보다 미신에 자신의 앞날을 맡긴다. 인간의 랴푸노프 시간은 하루밖에 안 되는데 6개월 후의 운명을 알고 싶어 점을 친다. 자식의 대학 진학을 알고 싶어 무당을 찾는다. 자신이 왕이 될까 싶어 손바닥에 부적을 그린다. 과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도 새 차를 사면 고사를 지내고, 베개 밑에 무당이 그려준 부적을 고이 넣어 잠을 청한다. 여전히 운세를 봐주는 앱은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있으며, 그것이 가볍든 무겁든,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그러한 미신이 뿌리 깊게 작용한다. 자신의 인생의 랴푸노프 시간이 하루이든 한 달이든, 1년이든, 사람들은 이미 앞날에 대한 예측을 과학의 영역이 아닌, 감성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지배 방정식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아닌, 환경 조건의 유불리로 자신의 운명을 판단하려 한다. MBTI의 분류로 자신의 성격을 외부의 준거로 정의하려 하며, 주역의 점괘로 사명을 짓고 자녀의 운명을 점쳐보려 한다. 성명학을 통해 운을 시험하려 하며, 수비학을 통해 자신과 관련 있는 숫자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이러한 미신은 인류가 지구 상에 발을 디딜 때부터 같이 존재했던 것이기에,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과학의 도구가 아무리 널리 퍼지고, 과학적 사유 방식이 아무리 초등학교부터 보급되어 교육된다고 해도 아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것은 이성이라기보다는 감성의 영역이고, 공공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미신이든, 점이든, 무당이든, 사이비 종교든, 개인이 개인의 삶 속에서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면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이 없다. 토정비결을 보고 자신의 운세가 좋다고 나오면 기분도 좋아지고 자신감도 생긴다는데 뭐 손해 볼 것도 없다. 바람직한 자기 암시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바운더리를 넘어갈 때다. 미신이나 사이비에 대한 개인의 믿음이 개인의 바운더리를 넘어, 가족에게로, 지인에게로, 회사로, 단체로, 그리고 사회로 제한 없이 뻗어나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반지성주의로 들어가는 초대장이 된다. 지난 3세기 넘게 과학이 미신과 미몽과 사이비와, 그리고 최근에는 유사 과학과 창조'과학'과 싸워가며 피 흘리며 쟁취한 소중한 인류의 지적 성과에 정면으로 반하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 자체도 옳은 일이 아니지만, 위계가 있는 관계에서 자신의 믿음을 '전하는 것'은 사실상 위계에 의한 강요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쁘다.

만약 미신이나 사이비에 빠진 사람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더 강한 권력을 쥘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최근의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권력자가 된 사람은 권력에 중독된 것처럼 사고 구조가 바뀐다고 한다. 이미 미신과 사이비에 의존하게 된 사람이 권력까지 얻으면 그나마 개인의 바운더리에만 가둬두려는 자신의 믿음이 바운더리를 넘어가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개 권력자들은 보통 자신의 존재감을 자신의 내부를 넘어 외부로 투사하여 과시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철학과 믿음이 은연중에 나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사이비 종교로 인한 비극적인 사건사고 기록이 많이 생기고 있고, 심지어는 최고 권력자가 사이비 세력에 휘둘려 어떤 상황을 만들었는지 겪어 봤다. 그런데도 개인의 바운더리를 넘어, 지도자가 미신과 비과학에 의존할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굳이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더더욱 예측 불가능하고 숨겨져 있던 변수들이 튀어나오면서 안으로든 밖으로든 하루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으로 점점 바뀌어 갈 것이다. 국내 정치든 국제 정치든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이성과 감성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이익과 손해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해질 것이다. 아주 작은 이벤트가 나비효과가 되어 큰 이벤트가 될 수 있고, 아주 작은 다툼이 큰 전쟁이 될 수도 있다. 아주 작은 판단 미스가 아주 큰 손해가 될 수 있고, 전혀 뜻밖으로 상황은 손바닥 뒤집듯 180도 바뀔 수 있다. 어제의 적과 친구가 반대가 될 수 있으며,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을 수 있다. 기술과 돈은 풍부해지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로 인한 불예측성, 불확정성은 더 증폭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의 판단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물론 역사가 충분히 성숙된 민주주의 국가, 특히 시스템이 잘 갖춰진 선진국에서 정치 지도자 한 사람의 판단 미스는 무한정 사회 전반으로 전파된다고는 볼 수 없다. 미국도 트럼프 시절, 엄청난 삽질을 저질렀지만, 나라 자체가 망조에 들거나 재앙을 겪은 것은 아니다. (물론 트럼프가 연임을 하고, 그 이후에도 제 N의 트럼프가 계속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정치 지도자 한 사람의 판단은 여전히 냉철해야 하고, 지극히 이성적이어야 한다. 최대한 정확한 팩트와 데이터에 기반을 두어야 하고, 충분히 인정받은 다수의 전문가와 관계자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종합적으로 제한된 시간과 환경 하에 최적의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삶에서도 매일매일 중요한 결정을 연속해서 내려야 한다면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을 것이고, 심지어 신경쇠약에 걸릴 수도 있는데,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 수 있는 결정을 매일같이 해야 하는 정치 지도자라면 더더욱 정신적으로 피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해답은 냉철한 이성이어야 한다. 감성의 영역으로 들어가 정신적 위안을 찾겠다고 비과학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그 순간부터 불확실성은 더더욱 증폭되고, 많은 사람들의 삶은 더더욱 고통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냉철한 이성과 팩트를 기반으로 내린다는 판단이 반드시 국민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손해가 될 수도 있다. 이번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확실성 속의 최선의 방법은 과학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이다.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정치를 하는 것을 재고해야 하며, 과학의 자리를 비과학으로 채워 보려는 사람은 더더욱 정치를 하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대선이 대략 반년 남았는데, 한국은 이미 충분히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고,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며, 비상상황에 대한 컨틴전시 플랜이 잘 성립된 나라이므로, 어떤 사람이 정치 지도자가 되든, 나라의 운명이 180도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 지도자의 판단 하나하나 앞으로의 운명에 조금씩 불확실성을 증폭시킬 수 있는 이 시점에, 부디 과학의 방법론을 받아들이고, 비판적 사고능력과 전문가의 관점을 존중하되, 언제든 오류의 수정 가능성에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식을 존중하고 팩트를 환영하며 토론을 받아들이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정부의 대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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