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잊을 수 있는 순간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게 너무나 감사한 인생

by 원현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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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태양은 뜨겁다. 수도인 델리의 한여름 온도는 50도를 육박하고, 그런 날 집에서 처음에 트는 수도물은 바깥에 나와있는 배관이 달궈져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기 때문에 조심해야한다. 이런 날씨에 온몸을 이슬람의 챠도르 두르듯이 흰색 옷과 선크림으로 중무장하고 골프장을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국 사람들이다.


나도 딱 한번 그런 미친듯한 뙤약볕에 필드를 나간 적이 있는데, 마지막홀 즈음에서는 왜 이런 고문을 내 스스로에게 하고 있어야 하나 하는 후회만 들었다. 풀들이 초록색이 아니라 노란색으로 보이고 두통이 끊이질 않는다. 다시는 겪고싶지 않은 기억인데 그래도 운동 끝나고 극한의 갈증 끝에서 마셨던, 목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킹피셔 맥사(맥주+사이다)의 알싸한 탄산은 가끔 그립긴 하다.


골프 배우기는 새로 부임하신 인도 법인장님이 똑같이 막 인도법인에 합류한 우리 장기출장자에게 내리신 지상명령이었다. 열심히 일만 하시다가 상무 승진을 하고 처음 나간 임원 골프 모임에서 뭐 얼마나 일하시느라 공치는 것도 못배우셨을까 하고 갖은 조롱과 핀잔을 받은 상무님께서, 너희들은 나같은 멸시와 수모를 받지 마라 라고 강제로 골프를 배우게 하신 거다.


사실 상무님 말씀이 백번 맞다. 인도는 캐디라고, 골프치는 내내 채 가방을 대신 매주고 각종 보조를 해주는 사람을 4시간여의 골프치는 시간동안 쓰는 비용이 그당시 3천원? 정도 했었다. 그린피라고 골프장 사용 비용이 대중 골프장 레벨은 만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나중에 한국에 복귀해서 한번 나가는데 몇십만원 하는 골프 비용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더더욱 상무님의 말씀이 맞구나 느꼈다.


하지만 나같이 장기파견 온 직원들 중에 골프를 끝까지 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 작은 공 때리는 게 왜 그리 안맞는지 다들 억지로 한두달 해보다가 슬금슬금 코칭을 그만두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유일한 생존자 였던 거 같다. 심지어 골프채도 아무도 없었다. 부랴부랴 다들 골프채를 사고, 장비를 구입하고 했었는데 그때 한번 살때 좋은 거 사야한다고 이런 저런 골프 코칭을 해 준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외국의 대학을 나와 경력입사로 우리 회사에 들어오신 분이었는데, 대학교 공강시간에 그지역 고인물 할아버지들과 1시간 짜리 내기골프를 치고 다시 수업을 받던 이력을 가진 분이었다. 폼이 엄청나게 독특한데, 작은 체구인데도 드라이버라고 가장 멀리 보내는 채로 공을 치면 진짜 공이 날개를 단 듯 떨어지지 않고 시원하게 필드를 뻗어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몸집이 좀 있으니까 제대로 신경써서 가르쳐주면 인도 주재 기간 동안 재밌는 동반 플레이어가 되겠다 싶은 속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선배의 예상은 적중해서 한참 빠져서 골프칠때 나도 그 선배 못지않은 비거리를 내곤 했었다. 다만 공이 똑바로 가지 않고 휘어서 옆 홀에 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말이다.


소위 말하는 싱글 플레이어인 그 분은 주말마다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이 많았다. 필드 레슨을 원하는 다른 인도의 한국 회사 주재원들이 어떻게 또 귀신같이 소문을 듣고 스승님으로 모셔가는 건데, 보통은 그 회사 법인장님들의 부름이라서 좁은 인도 한인 사회에서 또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빠질 수도 없는 모임도 많았을 거다.


어느 일요일날 오후, 아직 실력이 안되어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나는 채가 문제인가 내 몸뚱아리가 문제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반가운 그 선배에게서 혹시 지금 시간 되냐는 전화를 받는다. 인도는 보통 일요일은 아침에 골프를 나가고 오후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그 시간에 다른 주재원 분의 전화를 받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냥 말없이 골프장비 준비해서 주소 적힌 데로 나오라는 얘기에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랴부랴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델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굉장히 관리가 안 되어 있는 골프장이었다. 보통 관리 잘 되어있는 골프장도 가격이 별로 비싸지 않아서 한국 사람들은 거의 찾지 않아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네 하고 놀라고 있는데, 선배가 클럽하우스 앞에서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당연히 사람이 없으니 우리는 바로 필드로 나갈 수 있었고, 배시시 웃는 선배가 골프가방에서 병맥주를 꺼냈다.


보통 골프 18홀 중에 9홀 끝나고 중간에 쉬면서 마시지 필드에서 병맥을 마시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캐디도 안 쓰고 둘이 2인 카트를 몰면서 병맥 짠 하고 한모금 인도의 더위에 벌써 밍밍해진 맥주를 삼키고, 공을 때리고... 그런 골프는 처음이었다. 누구도 나를 뭐라 하지 않고, 지금 세상에는 나와 그 선배와, 필드에서 나를 기다리는 골프공과 그린만 있었다.


그런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데,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은 선배가 그제서야 말을 이었다.


'박수석아. 박수석아. 나 이제 기분이 좀 좋다. 법인장들 비위맞추는거 너무 힘들다. 공도 평소보다 덜 때려야하고, 그지같은 스윙 멋지다고 칭찬해주고 나 그거 하러 인도 나온거 아닌데.'


있는 힘껏 친 공이 모래에 빠져도, 물에 빠져도, 뭐가 그리 재밌고 웃긴지 우리 둘은 한번 공을 칠 때 마다 서로를 칭찬하며 또 조롱하며 웃고 또 웃었다. 그 날은 생전 처음 파4홀 원온을 한 날이기도 했다. 그 홀에서 4펏으로 보기를 했는데 그게 뭐라고 또 한참 서로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좀처럼 불지 않던 인도의 여름 바람이 필드를 한껏 스치고 지나가, 땀과 맥주에 절어버린 우리의 얼굴을 식혀주었다. 다음 날 걱정 따위는 정말 1그램도 그 순간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 선배는 야심차게 시작한 인도의 서베일런스 사업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너무나 아쉽게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한국에 먼저 복귀를 했고, 나도 사장님의 지하철 사업 철수 결정과 함께 1년간 열심히 모으고 가르쳤던 인도 개발자들을 내 손으로 잘라야 하는 가혹한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현실이 너무 힘든 순간에, 나는 그때 선배와 같이 갔던 인도의 허름했던 골프장을 생각하곤 한다. 아마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필드를 나가겠지만 그런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 선배는 인도에서 골프가 다른 의미에서 너무 힘들었던 건지 어떤 건지, 한국에 오자마자 골프채를 팔아버렸다고 했다.


골프는 못가도 오랫만에 그 선배에게 연락해서 똑같이 파릇파릇한 풀과 나무를 감상하는 봄등산이라도 가자고 해야하나 싶다. 가혹한 현실이 와도 삶은 계속되고 그렇게 좋은 순간을 같이 했던 좋은 분과의 인연도 계속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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