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은 사람을 통해 성장하기

내가 그 사람처럼만 되지 않으면 성공이다

by 원현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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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출장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키득키득 웃으면서 적는 글이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X캠퍼스 얘기를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출장 얘기는 아끼고 내가 이렇게 지금까지 회사생활을 해 왔다.라는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충격이다!! 저런 선배들은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래서 내일 점심은 뭘 먹어야 행복하지?라고 센과 치히로 애니메이션의 눈 풀린 아빠돼지가 되는 게 보통의 직장인이니까 말이다.


또다시 지옥의 정부 프로젝트 얘기다. 원래 팀장이 있고, 내가 그레이영역 그러니까 계약관계가 희미해서 고객은 해주는 걸로 알고, 우리는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영역을 해결하기 위한 새끼팀장으로 파견되었다는 얘기를 얼핏 지난 글에서 풀었던 것 같다. 해외프로젝트를 통해 계약문구로 일하는 게 익숙했던 나는 원래 팀장 때문에 너무나도 아까운 초기 세팅 시간을 허무하게 허비했었다.


지금도 회사에서도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원래 팀장을 D라고 하자. D팀장은 딱 하루 프로젝트 구조를 대충 설명해 준 뒤에, 나머지는 나보고 알아서 보고 배우라고 하고 사실상 나를 방치했었다. 질질 끌리고 끝이 안 보이는 프로젝트의 분위기에서는 누구라도 그럴 수 있으니 그건 내가 감수한다 치자. 그래도 같은 팀 소속의 새끼 팀장이고 골치 아픈 그레이영역을 넘겨주는 상황이면 그렇게 자유롤로 방치해서는 안 되었다.


디펜스가 안될 거 같으면 혼자서는 안 되니 빨리 개발자 요청해야 한다. 정도의 큰 그림만 그려줬어도 내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내가 계약에 꽤 강한 편이니 제안서 문구에서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부분을 찾아 개발양을 줄이고 일을 시작하려 했었고, 정부 고객은 일전에 얘기했지만 그런 게 씨알도 안 먹히는 분이었다.


지금 와서 백번 D팀장을 이해하려 한다면, 본인의 능력을 거부당하고 일을 뺏긴 거니 내가 고깝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내가 못한 일을 누군가가 잘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거처럼 또 기분 나쁜 일이 없겠지. 근데 그게 왜 기분 나쁘지 싶다. 회사에 능력자 많구나. 나는 좋은 회사에 다니는구나 다행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이미 나는 그런 식의 사고 훈련에 익숙해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D팀장에게 가장 아쉬운 지점은 D팀장은 대부분의 고객의 요청, 피엠의 요청을 바이패스 했다는 거다. 그냥 쉽게 말해서 이런 거다. 이메일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제목만 대충 파악하고 아 이거 저 새끼 꺼네 하면서 포워딩하는 태도. 나중에 무슨 일이 터지면, 자기는 이메일 내용 전혀 모르고 최종적으로 폭탄 받은 쟤가 문제를 일으킨 거예요라고 빠져나가기 위한 준비랄까.


해외 프로젝트 할 때 이상한 표현 배워서 남발하는 피엠님이 계셨다. Please Do Needful.이라는 표현인데, 필요한 거 얼렁얼렁 하세요 라는 오더다. 그 필요한 게 뭔지를 알려줘야 일을 하지!! 그거 내가 알아서 파악할 수 있으면 피엠은 왜 있는 거지 싶은 그런 액션이다. 그런데 D팀장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갔다. Please Do. I Don't Know. 그럴 거면 나한테 직접 요청하라고 하지 피엠의 요청을 왜 자기가 받냐고.


직급이 올라가면서 좋은 단 한 가지 장점은, 내가 일이 넘칠 때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내릴 수 있는 힘이다. 당연히 아직도 내가 일을 잘하지라는 착각 속에 살긴 하지만, 나는 내가 오는 메일의 내용을 우선 내가 빠르게 한번 소화해 보고 시뮬레이션해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밑의 직원에게 포워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생각해 본다. 이거 내가 귀찮아서 그러는 건가, 저 친구 하는 게 더 효율적 이서 그렇게 하는 건가.


당연히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이니까 그날그날 컨디션 따라 달라지지만, 귀찮아서 넘긴 거면 미안해서라도, 저 친구를 믿고 넘긴 거면 내 판단을 파악해 보기 위해서라도 일을 계속 체크하게 된다. 그리고 뭔가 문제가 터졌을 때도 같은 일 하는 심정으로, 일이 되게 하는 방향으로 다 같이 고민하게 된다. 이게 팀장이 일반적인 일을 하는 방식이지 않나.


D팀장이 보내준 메일에서 해결 안 되는 부분을 같이 고민하려고 찾아갔을 때, 그걸 왜 나한테 들고 왔지?라는 표정으로 생경하게 나를 쳐다보던 D팀장을 보면서 와 이 아저씨는 메일의 내용을 전혀 파악하지 않고 나한테 던진 건가?라고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메일의 내용을 읽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포워딩하는 미친 짓은 절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D팀장은 빠르게 나를 동급의 팀장으로 올려줬어야 했다. 자기 지위는 잃기 싫고, 나는 고깝고 하니 그 중간에서 파악도 안 되는 고객 때문에 내가 너무 힘들었다. 피엠님 자체는 사태 파악이 빠른 분이라, 내가 황금 같은 초기시간을 다 허비한 뒤에, 뒤늦게 요청하는 부분에 대해 최대한 들어주기 위해 노력하셨고, 개발팀이 늦게 충원되긴 했지만 덕분에 정말 아슬아슬하게 개발을 마칠 수 있었다.


그냥 좋게 생각하면, 나도 그때 개발자 N이 되어 ETL 개발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는데 그 지식 덕분에 지금 프로젝트에서 빅데이터 팀 업무 전반을 훨씬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D팀장 효과로 약간 왕따 비슷하게 되어 혼자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점심으로 먹었는데, 덕분에 요리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다만 그건 남았다. D팀장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또 하나 남았네. 브런치에 글 쓸 수 있는 훌륭한 재료. 맘에 안 드는 동료나 상사는 이렇게 나에게 자양분을 주는구나 하고 슬기롭게 넘어가는 법을 알게 되어서 지금까지 그럭저럭 회사생활을 잘하고 있는 거 같은데, 뭔가 까마득한 후배 사원들과 대화 중에 말문이 턱 막히는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가 저 팀장처럼은 되지 말아야지의 팀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그거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좀 알려주면 정말 감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