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알이 몇 개인지는 셀 줄 알고 돌아가야쥐
원래 파반느 영화를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타임루프류 영화에 대한 썰을 좀 풀려고 했었다. 요즘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재벌집 막내아들'류의 회귀물이 유행인데, 이 유행도 슬슬 지나가고 있으니 그다음 시간소재 유행은 뭐가 될지 궁금하다.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어떻게든 자극적인 소재들을 잘 찾아내고 있으니 또 뭔가 신박한 스토리라인이 유행이 될 건데 말이다.
보고 있으면 타임루프는 무한의 디버깅 시간이 주어져서 내 코드를 완벽하게 짜는 느낌이고, 회귀물은 에러발생 상황 전으로 빠르게 롤백해서 후다닥 문제 수정을 하고 재배포를 하는 느낌이다. 확실히 회귀물의 디버깅이 다음 세대 디버깅 방법론이긴 하다. 지금은 AI가 미리 코드를 짜주고 테스팅을 돌려주는데, 이건 스토리로 치면 도대체 뭔가 싶어서 씁쓸하긴 하다.
타임루프 영화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고전 중의 고전 '사랑의 블랙홀'이다. 빌 머레이가 연기하는 방송 리포터가 눈 내리는 겨울날 지방 방송촬영을 갔다가 계속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다. 처음에는 먹고 싶은 케이크만 하루 종일 먹고, 평소에 하지 못하던 차 강도도 해보고 신나 하는데, 매번 같은 하루가 반복되니까 허무함을 못 참고 자살시도를 한다. 하지만 그날 새벽으로 다시 돌아가 눈을 뜬다. 공허한 빌 머레이의 표정연기가 압권이다.
회귀물 역시 고전을 좋아하는데, KBS드라마 '고백부부'를 참 좋아한다. 대학 캠퍼스 커플인 장나라와 손호준은 젊어서 결혼했지만 계속되는 부부간의 트러블로 힘들어하다가 육아문제로 폭발하고 이혼 준비를 하던 중에 둘이 처음 사귀기 직전인 대학 새내기 시절로 회귀를 한다. 장나라 손호준 둘 다 엄청난 동안이기 때문에 대학 시절 연기 자체도 어색하지 않고, B급 코미디 정서가 드라마에 너무 잘 녹아있다.
드라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데, 결혼 후 돌아가신 장모님을 대학시절의 손호준이 처음 뵙는 상황이다. 마침 유튜브에 KBS드라마 클립이 있어서 다시 보는데 또 눈물 난다. 죽을 만큼 미웠던 남편이 자기 엄마 보러 온 게 이해가 안 가는 장나라가 들키기 전에 빨리 가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왜 다 잘 살아보려고 죽을 만큼 노력했는데 왜 맨날 죄송하고 미안하고 나도 너처럼 장모님 보고 싶었다고"
뒤늦게 나온 장모님이 상황이 파악은 안 되지만 "밥은?"이라고 물어보고 미래의 사위에게 집밥을 먹인다.
젊어서 결혼했고, 육아로 가장 힘든 시기에 해외출장이 잦았다. 출장이 많은 해는 해외에 90일 이상 있었는데 1년의 1/4을 해외에 있었던 거다. 몰아서 있으면 차라리 나았을 건데, 2주 혹은 3주 단위로 계속 왔다 갔다 했었고,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는 이혼 얘기가 나오기도 했었다. 그때로 돌아가면 더 아내에게 잘하고 아이들에게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는데, 저 대사는 모든 한국 남자를 울리는 대사가 아닐까.
'사랑의 블랙홀'은 다른 의미로 한 번쯤은 겪어보고 싶은 상상을 한다. 무한히 주어지는 시간에서 영화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피아노곡 연주를 연습할 수도 있고, 어려운 치료도 가능한 외과 의사의 경험치를 쌓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인생도 사랑도 만렙 치를 쌓고 다시 흐르는 시간이 주어지면 역시나 어느 누구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역시 쓰다 보니 인생이 코딩이랑 비슷하네. 애초에 코드를 잘 짜면 아무 걱정이 없는 거다. 그렇지만 인생 살면서 늘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에 디버깅을 한다. 실수가 나오기 전으로 돌아가면 가장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방어로직을 짜고 그다음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생 코드를 잘 짜기 위해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경험을 쌓고, 인생은 그렇게 계속 라이브로 가동된다.
하지만 쉽지 않으니까 다들 루프물, 회귀물에 열광하는 거겠지. 원래 '고백부부'는 '한번 더 해요'라는 19금 성인 웹툰을 각색한 드라마다. KBS라는 시대의 마지막 '바른생활' 필터를 통해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명작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웹툰도 살짝 봤었기 때문에 걱정했는데, 수신료가 안 아까운 드라마로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
모두가 '재벌집 막내아들'을 꿈꾸지만 나는 막상 저시절로 돌아가면 그냥 저렇게 소소하게 인생을 디버깅하면서 평범하게 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 내 인생도 너무 감사하고 고마우니 과거 회귀의 달콤한 상상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출근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