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입니다

과연 제목과 같은 내용을 쓸 수 있을까

by 원현민준



출장 얘기가 한없이 밀리고 있다. 아재 좀비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서, 뭐가 이리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지 모르겠다. 뭔가 짧고 임팩트 있게 쓰고 싶은데 내용이 질질 끌리는 것도 여전하고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백하면 '원래 ~ 쓰려고 했는데' 류의 글이 많은 데, 주제를 떠올리고 글을 쓰다가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는 경우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목을 쓰고 글을 시작했다가 결론이 완전 다르게 나다 보니 요즘은 글 소재는 떠올라도 제목을 안 쓰고 글을 시작한 뒤에, 전체적으로 다시 읽어보고 아 내가 이런 글을 썼구나 하면서 가장 나중에 제목과 부제목을 떠올려서 쓴다. 그런데 이 글은 또 어차피 실험기간이라 제목을 써놓고 글을 쓰고 있다. 과연 어떻게 결론날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런 지 모르겠는데, 보통 공대 3학년은 2학기에 학기말 과제를 크게 한다. 4학년인가? 싶기도 한데, 그때는 진로 결정하느라 빡시게 과제를 못할 거고 자취하는 친구 W의 방에 모여서 아이디어 회의를 한참 할 때가 추워지던 시기였던 거 같으니 3학년 2학기가 맞나 보다. 어쨌거나, 너무 쪼그마해서 보일러를 하루 종일 틀어도 얼마 나오지 않는다는 W의 자랑(?)을 들으며 학기말 과제원으로 모인 과친구들과의 회의를 시작했었다.


W는 무척 독특한 녀석이었다. 대구출신에 말을 참 잘하는 친구였는데, 이상하게 논리가 탄탄해서 설득을 잘 한다고나 할까. 대구출신 답게 삼성라이언즈와 이승엽의 골수팬이었는데, 그 시절에 이미 미국의 선진야구 분석기법인 세이버매트릭스를 어떻게 알고 자기 나름대로 도입해서 숫자로 경기를 예측하고 분석하고 그런 것도 무척 잘했었다. 그런 W가 자기 블로그에도 쓰고, 모임에서도 항상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신조가 있었다.


웃기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가 무슨 코미디언 개그맨도 아니고, 왜 웃겨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고 살아야 하는 거야라고 개무시를 했지만, 역시나 설득의 대가답게 W는 학기말 과제의 무게감에 짓눌려있던 우리에게 일장 연설을 펼쳤다.


과제를 하다 보면 서로 힘들고, 오해하고 진도가 안 나가는 순간이 분명히 올 거야. 그때 일수록 우리는 서로를 웃기고 웃어야 해. 웃음에는 묘한 진정성이 있어서 오히려 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나면 긴장이 풀어지면서 큰 걱정도 작게 느껴지는 거야. 자 우리 웃으면서 시작하자.


하지만 원래 베이스가 깊지 않고 방황만 일쌈던 과친구들이 어떻게 서로를 알고 급조된 과제팀이었기 때문에, 게임을 만들자 라는 큰 그림만 그린 채로 진전은 계속되지 않았다. 매직 더 게더링이라는 카드게임을 온라인 게임으로 만들자는 컨셉이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우리가 만드려던 게임이 지금 전세계의 유저들이 즐겁게 플레이하는 블리자드의 하스스톤 게임이었다.


그 방대한 게임 규칙을 이해하는 것도 힘들었고, 그래픽은 결국 포기해서 텍스트 기반의 컨셉 게임으로 목표를 줄이고 줄였음에도 모임시간에는 한 두 명씩 꼭 빠졌고, 결국 가장 중요한 최종평가 전 완성화 시간에 W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번드르르 해놓고... 늦게라도 나타나서 우리를 어떻게든 웃겼다면 용서해 줬을 건데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겨우겨우 최종 발표만 마칠 수 있었고, 팀원들 다같이 C0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 사연을 들어보니 자기 연애사업인지 벤처사업인지를 한다고 과제 모임을 빠졌던 거였다. 그때는 자기 인생을 걸 정도로 심각했다고 또 청산유수로 얘기를 하는데 어차피 학기말 과제점수는 나락으로 간 상태라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W의 얘기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우리를 조금 웃겼던 걸까. W를 두고두고 원망할 정도로 밉지는 않았다.


무척 잘 웃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오늘도 아내가 빵 터질 수 있는 농담을 하며 먼저 나서는 아내의 출근을 배웅했다. 생각해 보면, 회사생활을 하며 회의 때나 상사 대면 때나 긴장을 하는 순간마다 W의 얘기를 떠오르며 유머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했던 거 같고, 그런 시도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프로젝트의 정부 고객 쪽 리더인 과장님도 유머러스한 여자분이신데, 지금까지 프로젝트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일등 공신이다.


내가 하는 수많은 걱정과 고민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다. 한바탕 웃으면서 잠시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 고민할 필요는 없고 막상 그 일이 닥쳐도 그 안에서 작은 웃음과 여유를 찾아내면 어찌저찌 견디면서 지나갈 수 있었다. W의 얘기는 결국 인생을 관통하는 진리였던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이런 진리를 알게 해 준, 학기말 과제를 당당하게 쨌던 그 시절 W에게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 역시 쩨쩨한 나라서, 지금은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을 절대 쨀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는 W에게 심심한 위로 역시 표한다.




그냥 끝내기 아쉬워서 몇 마디 더 적으면 '화이트데이의 추억' 편에 잠시 소개했던 진중한 과친구 H네 팀의 학기말 과제는 휴대용 mp3 플레이어였는데, 구현이 너무 어려워서 다 구현해놓고 나니 커다란 백팩에 모듈을 다 넣어서 동작시켜야 했다. H가 무거운 백팩을 들쳐메고, 백팩 옆에 수줍게 나와있는 단자에 이어폰을 꼽고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걸으며 음악을 듣는 시연을 했다. 모두가 배꼽 빠져라 웃었지만 미래의 저전력 설계 전문팀 상무님은 그렇게 탄생하였기에 지금은 그 시절 모습도 너무나 리스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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