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가 잘 나오네

너는 또 뭐라고 나한테 이런 아픔을 주니

by 원현민준



맨날 뭐하나를 사도 가성비를 따져사는 서민이라서 이번에는 늘 사던 오뚝 서는 브랜드 말고 롯데마트의 PB브랜드인 오늘좋은 브랜드의 후추를 샀었다. 후추야 비슷비슷하겠지 해서 산거고 딱히 후추 자체는 용도의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결정적으로 이 제품은 후추통 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털어도 안나오다가, 좀 세게 털어야하나? 하고 스냅을 조금만 강하게 해서 털면 그제서야 훅! 하고 많은 양의 후추가 털어져나왔다. 이게 진짜 욕나오는 상황이다. 후추라는게 요리 마지막에 맛의 풍미를 더하려고 살짝 넣는 향신료인데, 후추가 너무 많아지면 어떤 음식도 후추맛만 나는 괴상한 음식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우리집이 미식을 지향하는 집도 아니고, 맞벌이 부부 사정에 겨우겨우 요리라고 불릴만한 음식은 가물에 콩나듯이 해먹는 상황이라 매번 당하면서도 아 빨리 저놈의 후추통 다 쓰고, 오뚝 서는 제품으로 바꿔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저번주 쯤에 아무리 흔들어도 후추통의 후추가 안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제 다 쓴건가 싶어서 씐나게 후추통을 주문했고, 반딱반딱 노랑이 후추통으로 조미료 선반을 채워놓았다. 오늘도 안좋은 후추통은 아직은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이 아니라서 조미료 두는 곳 한쪽에 치워놓고 있었다.


방금 출근하기 전에 아침을 만들던 아내가, 한참 요리하던 중에 한마디 했다. 이 후추통 아직도 잘 나오는데? 어라. 다 쓴게 아니었나. 그제서야 우리 서민 집에 합류한 모든 공산품들이 우리집 특유의 서민정신으로 동화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치약통은 아무리 짜도 힘겹게 자신이 품고있던 마지막을 내어주었고, 샴푸도 다써갈 쯤에 아내가 집어넣은 물과 동화되어 다시 옅은 생명을 이어갔다.


버림받기(?) 전까지 모든 걸 내어주는 우리집에 들어온 모든 것들에 갑자기 연민이 느껴졌다. 어쩌다가 우리집에 팔려와서는... 저 후추통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기가 조절하기 힘들어서 조절이 안되었을까. 그저 원가절감을 외치는 나쁜 윗사람들 때문에 규격이 이상하게 구멍이 뚫렸을 뿐인데, 주인들의 구박을 한몸에 받다가 죽기전에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건가 싶어서 안쓰러웠다.


요리하느라 한참 바쁜 아내에게 얼척없이 이런 얘기를 하면서, 나도모르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나도 언젠가는 우리집에서 버림받는거야? 웃자고 농담으로 얘기했는데,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내를 보며 어 이거 진짜인가 싶어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요리하느라 정신없어서 그런거겠지. 애써 당황한 마음을 다잡아보고 있다. 오늘도 이렇게 끝낸다. 여보야 사랑해요.




딸내미가 지적하기를, 너무 아재좀비류의 쓸데없이 진중한 '~했더랬다.' , '~했단다' 류의 글만 쓰는 거 같단다. 그래서 정말 가볍게 진짜 일상을 잡아서 크로키 형식으로 후다닥 한번 써보고 싶어서 쓴 글이다. 글 읽는 분들도 일상을 이렇게 가볍고, 즐겁게 공유해 주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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