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기다리지만 늘 아쉬운 프로젝트 종료 기간
정부 프로젝트가 잘 끝났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내가 늘 생각하는 좋은 프로젝트로 남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다. 내가 피엠 롤로 일한 것도 아니라서 무슨 꼰대처럼 프로젝트의 성공요인 이런 거 정리할 건 아니고, 고객이 참 스마트해서 좋았다는 부분을 남기고 싶어서 펜을... 아니 키보드를 치기 시작한다. (펜을 들었다. 라는 표현이 참 낭만적이라서 펜을 들면 아, 주인이 글을 쓰려는구나 하고 자동으로 착 펜이 키보드로 변하며 최적세팅으로 준비되는 상상을 해보는데 역시 뻘생각이구나 싶다. 물론 나는 지독한 악필이다.)
보통 공무원들은 아무리 요구사항이 멍청해도 요구사항 변경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원래 제안 사전 설명회 때 진짜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은 입찰 예비업체들과 질문답변하면서 거르는데, 워낙 제안서 요구사항이 많다 보니 이 스크리닝에서 걸리지 못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우리를 괴롭히는 요구사항이 한 두 개 남게 마련이다. 이때 일반 기업은 보통은 책임자가 봐도 말도 안 되면 변경을 승인해 주는데 공무원 고객들은 사전 제안 작업한 공무원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써놓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책임을 지기 싫어서) 변경요구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다.
이번 정부 고객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실무 공무원 분들은 합리적이라는 느낌이긴 했지만, 최종 결정권자인 남자 과장님은 기존 공무원스런 모습이어서 약간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프로젝트 중간에 남자 과장님이 다른 업무로 급하게 투입되면서 자그마한 외모에 안경낀 똘똘이 스머프 이미지의 여자 과장님이 대체로 들어오셨다. 보통 저런 인상은 더한 깍쟁이 스타일이라 조금 걱정하셨는데, '이런 거인 거죠?' 라는 특유의 재미있는 말투로 첫 주간보고에서 굉장히 쿨하게 애매한 요구사항에 대한 우리의 걱정을 간파하셨다.
뭐랄까, 우리의 걱정에 대한 행간을 이해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러더니 역으로 이렇게 제안변경을 해보면 어떠냐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고객은 (심지어 정부 고객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유머러스하셨다. 내가 이전 글에서 (https://brunch.co.kr/@sjpark/36) 잠시 언급했던 그 과장님 맞다. 프로젝트 초반의 걱정을 하나 덜어낸 우리 팀은 반대로 이런 걸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변경요구를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봐도 정부 쪽 사람들이 더 유용하게 쓸 기능이었다.
어차피 큰돈 들여 시스템을 납품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쓰지도 않을 기능 때문에 시간낭비 돈낭비 하는 게 늘 불만이었던 나였다. 내가 고객 쪽 책임자라면 이렇게는 안 할 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내가 딱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스마트한 실무자에 책임자는 더 스마트한 분이라니!! 경사는 한꺼번에 오는 건지, 열심히 하시던 실무자 한 분이 올해 초에 승진을 하는 겹 경사까지 생겨버리고 말았다.
승진을 하셔서 부서 이동을 하는 상황은 아쉬웠지만, 프로젝트 이해관계가 사라질 예정이라 우리가 차린 축하 치맥파티에 부담 없이 오셔서 그간의 소회를 듣는 자리는 참 좋았었다. 프로젝트 기간 동안 편한 식사자리 마련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 좋은 정부 고객들은 이런 부분도 본인들이 좀 심할 정도로 단속을 하셨다. 안그래도 호감투성이의 고객들인데. 그리고 그때 여자 과장님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도 간접적으로 듣게 되었다. 뭐랄까 인간적으로도 그분에게 더 믿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프로젝트 종료 회식 날, 세종에 보고할 일 있다고 출장을 가셨다가 늦게 돌아와 참석하신 과장님은 시스템이 잘 개통되어서 한숨 돌렸다고 책임자다운 발언을 하시긴 했지만, 이미 술에 취해버려서 맘속 얘기를 마구마구 떠들던 나의 폭풍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하셨다. (사실 나는 술에 안 취해도 칭찬이면 맘속 얘기를 마구마구 하는 편이긴 하다.) 일 얘기할 때 눈이 초롱초롱 빛나시는 우리 귀여운 과장님, 너무 일만 하지 말고 프로젝트 끝났으니 당분간 삶의 여유도 찾고 그러셨으면 좋겠다. 덕분에 즐겁게 프로젝트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