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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Dec 12. 2023

책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주변을 돌아보라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예순 살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 조국 포르투갈에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대표 작품이다. 역사적 사건의 재해석이나 인간의 윤리의식에 관한 작품을 주로 쓴 작가는 이 소설에서 특히 도덕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현대인을 실감 나게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교통신호를 기다리다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한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환하긴 하지만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이른바 ‘백색실명’의 불가사의한 전염병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뒤덮는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은 처음으로 눈먼 사람을 치료했던 안과의사의 아내. 하지만 축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눈먼 자들의 고통을 생생히 목도해야 하는 또 다른 형벌이나 다름없다.

        

정부 당국에 의해 옛 정신병원 건물에 격리 수용된 그들은 그곳에서 잔혹한 인간성 파괴를 경험한다. 수용소를 감시하는 군인들의 폭력과 냉소, 수용자들 간에 팽배한 이기주의와 탐욕, 그리고 마침내 살인과 집단강간마저 횡행하는 윤리와 도덕의 부재상황에서 그들은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도전받게 된다. 결국 수용소를 탈출하지만 이들 앞에는 더욱 거대한 참혹함이 기다리고 있을 뿐.

        

이 작품은 우리에게 ‘보지 못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단지 시력의 상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굶주림 때문에 성적 폭력에 굴복해야 하며 눈이 먼 상황에서도 권력구조를 숭배하는 인간본성에 대한 질문이다. 결국 실명상태는 그러한 본질적 의문제기를 위한 장치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저 냄새와 소리로만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작품 속 세상은 동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문명적 인간관계의 매개체인 ‘이름’이란 것 역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도덕과 합리라는 보호막이 완전히 해체되어 원시사회의 야만성으로 후퇴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쪽 눈을 잃어 안대를 한 노인에게 눈먼 안과의사가 왜 유리 눈을 끼워 넣지 않느냐고 묻는 대목이 있다. 보기에도 좋고 위생적으로 좋은 가짜 눈 말이다. 이에 노인은 반문한다. “그들이 지금 유리 눈알 두 개를 끼고 돌아다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중략)... 그리고 위생 얘긴데, 이보시오 의사 선생, 이런 곳에서 어떤 위생을 바란단 말이오.” (p.180).

        

앞을 보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 자체가 더 이상 의미 없음을 역설하는 대목이다. 위생적인 면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차이가 사라진, 보지 못하는 세상이 제시하는 것은 오직 도덕적 타락뿐이다.

        

결국 작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관계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작품 속 그들이 흑색실명이 아닌 백색실명이었다는 점도 그런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깜깜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흑색실명은 우유처럼 하얀 상태의 백색실명과 달리 완전한 실명을 의미한다. 하지만 백색실명은 다르다.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사람들의 시력이 다시 회복될 무렵 첫 번째로 눈먼 남자가 커다란 공포로 몸을 떠는데, 이는 백색실명에서 흑색실명 상태로 옮겨갈지도 모를 두려움 때문이다.

        

어차피 앞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 무엇이 더 두렵다는 걸까. 하지만 이는 역으로 지금까지 그들의 실명이 완전한 실명이 아닌 환한 빛의 실명상태였던 점을 환기시킨다. ‘볼 수 없었음’이 아니라 ‘보지 않았음’을, 그래서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여지가 있는 실명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바닥까지 타락한 인간군상이 시각과 더불어 후각적으로 생생히 전해지는 현장을 지켜보는 것이 우선 편치 않다. 메타포들로 겹겹이 쌓인 텍스트 역시 읽기의 진행을 더디게 함은 물론, 따옴표 등 문장부호 없이 직간접 화법 구분도 되지 않는 문체의 형식은 세심한 집중도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흡인력은 강하다. 현대사회에 대한 거창한 문제의식까지는 아닐지라도, 그저 주위를 둘러보라는, 그래서 그들과의 유대관계를 회복하라는 소탈한 메시지가 역설적으로 더욱 묵직하면서도 강렬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08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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