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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Dec 10. 2023

책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작년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받았습니다. 십여 년 전, 작가가 쓴 <남자의 자리>를 읽고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를 자신으로부터 객관화시켜 가는 시각이 흥미로웠고 그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유교적 정서가 강한 우리나라 부녀(부자) 관계와 공통점을 발견한 것도 의외였습니다. 십 년 전 블로그에 썼었던 <남자의 자리> 리뷰 올립니다.


        처음엔 번역을 의심했다. 아무리 원문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그'로 표현한다는 것은 우리 정서상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읽으며 '아버지'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은 어쩌면 작가가 유지하고 싶던 의도된 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부모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하지만 아니 에르노는 그녀의 부모, 특히 아버지를 절제된 감정으로 관찰하고 서술한다. 아버지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애틋한 마음은 있기나 한 건지, 짐작하기 어렵다. 저자의 말대로 ' 허구적 재구성을 혐오하고 현실을 직접 포착하는, 그래서 상징이나 은유를 피해 객관적 상태 그대로 찍어내고자 하는' 시각. 결국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는 그저 거기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했었던 객관적 현실 그 자체였던 셈이다.

        "끝났어"라고 무심하게 표현된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글은 저자의 성장소설이자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사실 '소설'이라 부르기엔 개운치 않다. '소설은 허구'라는 상식을 배격하며 썼던 저자 자신의 가족사, 낙태, 유방암투병, 그리고 유부남과의 불륜 등 이전의 자전적 논픽션들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 흔히 존경이나 그리움으로 묘사되어야 할 것 같은 대상이 아닌, 무미건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배운 것 없고 교양이 떨어지는 아버지였다. 과거에 좋아했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촌스럽게 보이기 시작하는 성장한 '나'와 그런 아버지 사이에 발생하기 시작하는 거리감. 대도시 사범대학에 진학한 '나'가 방학 때 '교양 있는' 친구들과 함께 찾은 고향집에서 관찰한 아버지의 세계는 이미 '나' 자신의 그것과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

        "외부인의 시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 난 내 세계의 방식들과 생각들, 취향들을 잊어버렸기에 내게 열리게 된 그들의 세계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아버지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저 일상적인 방문에 불과했을 것에 특별한 축제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내 친구들에게 경의를 표했고, 세상 예절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예를 들어 특히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신다요?> 같은 말로써, 내 친구들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어떤 열등성을 드러내곤 했다." - p.105.

        '나'는 식구 대부분이 고학력자이며 대화 중에 끊임없이 <아이러니>를 구사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와 결혼한다. 부유하고 교양 있는 세계로 편입된 것이다. 자신이 미끄러져 들어간 그 세계의 반쪽에서 바라본, 그저 하나의 배경에 불과했던 다른 반쪽 세계의 아버지에게 '나' 자신도 이제는 한 번쯤 감정적 절제선을 넘을 법도 하다. 하지만 현실을 마주한 '나'는 다시 그녀만의 객관적인 자리로 돌아온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짓들과 말들을, 그들의 구체적인 몸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을 순수한 존재로 만들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여자>를 <그 녀자>라고 발음하고, 목청껏 말하는 방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과거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 내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동에서 <절제>라든지 올바른 언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p.110

        '가진 것 이상으로 폼을 잡아서는 안 된다'던 아버지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까지 그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교양 있는 자들이 운운하는 '계급적 지위'로써의 자리가 아닌, 화려한 수사를 붙이고 싶지 않은 덤덤한 '그만의 자리'였다.

        어찌 보면 '나'의 아버지는 우리네 아버지와 많이 닮아있다. 투박하고 무뚝뚝한, 곰살 맞은 말 한마디보다는 지적과 꾸중에 더 능숙한. 그러면서도 뒤편에 꼭꼭 숨겨놓은 부정父情을 나중에 가서야 들춰보게 되는 그런 아버지. 옛날에 그룹 넥스트의 '아버지와 나'라는 곡이 있었다. 그 곡 속에 이런 독백이 흘러나온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비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급속한 경제발전만큼이나 빠르게 진행된 세대 간 단절 속에 어쩌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지금의 그것처럼 우아하다고 착각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특히 전쟁을 겪은 세대는 배고팠고, 배우지 못했으며, 교양과 품위를 찾기에 삶은 너무 치열하고 고단했다. 그러면서도 자식만큼은 당신들과 같은 삶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던 바로 불과 한 세대 전, 우리네 아버지들의 삶이 그랬다. 생면부지의 프랑스 작가에게서 새삼 잊고 있던 우리 시대 아버지를 마주 보게 되었다.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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