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오류의 비밀
1957년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12 angry men (열 두 명의 성난 사람들) 은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의심 받는 18세 소년의 재판 과정을 다룬 영화이다. 6일간의 사건 심리 후 12명의 배심원들은 배심원 실에서 토론을 거친 다음 유무죄의 의견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재판관에게 전달해야 한다. 영화는 1시간 36분 내내 배심원 실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정을 다룬다. 자칫 영화 소개만 봐서는 지루할 것 같은 이 흑백영화는 끝날 때까지 한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세계 3대 영화제 중에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이유를 알만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심리학 교재로 사용하고 또 누군가는 협상의 원리를 이끌어 내며 또 누군가는 영어 공부에 활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의사소통의 좋은 사례로 이 영화의 장면을 활용해 보고자 한다.
12명의 배심원들이 회의실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토론의 결과가 만장일치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토론 시작과 동시에 유무죄 투표를 실시해서 12대 0의 결과가 나온다면 토론은 그것으로 끝이다. 이 영화도 시작 초반부에 첫 투표를 하게 되는데 결과는 유죄 11, 무죄 1로 나오게 된다. 이 때 8번 배심원만이 무죄를 주장하고 나머지 열 한명은 유죄를 주장하는데 유죄를 주장한 사람 중에는 11대 1 정도면 그의 만장일치나 다름없고 우리 모두는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없으니 토론조차 필요없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8번 배심원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실증적으로 제시해보이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명씩 설득하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10명을 무죄로 돌아서게 만든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딱 한 명, 3번 배심원뿐이다.
3번 배심원은 토론 시작과 함께 자신의 수첩에 적어둔 유죄의 증거를 꼼꼼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모두 뒤집을 수 없는 팩트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 뒤 토론 과정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새로운 의심 정황이 나타나도 자신의 처음 주장을 뒤집지 않는다. 그리고선 모두가 무죄로 돌아선 다음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닌 감정에 스스로 무너진 모습을 보이며 무죄를 인정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종국에 울먹이며 무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영화 중간에 마음은 무죄로 돌아섰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걸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번 배심원은 왜 그토록 강력한 의심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바꾸지 못했을까? 바로 투사 때문이다. 소통의 대상이 되는 사물 또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머릿속 판단 작업대 위에 올려 놓지 못하고 과거 자신의 상처나 고정관념을 덮어씌워 놓고 올린 후 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투사는 영상을 던진다는 말로 대상에 자신의 감정이나 관념을 씌운다는 의미이다. 투사를 하고서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없다. 잘못된 현상 지각은 잘못된 메시지를 만들고 잘못된 메시지는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청자에게 온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표적 지각오류, 투사
그렇다면 3번 배심원이 한 투사는 무엇일까? 영화 중간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식이 있냐고 물어 본 뒤 자신은 아들 한 명이 있다고 말하고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아들이 어릴 때 친구들과 싸우다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속이 상해서 그 뒤로 강하게 키우려 노력했다며 자식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키워놓은 아들이 지금은 가출해서 2년 동안 소식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선 영화는 다른 장면으로 넘어 가지만 그가 아들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암시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들에 대한 애증이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우연히 배심원으로 참석하게 된 재판에서 마주한 피고인은 다름아닌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의심받는 18세 소년이다. 소년을 본 순간 3번 배심원은 더 이상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소년은 이미 유죄다. 볼 것도 없다. 아들에 대한 미운 감정을 소년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이미 머릿속 판단 작업대에 올릴 때 있는 그대로가 아닌 변형된 상태로 올려진 대상에게 온전한 해석이 가해질리 없다. 3번 배심원은 이미 유죄라는 주장을 앞장 세우고 영화 내내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만을 수집한다. 확증편향의 오류다.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증거가 나타나면 애써 무시하여 선택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각 방어이자 억압이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도 나는 3번 배심원을 비난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 역시 투사, 확증편향, 지각방어의 오류를 범한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 백지상태였던 우리의 머릿 속은 부모, 선생님, 책, TV, 자신만의 경쟁 상황 등에 의해 사람마다 다르게 색칠되어진다. 개인의 역사에 따라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가치관은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인간이 간과하는 것은 세상의 사물과 현상은 인간이 그들만의 가치로 판단하기 이전에 고유의 진실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진실을 그들이 표출하는 대로, 즉 보여 지는 대로 보아야지 인간이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시작 된다. 서로 같은 대상을 두고도 다르게 보고, 화자가 말한 원래의 사실세계를 보려하지 않고 청자가 자신이 독특하게 인지한 지각세계로 보는 순간 소통은 불통이 되는 것이다.
이제 불통 즉 말이 안 통하는 이유가 등장했다. 바로 지각오류다. 지각은 인간이 대상이나 현상을 자신만의 인지과정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각오류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함에 있어 객관성이 결여되어 그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투사, 확증편향, 지각방어와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이 외에도 수많은 지각오류들이 있다. 이 책은 그 전반에 걸쳐 지각 오류를 살펴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 추려낸 사례들을 동원할 것이다. 그리고선 오류를 피하여 화자가 청자에게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법, 청자가 화자의 메시지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법에 대해서도 살펴 볼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분해하는 일이 먼저다. 다음장에서 의사소통의 과정을 분해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