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사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면 동양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 장자를 빼놓을 수 없다. 공간만 다를 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서로 스승과 제자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그 사상이나 말을 계승 및 전하였다면, 동양의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및 발전시킨 인물이 맹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살아온 시대가 달라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공자의 사상이 전파되어 하나의 학파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양 철학자라고 하면 흔히 '공자', '맹자'를 떠올리고는 하는데 두 사상가가 '인의(仁義)'를 중시했다면 이와 결을 약간 달리하는 사상가가 있었으니 바로 '노자'와 '장자'이다. 통일국가가 형성되기 전 전국시대 도가의 중심적 인물이다.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도가사상을 계승 및 발전시킨 인물이다. 노자가 '억지로 하려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놔두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마음가짐과 '이름을 알리려하지 말고 혹시라도 명성을 얻더라도 위상이 커질수록 자신을 낮추어야 된다'는 공수신퇴(功遂身退)의 정치적인 처세술을 주장했다면, 장자는 그보다 더 나아가 사물이든 생각이든 옳고 그름 중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거르다고 단정하여 나눌 수 없다고 보았다.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 것들은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옳다, 그르다'에 대한 정의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어떤 물질에 대해 계수를 하는 게 아니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옳고 그름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예로 정치판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의 입장에서 어떤 주장은 경우에 따라 종전과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진리'나 '진심'은 도외시한 체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해 그걸 증거물로 내세우며 주장이 참임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 제시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예가 너무 극단적일 수 있는데 '사람을 죽인 사람은 나쁘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단 한 번 저지른 행위가 그 사람의 전부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살인자도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는 나쁜 생각과 행동만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도 과거에는 좋은 일도 얼마쯤 하지는 않았을까.
또한 남을 돕는다든가,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을 보면 '착한 사람이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의 과거가 어찌 되었든 현재 그가 한 행동과 모습으로 사람들은 판단하기 때문이다. 가령 과거에 그가 폭력이나 사기에 연루되어 남에게 피해를 입혔더라도 과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비난하지 않고 친절한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것 또한 그의 진심과 상관없이 '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내게 친절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라는 것은 진리는 아니다. 사람이 얼마나 단순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예이다. 나도 다른 이들도 대부분 비슷한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논쟁하기를 즐겼던 '혜시'라는 사람과의 논쟁에서 논쟁의 한계를 주장했는데 그 말을 옮겨 본다.
가령 나와 네가 논쟁을 한다고 할 때 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너를 이기지 못했다고 해서 너는 정말 옳고 나는 정말 그른 것일까? 내가 너를 이기고 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내가 정말 옳고 네가 정말 그른 것일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일까?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일까? 나와 네가 알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도 정말로 그것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길 테니 우리는 누구에게 바로잡아 달라고 할 것인가? 너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바로잡아 달라고 한다면, 이미 너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바로잡아 달라고 한다면, 이미 나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너와 나 두 사람과는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바로잡아 달라고 하면, 이미 너와 나 두 사람과 의견이 다른데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너와 나 두사람과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바로잡아 달라고 하면, 이미 너와 나 두 사람과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와 너와 다른 사람은 모두 알 수 없으니 누구를 기다려야 할 것인가?(장자 제물론 중)
장자에게 논쟁은 논쟁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논쟁의 무용성 및 개념이나 말의 무의미성을 뜻한다. 또 '말'이라는 것이 입에서 발화되지만 그것은 '마음'에서 작용하여 표현하는 것이기에 어떤 사물을 대할 때 느끼는 생각이나 묘사가 평가인데 원래 같은 사물이라도 각기 다른 마음이기에 드러나는 형태가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사물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화가 무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차이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나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그 '남'도 결국 그 자신이기에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모두 자기의 옳고 그름으로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비평하기에 그것이 진정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사람과 다른 생물들의 '올바른 거처', '올바른 짝', '올바른 맛'에 관한 공통의 인식이 없음을 지적하며 이 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표준으로 재단할 수 없고 그것이 없다면 '바름'도 없기에 '바름'을 다툴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옳다며 상대의 주장을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반론 거리를 찾으며 상대의 약점이나 치부를 들춰 오직 이기기 위해 혈안일 때가 있다. 장자는 그 점을 지적하며 논쟁을 멈춰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미꾸라지가 습기 있는 곳을 좋아하는 것은 미꾸라지의 옮음이고, 마른 곳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미꾸라지의 그름이다. 이것은 세계의 진실한 실정이고 분명히 하는 것이 명(明)인데 미꾸라지가 습한 곳을 좋아한다고 원숭이에게 나무 위에 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남에게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나는 장자의 말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연상되었다. 추상적인 질문을 던져서 그 속에 '모순'이 존재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방법인데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참'이고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노자와 장자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도가 사상'은 속세를 떠나 자연에 은거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알았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지식이자 편견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OO은 OO이다.'라는 명제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발견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