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떡

by 글마루

이웃에서 새로 이사를 왔다고 시루떡 한 접시를 들고 왔다. 시루떡은 금방 쪄낸 듯 몽글몽글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이사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떡을 맞춰 이웃에게 돌린 분의 성의를 생각해 한 조각 떼어 오물거렸다. 잘 삶겨진 팥과 찹쌀을 넣어서인지 입에 착 감긴다. 포슬포슬 달큼한 팥고물이 혀에 닿자 기억은 구름처럼 유년 시절로 흐른다.



오래전 종갓집인 큰집에서 제사나 명절 때면 꼭 올라오는 것이 시루떡이었다. 종부인 큰엄마의 손을 꼭 거쳐야만 했던 시루떡을 만들려면 하루 전날 불려둔 쌀을 절구에 찧었다. 내 고향 상주는 겨울이면 유난스레 눈이 많이 내렸는데 쌀가루는 펑펑 쏟아지는 눈처럼 보얬다. 큰엄마와 엄마가 번갈아 가며 하는 절구질은 한나절이나 걸렸다. 쿵덕쿵덕 절구질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박자가 잘 맞았다. 한나절 가웃을 찧은 쌀가루는 체에 걸렀다. 불려 삶아놓은 팥도 곱게 절구에 찧었다.


요즘이야 예쁘게 포장해 놓은 떡을 사다 먹지만 그때는 버스도 다니지 않던 시절인지라 어지간하면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했다. 옹기 시루에 삼베를 깔고 소금으로 간한 쌀가루를 시루 바닥에 깐다. 그런 다음 팥고물을 뿌리고 다시 쌀가루를 켜켜이 탑처럼 쌓는다. 시루가 가득하면 베 보자기로 알뜰히 덮어 둔다. 그런 다음 거치는 중요한 관문이 있는데 바로 시루의 증기가 새지 않도록 하는 시룻번이다. 그 작업이 시루떡의 성공을 판가름한다. 자칫 잘못하면 떡이 설익거나 너무 질척해져 망치기에 큰엄마는 시룻번만큼은 꼭 손수 하셨다.


큰엄마가 밀가루 반죽을 개어 손바닥으로 문질러 가느다랗게 만들었다. 시루와 솥의 경계를 숨구멍 하나 남기지 않고 꼭꼭 눌러 막았다. 바늘 같은 구멍이라도 날세라 촘촘히 여미는 모습은 경건함을 넘어 신성함마저 느낄 만큼 정성을 다했다. 철부지 사촌들도 그때만큼은 숨죽인 듯 조용했고 시룻번 붙이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시룻번을 붙이는 큰엄마의 모습은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사장이었고 지켜보는 사촌들과 나는 제를 지내는 신도처럼 진지했다.


기제사만 열 번이 넘는 큰집에서는 시루떡 찌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물론 전을 부치고, 고기를 삶고, 놋 제기를 닦는 등 일이 다반사로 많았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시루떡 찌는 광경이다. 그땐 시루떡이 다 찌어지기를 기다리느라 큰집 마당에서 맴을 돌았다. 뜸이 들어 구수한 떡 냄새가 마당까지 풍기면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창 이리저리 뛰어놀기 바쁜 시기였는지라 시장기가 몰려왔고 큰엄마가 찐 시루떡은 꿀보다 달았다.


솥뚜껑을 덮고 30분 정도 불을 때면 시루떡이 완성된다. 큰엄마는 떡이 다 익었는지 나무젓가락으로 찔러 넣는 것으로 판가름했다. 오랜 내공이 말해주듯 그 일은 깔축없이 완성되었다. 띠 반죽을 떼어내고 보자기를 살살 걷어내면 더운 김 속에 팥알들이 오종종히 들어차 있었다. 마치 명절날 옹기종기 모인 사촌들처럼. 큰엄마는 시루떡을 한 켜씩 칼로 조심스레 들어내었다. 커다란 함지박에 구수한 내를 풍기며 시루떡이 쌓였지만 누구도 냉큼 손을 내밀어 집어 들지 못했다. 누가 그러지 말라고 시킨 것도 아니건만 시루 비우는 모양만 바라볼 뿐이었다.


쌀이 귀했으니 떡이 귀한 것은 더했다. 드디어 시루의 밑바닥이 드러나면 시루에서 삼베 보자기가 걷어진다. 맨 마지막에 남은 것은 수증기가 직접 맞닿아 유독 질퍽했다. 바로 그것이 우리 차지였다. 쟁반에 시루떡 한 판 던져놓으면 우리 자매는 물론 사촌들까지 승냥이처럼 우르르 달려들었다. 한 조각씩 맛을 봐야 비로소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시루를 안치고 다 찔 때까지 마당을 맴돌며 뭉그적거린 보람은 있었다. 시루에 쪄낸 떡도 만월의 보름달처럼 둥글넓적했다. 둥글넓적한 떡을 제사상에 그대로 못 올렸기에 사각형으로 잘라낸다. 큰엄마는 그제야 자투리로 남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잘 쪘다고 말을 하고는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그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맴을 돈 내 손에 자투리를 쥐여줬다. 떡을 받아 든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쏜살같이 고샅으로 내달았다.


우리 가족은 명절 아침이면 모두 말끔한 옷으로 단장하고는 큰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자식만 9남매에 손주까지 50명이 넘는 집안은 명절이면 큰집 마당까지 친척들로 넘쳤다. 사촌들이 다 모이면 큰집은 장터처럼 왁자지껄 야단법석도 아니었다. 차례는 안방, 마루, 뜨락도 모자라 항렬이 낮은 친척들은 마당에서 절을 해야 하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사촌들이 방에서 명절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큰엄마의 지휘로 사촌들은 모두 뒤꼍 장독대에 나란히 섰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들처럼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에 숟가락을 하나씩 들고 열을 지었다. 그러면 큰엄마들이 탕국에 밥을 말아서 날라줬다. 우리는 장독 뚜껑을 밥상 삼아 아침을 먹었다. 사촌들이 워낙 많다 보니 큰엄마들은 자기 자식 챙길 여유도 없었다. 한쪽에서는 손님상을 내가고 한쪽에서는 밀려드는 설거지로 눈코 뜰 새 없었기에 우리는 하릴없이 엄마 옆을 얼쩡거렸다. 엄마는 바쁜데 성가시게 한다고 눈을 흘기며 야단을 치기도 했고 그러면 큰엄마가 떡이나 전을 쥐여줬다.


서 씨 집성촌이니 동네 일가붙이까지 모이면 동네잔치나 다름없을 큰 행사였고 설이라도 쇠면 세배하러 오는 친척들 뒤치다꺼리에만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차례를 마치고 나면 큰엄마는 안방과 연결된 윗방에서 명절 음식을 모두 갈무리해두곤 그곳에서 손님상을 내왔다. 따로 아궁이가 없는 윗방은 차가웠기에 자연식 냉장고나 다름없었다. 굳은 시루떡은 다시 뜨거운 김을 쐬면 원래대로 돌아왔다. 폭신폭신해진 떡을 마름모꼴로 재단해 손님상에 내갔다. 잘린 귀퉁이는 우리 몫이었다. 상차림을 하다 하나씩 건네주는 것에 재미가 들린 나는 큰집 윗방을 자주 기웃거렸고, 귀찮고 성가셨을 질녀에게 큰엄마가 허탕을 치게 하는 일은 없었다.


떡은 시루떡 외에도 송편, 경단, 절편, 증편에 인절미까지 그 많은 떡을 큰엄마들과 엄마가 손수 다 빚었다. 며느리들 넷에 일가붙이들까지 사나흘은 걸려야 모든 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큰엄마는 조타수처럼 키를 잡고 아래 동서들에게 모든 일을 분담시키면서도 시루떡 찌는 일은 손수 하셨다. 증기가 밖으로 새지 않도록 여미는 일은 집안에 분란이 일어 잡음이 담장을 넘지 않도록 잡도리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라고 하듯 크고 작은 갈등이 존재했으나 큰엄마가 버팀목이 되었다.


큰엄마가 시루를 안치고 띠 반죽을 붙이는 일은 단순히 떡을 찌는 과정을 넘어 신성해 보였다. 특히 팥은 예부터 부정한 것을 물리치고 액운을 막아준다고 했으니 그만큼 팥시루떡에 혼신의 정성을 다하셨는지 모른다. 어느 날인가 큰엄마는 부엌에서 소지를 태워 천장으로 날리고 손바닥을 비비며 머리를 조아렸다. 조상님께 온 집안의 안녕과 번영을 읊조리며 빌고 또 빌었다. 시룻번을 갈무리하듯 정성을 다했다. 고대 국가에서 제사장의 의식처럼 거룩한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켜켜로 쌓여 층층을 이룬 시루떡은 흡사 탑을 쌓은 듯 신성해 보였다.


한 조각씩 떼어 먹다 보니 이 층짜리 시루떡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빈 접시에 팥고물만 흩어진다. 남은 팥고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돌아가신 큰엄마의 얼굴이 희미하게 다가온다. 성긴 머리칼에 쪽을 진 큰엄마가 부엌에서 여전히 음식 준비로 분주하다. 시루떡은 단지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성과 신념, 그리고 가족을 잇는 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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