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꾼다는 것은
나는 나름 책을 많이 소유했다. 원래 책 읽기를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만학도로 공부하다 보니 한 권, 두 권 필요해 사 모은 전공서 또한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근 십 년을 오직 책 사는 데 돈을 썼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값비싼 의류나 화장품, 보석류, 명품가방에 무덤덤하다 보니 돈을 아낀 것 같다. 살면서 아끼지 않은 것은 책 구매나 공부하는 데 드는 학비일 것이다. 꼭 필요하지 않은데 지인과 구경 삼아 들른 상점에서 저렴한 옷 한 벌을 사도 낭비한 것 같아 뒤돌아보게 되는 데 비해 내 책 사랑은 어쩌면 도를 넘을지도 모른다.
책 사는데도 나만의 절약법이 있다. 공부하는 데 최신판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웬만한 책은 중고로 산다. 헌책은 새 책에 비해 많게는 90% 정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새 책 한 권 값으로 헌책 열 권은 살 수 있기에 몇 달에 한 번 발동이 걸리면 인터넷 중고 서점을 눈이 뻑뻑하도록 이 잡듯 뒤지곤 한다. 그것은 보물섬을 발견한 것만 같은 신비로운 경험이다. 헌책은 판매 소개에 목차가 제시된 것도 있지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값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이왕지사 하는 쇼핑 한두 권으로 필요한 책만 담기보다는 가능하면 택배비를 아끼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과 덤으로 관련 있어 보이는 책을 여러 권 고른다. 그래봐야 기껏 삼만 원을 크게 웃돌지 않는다. 옷 한 벌 값도 안 되는 금액으로 나는 흥청망청 쇼핑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그게 헌책을 사는 묘미이다. 게다가 천 원짜리 헌책이 우리에게 주는 대가는 그보다 몇십, 몇백 배이니 나는 쇼핑을 하는 게 아니라 잘만 하면 노다지를 캐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것이 한갓 일상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쓴 잡문 나부랭이라도 천 원 이상의 가치는 하고도 남는다.
정보의 바다에서 더 알찬 정보가 담긴 책을 구매하면 나는 책이 택배로 도착할 때까지 선물 받는 아이처럼 설렘을 주체할 수 없다. 이번에 도착하는 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나의 무지몽매를 일깨워 줄까 하는 기대에 내 설레는 마음은 열여섯 첫사랑을 앓는 소녀처럼 두근거린다. 드디어 목 빼고 기다리던 책이 도착하면 상자를 개봉해 한 권, 두 권 훑어보기 시작한다. 표지를 넘기고 목차를 읽고 책의 대략적인 얼개를 확인하고 관심 가는 부분을 읽다 보면 책의 핵심적인 내용 요소까지 파악이 된다.
문제는 책을 너무 자주 사니 그 책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없다고 생각한 책이 두 권이나 되어 지인에게 나누기도 한다. 내 서재가 따로 없는 데다 책장마저 부족하니 책을 이중으로 꽂기도 하고 한쪽 벽에 탑처럼 쌓아두기도 하는 등 정리가 되지 않으니 보기에도 어수선하고 마음도 어수선한 듯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나만의 서재나 북카페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이 나를 책에 집착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필요가 없어서 버린 책이 내겐 보물을 줍는 듯, 내 자산을 늘리는 것 같은 충만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책을 모으는 것은 나를 키우고 지키는 일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을 갖길 바란다. 그 공간은 고요하고 내밀할수록 좋다. 새 책과 헌책이 공존하는 곳, 전문 서적에서 잡지까지 작은 도서관처럼 웬만한 장르는 다 소유할 수 있을 만큼의 넉넉함까지. 티브이에 나오는 배우처럼 가끔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고민도 하고 음모도 꾸미고, 독서에 몰입하다 피곤해지면 살며시 낮잠도 자는 곳. 부드러운 카페-라테 한잔으로 우아함을 한껏 뽐내며 시 한 편 쓸 수 있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을 익히기 위해 밤을 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밤새도록 글을 쓰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그런 공간을 나는 늘 꿈꾸어 왔다. 아니 평생을 꿈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하고많은 소원 중에 외제 차도, 명품도, 비싼 보석도 아닌 내 서재를 갖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좋아하는 독서도 매일 하고 글도 저절로 술술 써져 분명히 베스트셀러는 낼 것만 같았다. 내가 이토록 서재에 목을 맨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뒤늦게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며 내 공부방도 없이 식탁에서, 거실에서 혹은 발이 시리고 외풍 때문에 한기가 도는 문간방에서 롱패딩의 지퍼를 목까지 채우고 힘겨운 공부를 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난방이 되지 않은 방은 후 불면 하얀 입김이 뿜어나오고 손까지 시렸다. 공부를 하는 것은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여름이면 더위와 겨울이면 추위와 싸워야 하는 조금은 고난스럽고 서러운 과정이었다. 이만하면 내가 서재를 갖고 싶은 게 이기심의 발로도 아니고 허영심이나 겉멋을 부리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된 셈이다.
그러다 작년에 우연히 시골에 집을 보게 되었는데 그 집의 구조가 내 구미를 바짝 당겼다. 다름 아닌 안채와 바깥채가 분리된 독립된 구조였다. 게다가 비록 뷰가 멋지거나 내부 인테리어가 고급스럽지 않아도 양쪽 다 다락방이 있는 복층 구조인 것이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집을 보고 다음 날 바로 계약하고 이사를 와 그야말로 온전한 나만의 서재를 마련한 것이다. 이제 내 오랜 염원을 이룬 셈이다. 그것도 갑작스럽고 우연히 나의 재산목록 1호가 탄생했다.
이사를 하고 책을 정리해야 하는데 책장이 없다. 나는 세상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커다란 책장을 그에게 주문했다. 그는 목재를 사 와서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발휘해 가며 한쪽 벽면을 책장으로 짜 넣었다. 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거들었는데 처음 책장을 제작하는 데다 경험까지 없으니 너무 크게 짰다는 것은 책을 정리하고야 알게 되었다. 책장이 벽 쪽으로 쏠려 혹시라도 조립식주택인 벽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으나 책장은 무너지지 않고 지금도 견고하고 늠름하게 서 있다.
책장이 완성되고 나는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 보물들을 분류별로 정리했다. 학문 서적, 수필류, 철학책, 소설류, 시집, 잡지 등을 따로 구분해 정리하니 어느덧 작은 도서관 규모의 서재가 완성된 것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책을 둘러보며 눈맞춤을 한다. 소설책 속의 인물이 내가 어서 만나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고 책 표지의 철학자가 어서 빨리 통찰하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처음 서재를 만들고 싶다는 다짐과는 달리 나는 서재에서 깊은 독서를 하기보다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장면이나 생각이 있으면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기 바쁘다. 다 쓰고 읽어보면 작품이라기보다는 신변잡기에 가까운데 나는 그 일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 더 이상 표현력도 문장력도 늘지 않고 밋밋한 글솜씨가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글 쓰는 순간만큼은 내면의 대화에 몰입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 가지 바람이 더 있다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이곳에서 독서토론 모임을 갖는 것이다. 집 뒤쪽이 대숲이라 하루 종일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곳에 중고 커피 메이커를 놓고 오가는 길손 있으면 언제라도 들어와 커피 향과 더불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 많은 책을 나 혼자 소유한다는 것은 집착이다. 정성 들여 모은 책이니 누구든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사랑방이 되기를 다시 꿈꾸어 본다.
-2021년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