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직장 3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by 글마루

전 직원이 백 명이 되지 않는 섬유회사는 당시엔 소기업에 속했다. 구미공단엔 1,000명 이상되는 회사도 있었고 출퇴근 시간에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커다란 물결이었다. 그 정도로 공단은 점점 확장되고 젊은 피로 들끓었다. 정문 기둥에는 버젓이 'OO섬유 주식회사'라는 이름이 금속에 인쇄되어 있었다. '주식회사'라는 명칭이 주는 상징성이 당시 내겐 크게 다가왔다. 그것은 어린시절 잘못 인식된 개념 때문이었다. 아버지 국졸, 엄마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으니 한자 꽤나 알았던 아버지지만 세상물정에는 어두웠다. 경상북도 상주 중에서도 깊숙한 오지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으니 문명의 혜택을 받거나 세상사를 읽기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한 마을 친구가 중학교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부산에 있는 신발공장으로 갔을 때 다니러 온 친구가 회사 명을 알려줬는데 그게 OO주식회사였다. 시골에서 '주식회사'가 뭔지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궁금함 끝에 동네에서 공부를 제일 잘한다는 친구에게 주식회사가 집 '주', 음식 '식'으로 집을 짓고 식품을 만드는 회사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했다. 뭔가 의문이 남긴 했으나 나보다 똑똑한 친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식회사'가 붙으면 대단히 규모가 크고 신용도가 높은 회사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무지로 비롯된 오해석이지만 내가 근무하는 회사가 애초에 말했던 새마을금고는 아니지만 주식회사이니 대단하다고 여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을 찾으러 고막이 찢어질 듯한 통증과 한증막 같이 후끈한 현장으로 다니면서도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지?'하는 의문을 가져보지 못했다.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하는 줄 아는 나는 순박한 시골 소녀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업무 볼 것이 제직원들이 짜놓은 원단 길이(Yard)를 생산대장에 기록하고 섬유를 실어 나를 트럭이 오면 출차 전표를 끊어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는지라 남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입사하기 전 N양이 도맡아하던 화장실 청소와 사무실 청소는 어느 순간 완전히 내 일이 되어버렸다. N양은 가끔 내게 볶음밥을 사주곤 했는데 내가 업무가 서툴러도 청소를 잘하니 좋다는 말을 했다. 나는 혹시 회사에서 그만두라고 할까 봐 청소라도 잘한다는 말이 반가웠다.


어린 나이에 사무직 경력이 없던 내가 그들 눈에는 얼마나 어설펐을까. 교대근무하는 반장도 모두 내게 반말을 했다. 상무는 내게 밥값하라며 전기 난로를 닦으라는 일을 시켰고 나는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난로의 먼지를 닦았다. 다 닦고나면 또다른 청소를 시켰다. 하기 싫다는 생각보다는 차가운 걸레로 닦다보니 손이 시린 게 고역일 뿐 나를 대놓고 싫어하고 무시하는 사람들 속에서 한시도 편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상무가 내게 '검단실'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해서 2검단실에 있는 언니에게 얘기하니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사무실에 오기로 해서 왔는데 검단실에 가라는 건 잘못되었다면서 못한다고 말하라고 했다. 중학교만 나온 그 언니는 산업체부설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자기도 졸업하면 사무실로 옮길 거라고 했다.


검단실은 1실, 2실 두 개가 있었는데 1실에는 여러 명이 앉아서 쪽가위를 손에 들고 짜놓은 천뭉치를 롤러로 돌리면서 검사하고 있었다. 1실은 면이나 폴리에스테르 옷감이었고 금방 직조해 가공이 되지 않았기에 '생지'라고 불렀다. 베를 짜다가 길이 끊어지면 그 실을 이어주는 일을 제직원이 했는데 대부분 '동국여자고등학교'에 야간으로 다니고 있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 가는 것이 아닌 3교대를 하며 학교를 다녀야했기에 그녀들은 늘 지쳐보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했지만 나는 그녀들에 비하면 덜 고생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나도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 부모님이 고등학교를 안 보내주면 산업체부설고등학교를 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굶어죽어도 네 고등학교는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공장 가서 일하면서 야간고등학교 다니는 것일 쉬운 줄 아냐?"라고 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한두 살 적은 그녀들은 자기들이 생산한 원단에 불량이 많이 나지는 않았는지, 자기가 원단을 가장 적게 짠 것은 아닌지 묻고는 했다. 또한 기숙사와 연결된 인터폰이 사무실에서 먼저 받아서 연결해줬기에 매점이라도 다녀오면 내게 아이스크림을 내밀고는 했다. 영업 대리인 C와 상무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가끔 위안을 받는다면 내가 사무실에 있다고 공대해주는 소녀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몇몇 언니들은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그대로 제직원으로 눌러앉았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사나웠다. 씻으러 2층 세면장으로 들어설 때 나 들으라는 듯 "저거 열여덟이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언니라고 부르지 마라."라는 것이다. '저거'라고 부르는 그녀들의 말에 나는 흠칫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나는 이유도 없이 그녀들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타지에서 사무직에도 자리 못 잡고 현장 근로자들에게도 미움의 눈초리를 받던 나는 한마디로 미운 오리새끼였다.


가공을 거치지 않은 원단은 대구에 있는 염색공장으로 보내졌는데 불량이 나면 고객사에서 연락이 왔다. 불량 난 원단이 많으면 영업대리와 사무실 여직원 모두 대구까지 가서 불량 뒷처리를 했는데 염색공장에 들어서니 롤러에 감긴 원단이 우르르 내려와 약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는데 그건 잠시였고 염색공장 검단실에서는 불량원단 작업을 할 수 없었기에 공장 구석에서 대기하다가 족집게로 늘어진 실밥을 끊어주는 작업을 했다. 작업보다 힘든 건 막연하게 서서 기다리는 것과 얇은 옷차림 때문에 추위에 떨어야 하는 거였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대구에 간 우리는 실밥 따는 작업을 했고 점심때가 되어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평소 화가 나면 나를 쏘아보며 '인마'라고 부르던 C대리가 그날만큼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서 양아, 많이 묵어라."라고 했다. 관리자인 상무도 무서웠지만 더 무서웠던 건 무뚝뚝한 말투와 검은 피부의 C대리였다. 지금도 이름이 생각나는 그는 '최 씨'였다. 어른들이 흔히들 하는 얘기로 '최 씨 앉은 자리는 풀도 안 난다.'라는 말을 들어서 그랬는지 그는 그 말에 꼭 부합하게 내게는 회사에서 가장 무서운 대상이었다.


그런 중에도 가끔 C대리와 N양이 출근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대구 집에 다녀온다며 기숙사에서 자지 않았다. 혹시 출근이 늦으면 상무님에게 대구 집에 다녀온다고 말하라고 했다. 상무는 내게 집으로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N양의 집에 전화를 거니 어머니라는 분이 어제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C대리 집으로 전화해도 부인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때면 상무는 무척 화가 나 있었는데 그땐 몰랐는데 수십 년 흘러 생각해 보니 뭔가 수상한 점이 있었다. N양은 버스를 놓쳐 C대리 차를 얻어탔다고 하는데 가끔 둘이 함께 출근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C대리가 N양에게 상품권을 건네주기도 했다. 당시에 5만원 권이면 꽤 큰 액수인데 N양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받았다. 난 너무 어려 어떤 눈치도 챌 수 없었지만 상무는 뭔가를 아는 듯 지각한 그 둘을 향해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스물셋 밖에 되지 않은 N양이지만 내 눈에 그녀는 긴 웨이브 펌을 했고 복장도 세련된 편이어서 무척 성숙하게 생각되었다. 예전 남자친구가 군대 간다며 사무실로 전화 왔을 때 그녀는 "예."라고 존대했고 의아해 하는 내게 이젠 말을 못 놓겠다고 했다. 대구라는 대도시에서 자라서인지 N양은 C대리와 상무와도 대화를 잘했다. 나는 늘 바짝 얼어있었기에 누구와 농담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고 내 몸은 사무실에 있지만 투명인간 같았다.


회사에는 내가 가장 구박덩이였고 다음으로 S과장이 있었는데 무척 선량한 분이었다. 단 하나 내게 구박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인 그는 말수가 적었고 늘 피곤에 찌들어보였다. 듣기로는 부인이 몸이 안 좋다고 했는데 그 이유 때문인지 늘 기가 죽고 어두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C대리가 그에게 "손 과장요?"라고 하며 화를 내기도 하고 질책하기도 했다. 나이가 더 연장자인 S과장에게 윽박지르고 화내는 C대리를 보며 난감함과 굴욕감을 같이 느껴야 했다. 현장에서 불량이 나면 그 원망이 S과장에게 돌아갔고 S과장은 그게 모두 자신의 잘못인양 기가 죽은 채 고기를 주억거렸고,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C대리에게 꾸중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나와 처지가 비슷한 그가 가엾고 안됐었다. 출근하면 현장을 오가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도 왜 기가 죽어 싫은 소리를 듣는 건지 도무지 의아했다. 아내의 병원비로 회사에서 가불까지 하니 그 미안함에 의기소침한 그. 유일하게 내게 존대를 하고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기에 나는 어쩌면 동병상련의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소리 크고 힘 센 사람이 큰소리 치는 구조는 여전한 것 같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5화인생 첫 직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