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직장 2

이방인으로 남은 소녀

by 글마루

회사는 깅감단지의 중간쯤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입구 오른쪽에 사무실이, 왼쪽에 검단실(직조한 옷감을 검사하는 곳), 그 옆으로 제직공장 현장이 1차, 2차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더 안쪽으로는 기숙사가 있었는데 3층은 남자 기숙사, 2층은 여자 기숙사, 1층은 구내식당과 사무실 경리가 쓰는 방이 하나 있었다. 나는 N양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J양은 기숙사를 썼는지 출퇴근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촌닭처럼 N양을 따라 방에 들어갔다. 방은 연탄보일러를 땠는데 뜨끈뜨끈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고향 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청결함과 온기에 순간 아늑함을 느끼긴 했지만 낯섦이 주는 어리둥절함이 더 컸다.


옷이라고 해야 티셔츠 두 벌, 치마 두 벌에 속옷과 외투 한 벌이 전부인지라 별로 정리할 게 없었다. 가방을 기숙사에 놓고 바로 사무실에 갔다. 겨울이 목전에 와 있었는데 변변한 외투가 없던 나는 티셔츠만 입고 있었는지라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깡마른 몸을 훑고 지나가는 을씨년스러운 바람은 가뜩이나 낯설고 어색한 공장만큼 나를 애처롭게 했다. 고생이야 웬만큼 해봤지만 그건 내가 나고 자란 땅과 공기 안이었기에 몸만 고되었다면 난생처음 디딘 구미공단은 오직 삭막한 공기만이 나를 훑고 지나갈 뿐이었다. 말 그대로 나는 막막함 속에 내던져진 어린 소녀였다.


집이 가난해 다른 집에 다 있는 전화기가 없는지라 사무실에서 전화를 처음 만졌다. 전화가 걸려오자 내게 전화를 받으라고 상무가 시켰다. 멘트는 N양이 가르쳐주었는데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안녕하십니까! OO섬유입니다."라고 해야 했다. 평소 전화를 건 적도 받은 적도 없는 시골 촌뜨기에게 전화받는 것은 염라대왕 앞에 선 것처럼 두려움이었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수신음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상대방의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에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전화를 했을 때는 분명히 목적이 있을 텐데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내가 전화받는 것을 어려워하자 J상무가 윽박지르는 목소리로 "서양아, 너 전화 안 받아 봤나? 너네 집에 전화 없나?"라고 물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내가 무슨 눈치가 있어서 거짓말을 둘러댈 수 있을까. 집에 전화기가 없다는 내 대답에 사무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요즘 전화기 없는 집이 어디 있다고?"라고 말하며 일제히 시선이 내게 쏠렸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이럴까 싶을 만큼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집에 전화기가 없는 것이 마치 큰 죄라고 되는 듯한 분위기. 그 창피함과 수치심은 가난 때문에 전화기 한 대 놓을 수 없는 집의 자식이 겪어야만 했던 무시당함이었다.


시골에서 자라 무뚝뚝함을 몸에 밴 체 살아온 습성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는 만무했다. 사근사근하지 못한 전화 매너에 나는 한동안 계속해서 질책을 당해야 했다. 전화만 오면 내게 받으라는 상무의 지시에 전화 벨만 울리면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미개인이 갑자기 대도시에 뚝 던져진 황당함. 나중에는 여러 번 반복되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었고 전화를 걸어온 업체에서 내 이름을 물어보기도 하는 등 점점 익숙해졌다. 그 회사의 사무실 여직원들은 성 씨를 따라 모두 'O 양'으로 불렸고 그런 호칭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한 단계 위의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 양'으로 불렸고 그런 호칭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현장에서 제직 하는 여공들이었다.


누구든 처음부터 자신의 업무를 익히기는 어렵다. 게다가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고 눈치까지 없는 내가 능숙하게 업무를 처리하기는 막막함밖에 없었다. 시시때때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 하고, 사무실에 내방하는 손님들께 커피와 차를 내고, 전화가 걸려오면 현장으로 달려가 공장장이나 작업반장을 찾아야 했다. 나는 사무실에 사람들이 시키는 잡무를 수행하느라 나름 바쁘고 힘들었다. 현장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은 기계음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고 소음이 하도 커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어물어 작업반장을 찾고 현장에 없으면 여기저기 찾아다녀야 했다. 현장은 소음만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한증막 같은 열기와 습기가 또한 나를 덮쳤다. 현장의 제직원과 작업자들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나를 힐끗거리며 원숭이 쳐다보듯 했다. 소음과 숨 막히도록 답답한 공기보다 더 힘들었던 건 현장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12시부터 점심시간이었는데 N양은 배가 고프지 않은지 점심때가 끝나도록 밥 먹을 생각을 안 했다. 12시엔 현장 사람들이 있으니 천천히 가서 먹기도 했고 가끔 중국음식을 시켜 먹기도 했다.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는 볶음밥이 그땐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나 싶을 만큼 귀하게 여겨졌고 맛있었다. 자라면서 음식을 풍족하게 먹지 못했고 도시락을 못 싸 가거나 아침을 거르기 일쑤였기에 나는 늘 배가 고팠고 허기가 졌었다. 배가 고파 허기가 지면 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있는데 그 통증은 아직도 내 기억 언저리에 남아 나를 끌어당기곤 한다. 최근까지 다른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있다면 '허기'였다. 때를 넘기면 힘이 없고 어지럽고 머리까지 핑 도는 느낌, 그게 심하면 그대로 쓰러질 듯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었다. 그러니 그때도 삭막한 공장 안에서 혼자 눈칫밥을 먹었으니 사무실에 앉아있어도,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나는 늘 누군가의 눈치를 봤다. 비썩 마른 내 모양새를 보고 식당 아줌마는 내게 많이 먹으라며 혀를 끌끌 차고는 했다. "서 양아,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 한대이. 그래 일은 할 만 하나?"라고 묻고는 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집에서는 부모님을 잘 돕는 착한 딸로 칭찬만 받던 내가 인생 첫 직장에서는 여기저기 눈치만 봐야 했으니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사무실 사람들은 그들대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무직으로 있는 걸 시기하면서도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익숙해지지 않는 거북함은 그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끝까지 이방인으로 남았다. 도무지 내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면 근처 다른 공장에 경리로 취업한 친구 두 명이었다. 나는 퇴근시간이면 저녁을 먹고 그녀들이 근무하는 회사로 향했다. 그녀들이 부러운 건 함께 방을 쓰고 의지가 된다는 점이었다. 그녀들은 무슨 일을 해도 함께 했기에 심리적으로 많은 의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들을 만나면 힘들다고 하소연했고 그녀들은 별말 없이 내 얘기를 들어주고는 했다. 사무직으로 취업했는데 그녀들이 현장 일이나 마찬가지인 '관건(섬유를 짜기 전 준비작업)'을 잡는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놀라긴 했지만 그녀들 역시 힘이 없었기에 회사 관계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3주 정도 근무했던 곳이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내 개인적 힘겨움도 있겠지만, 사람들로부터 인격적인 대우나 배려를 받지 못하고 무시받은 데서 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그 '첫 경험'이 주는 파급력은 어쩌면 내 인생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지원하거나 지지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나는 점점 작고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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