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기계가 되어
1988년 1월 5일, 나는 근로자로서 첫 걸음을 떼었다. 썩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지만 친구들과 함께라는 사실이 서글픔보다 설렘을 앞세웠다. 게다가 회사에는 이미 학교 친구들이 여러 명 먼저 취업해 있었기에 그 사실이 더욱 든든하게 느껴졌다.
구미 2공단에 위치한 H주식회사는 시골뜨기였던 우리에게 마치 출세라도 한 듯한 공간이었다. 당시 대기업이라 불리던 금성사(현 LG전자), 삼성전자보다 임금이 높았기에 ‘현장 근로자’라는 패배의식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갖는 위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입사 후 우리는 기숙사를 배정받고 현장 투입에 앞서 회사 강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는 일주일 넘게 회사 소개와 제품 교육을 진행했다. 공장장부터 관리부, 생산부 관리자들까지 직접 나서 설명했는데, 대부분 서울대와 연고대 출신이라는 이야기에 우리는 은근한 자부심까지 느꼈다. 그런 엘리트들과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호텔 로비처럼 넓고 깨끗한 강당에 앉아 있자니 특별한 대우를 받는 듯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회사 부지는 매우 넓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우리가 근무할 현장 건물이 있었고, 코너를 돌아 약 100미터 거리에 2층짜리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으로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자주색으로 칠해진 4층짜리 기숙사 건물은 호텔처럼 고급스러웠고, 우리는 4인 1실을 사용했다.
우리 집에는 제대로 된 책상 하나 없이 앉은뱅이 책상이 전부였지만, 기숙사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계단을 올라가면 중앙에 소파가 놓인 거실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나뉘어 있었다. 방에는 개인 옷장이 하나씩 지급되었고, 함께 쓰는 책상도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반질거리는 옷장과 밝은 조명, 뜨끈한 방바닥은 마치 호텔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외풍이 들던 고향집 안방과 달리 바람 한 점 새지 않는 방은 바닥이 절절 끓을 만큼 따뜻했다. 그 공간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비록 나만의 방은 아니었지만, 내 물건을 정리할 수 있는 옷장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하얗게 빛나는 변기와 반듯하게 정돈된 화장실, 윤이 나는 타일은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했다. 널빤지를 얹어 쓰던 시골집 재래식 화장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세면장에는 여러 개의 샤워기가 달려 있었고, 수도를 틀면 뜨거운 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예전에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야 겨우 목욕을 할 수 있었고, 그마저도 한 달에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차가운 흙바닥 위에서 떨며 씻던 기억과 비교하면, 이곳은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었다.
H주식회사는 당시 대기업 서열 10위 안에 들 만큼 규모가 컸고, 새로 설립된 공장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기숙사 옆에 위치한 구내식당은 직원 100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을 만큼 넓고 쾌적했다. 전문 영양사와 여러 조리원이 있었고, 메뉴에는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고기가 자주 올랐다. 맛도 좋아 나는 입사 몇 달 만에 체중이 5킬로그램이나 늘었고, 푹 꺼졌던 볼에도 살이 올랐다. 그곳에는 부족한 것이 거의 없어 보였다.
단 하나, 두려운 존재를 제외하고는.
바로 사감 선생님이었다. 안경을 낀 각진 얼굴에 짧은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여군 출신이라고 했다. 마른 체형에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차가운 분위기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겼다. 잘못이라도 하면 당장 기숙사에서 쫓아낼 것만 같았다. 사원은 300명이 넘었고 여직원이 많았기에 사감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녀는 사무실 여직원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1층에 따로 생활했다.
점호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복도를 오가며 불시에 문을 열었다. 잠들어 있지 않으면 서리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기숙사생들에게 그녀는 그야말로 염라대왕 같은 존재였고, 나는 말 한마디 걸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회사는 비디오카세트 공테이프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플라스틱 부품을 사출기로 찍어내고, 양품을 선별해 조립라인으로 보내면 자동기계가 이를 조립했다. 사출 라인은 ‘인젝션’, 조립 라인은 ‘어셈블리’, 원료를 공급하는 곳은 ‘로머트리얼’, 금형을 만드는 곳은 ‘툴룸’이라 불렸다.
교육이 끝난 후 나는 인젝션 라인에 배치되었다. 사출기에서 부품이 찍혀 나오면 로봇이 이를 컨베이어 벨트로 옮겼고, 우리는 불량을 선별해 트레이에 담았다. 부품에 따라 작업 방식이 달랐는데, 일부는 자동으로 조립라인으로 넘어갔고 나머지는 모두 수작업으로 처리해야 했다.
작은 부품은 별도의 소형 사출실에서 생산되었다. 이곳은 기계가 작아 소음이 적고 일도 비교적 수월해 보였지만, 한번 배치되면 쉽게 옮길 수 없었다. 결국 대부분은 힘든 작업을 계속해야 했다.
처음에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농사일로 단련된 손은 빠르게 움직였고, 나는 일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미묘한 시선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만, 당시 나는 일부러 느리게 일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동료들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일을 못하는 척하는 것도 내 성격에는 맞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이 결국 나를 더 몰아붙였다. 생산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부품은 끝없이 쏟아졌고, 아무리 손을 빨리 움직여도 금세 산처럼 쌓였다. 잠시 누군가 도와주기도 했지만, 돌아서면 다시 밀려드는 부품들이 나를 압도했다.
어깨와 팔, 손목, 등까지 통증이 퍼져나갔다. 그 고통은 단순한 근육통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작업으로 관절이 망가져 가는, 몸이 서서히 닳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작업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밤에는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월급은 이전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 돈으로도 이 고통을 견디기는 어려웠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후배들 역시 침술원을 드나들며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대부분은 가난한 집 딸들이었다. 우리가 벌어 보내는 돈을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을 그만두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근무 형태 역시 가혹했다. 조반, 석반, 야반이 쉼 없이 이어지는 3교대 근무였다. 충분한 휴식은 존재하지 않았고, 늘 피곤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 빠지면 다른 사람이 12시간, 16시간씩 연장근무로 메워야 했다.
그 삶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마치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듯,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삶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점점 기계가 되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지금,
내 젊음을 돈과 맞바꾸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