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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복이란

행복이란

8. 산에서 보낸 여름밤의 대소동

by 글마루

사무실의 차광막을 뚫고 목덜미를 공격하는 햇볕이 한층 따가워졌다.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이제 곧 우렁찬 매미 소리가 귀를 따갑게 파고들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정겹기만했던 매미 소리가 지금은 한낮의 지루함만 더할 뿐이다. 매미 소리가 들려오면 현실을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현실은 해야 할 일들에 발이 묶인 신세. 원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가슴속이 시원해지는 추억여행을 떠나본다.


고1 여름방학이었다. 친구 집 근처에 계곡이 있다기에 친구들과 캠핑을 가기로 계획했다. 간단한 옷가지와 세면도구만 챙겨 떠난 1박 2일의 캠핑은 참으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소나무가 빽빽이 둘러싼 평지에 텐트를 설치하고 커다란 돌을 몇 개 주워 임시 화덕을 만든 다음 주변의 삭정이들을 주워 모아 불을 지폈다. 쌀을 씻어 밥을 짓고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난생 처음 친구들과 야영하며 먹는 밥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저녁식사 후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에 우리 다섯의 밤은 아름답게 무르익었다.


낭만적인 밤의 끝을 붙잡고 나란히 텐트에 누워 자려 하자 조금 무서워졌다. 멀리서 들려 오는 산짐승의 울음소리와 칠흑 같은 어둠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으면서 새벽에 옆 사람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자고 약속한 후에야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한창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다급히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혜린아, 일어나봐. 얼른!” 나는 한 번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자는 편인데 친구들의 부름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눈이 번쩍 뜨였다. 친구 중 한 명이 없어졌나 하고 깜짝 놀랐지만 소동의 원인은 바로 나였다.


친구들이 자다가 내 자리를 확인해보니 내가 온데간데없었다고 했다. 너무 놀라서 일어나 손전등을 들고 찾아보니 텐트 밖에서 자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텐트가 좁아 불편한 나머지 잠결에 밖으로 비어져나온 모양이었다. 나무 그루터기와 돌멩이로 울퉁불퉁한 땅바닥에서 자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깨운 친구들은 걱정의 말을 쏟아냈다.


“혹시 나쁜 아저씨가 납치해 갔나 싶어서 엄청 놀랐어! 다친 데는 없어? 등에 상처 났는지 보게 돌아봐."


다행히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났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들이 난 그저 고맙고 미안하기만 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다음 날 아침, 산을 내려가 신천(新川)에 다다랐다. 냇물이 어찌나 세차게 흐르던지 동네의 좁은 도랑만 보고 자란 내 눈에는 낙동강만큼 넓어 보였다. 드넓은 내는 한창 꿈에 부푼 여고생의 가슴을 달뜨고 시원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솟아오른 태양이 굽이치는 물결을 비추는 풍광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고요한 아침, 기운 넘치는 냇물, 소중한 친구들, 우리를 비추는 붉은 햇살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함께 밥을 해 먹고 잠을 자면서 하루를 온전히 같이 보낸 우리는 더 허물없이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졸업 때까지 우정 변치 말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하며 난 든든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맹세는 학년이 바뀌고 서로 다른 반에 배정되면서 지켜지지 못했다. 가끔 서로의 교실을 찾아가곤 했지만, 예전만큼 붙어 다니지는 못했다. 졸업할 무렵에는 각자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하느라 한자리에 모이지도 못한 채 우린 자연스레 이별했다.



추억이라는 것이 꼭 영원한 사이에서만 가치 있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인연이라도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의 농도가 진했다면 오래오래 일상에 햇살을 비춰준다.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이 짙어지는 탓일까. 아니면 한 살 한 살 나이 들수록 마음에 굳은살이 박여 좀처럼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니 마음이 부쩍 싱숭생숭하다. 지난 몇 년간 비록 목표한 것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동안 수고한 내게 위로의 휴식을 주고 싶다. 이번 여름에는 학창시절 그날처럼 두고두고 돌아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추억 하나를 꼭 만들어봐야겠다.


※ 2022년 7월 월간샘터 '행복일기'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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