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근밭에서 시작된 우정
마트 매대에는 발그레한 당근이 산처럼 쌓여 있다. 가끔 카레 라이스를 해 먹기 위해서는 빛깔 살리는 당근이 들어가야 맛깔스럽게 보이는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음식에 당근을 잘 넣지 않기에 하나만 사도 다 못 먹고 버릴 때가 많다. 그런 연유로 몽땅몽땅 통통하게 살이 오른 당근 대신 가느다란 주스용 당근을 고른다. 가늘고 작아서 하나를 다 쓸 수도 있거니와 이상하게도 살찐 당근보다는 앙상한 당근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이유는 아마도 당근밭에서의 추억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인연은 당근밭에서 시작되었다. 해가 시나브로 짧아지는 초등 6학년 늦가을 무렵, 마침 둘 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당연히 점심을 거르게 되었고 친구와 나는 빈 점심시간을 무엇으로 때울지 고심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언덕 너머로는 사택에 사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가꾸는 텃밭이 있었다.
제대로 된 농사를 못 짓고 씨 뿌려놓고 적당히 거두어들이는 형편이었다. 이따금 실과시간이면 실습으로 그 밭에 가서 잡초를 뽑은 적이 있었다. 가느다란 당근이 실처럼 자라났고 당근보다 잡풀들이 기세등등하게 밭을 점령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호미질로 거센 잡초와 씨름하고 있을 때 우리는 멀뚱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언제 키워 제대로 맛이나 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서글프기만 한 당근밭.
문득 그 밭의 당근이 생각났다. 둘 다 별다른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벌써 발걸음은 당근밭으로 향하고 있었다. 얌전하고 착한 그녀와 원리원칙주의자인 나는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반은 서리하듯 감행한 일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학교 언덕을 넘었다. 늦가을이라 바람은 제법 싸늘했고 산 밑이라 어둑하니 그늘도 졌다. 때가 때인 만큼 어지간한 밭은 거의 추수를 마칠 무렵이었다. 씨만 뿌려놓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당근은 빽빽하게 제멋대로 자라있었다. 밭고랑은 잡초가 이리저리 춤을 추었고 씨알은 너무 잘아서 수확하기도 애매할 지경이었다. 잡초 사이를 헤치고 패잔병같이 후줄근한 당근 잎을 잡고 당겼다.
내가 먼저 용감하게 당근 몇 개를 뽑아 들었고 친구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당근을 뽑았다. 평소에 편식이 잦고 당근을 입에도 대지 않던 나는 뿌리에 묻은 흙을 툴툴 털고 손가락만 한 당근을 이빨로 겉껍질을 긁어내었다. 씻지도 않은 날 것에 손도 안 댈 줄 알았던 그녀도 곧 따라서 당근을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발그레한 주황색 미소를 지으며 당근을 아삭아삭 잘도 씹어 먹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하는 당근 서리가 새롭고 호기심 넘쳤다. 당근에서 나는 특유의 향 때문에 입에도 안 대던 당근이 그날따라 그리 맛나던지. 아마도 친구의 순수한 눈빛이 막바지에 이른 가을볕으로 스며들었던 것일까.
당근밭을 다녀온 후 친구와는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내가 그녀를 친근하게 느꼈던 것은 스스럼없이 흙 묻은 당근을 같이 먹어줘서일 것이다. 호기심을 공유하고 우린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다. 평소에도 유순한 성격에 배려심이 깊은 그녀는 친구들끼리 갈등이 생기면 서로의 손을 맞잡게 해 화해를 주선할 만큼 아량이 넓었다. “친구끼리는 먼저 사과해 풀어야 하는 거야.”라던 그녀. 넉넉한 집 막내딸과 가난한 집 둘째 딸은 어울리지 않은 조합 같았지만 우린 다투거나 언짢은 일없이 성격이 잘 맞았다. 나의 외향적이고 거침없는 성격과 달리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의 그녀. 그녀와는 사소한 말다툼 한 번 한 기억조차 없다. 약간의 갈등이라도 생길 기미라도 보일라치면 “네 마음은 그랬구나.”라며 인정해줬기에 참 속 깊은 친구라고 느꼈다.
난 그녀가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마음에 감동을 많이 했다면 그녀는 나의 솔직함과 명랑함이 부러웠다고 한다. 그녀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녔다. 사회에 나와서도 몸은 떨어졌지만 서로 보고 싶어 했고 만나면 반가움에 얼싸안았다. 지금도 나는 그녀와 주고받은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친구이지만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 둘이 너무 친하다 보니 주변 친구들의 시샘 어린 눈총까지 받았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늦가을이 되어 들녘이 수확의 기쁨으로 가득할 때면 내게는 그 옛날의 당근밭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굵고 튼실한 당근보다 당근이라고 명명하기도 서글프고 가느다란 뿌리가 더 그리운 것은 옛 추억을 소환하고픈 간절함은 아닐까. 지금도 여전히 당근을 즐겨 먹지 않아도 당근에서 나는 향은 이제 친근하고 향기롭다. 당근은 내게 단순한 채소가 아니라 천진하고 풋풋했던 지난날의 추억이다.
이번 가을에는 텃밭에 당근도 심어볼 요량이다. 당근이 굵어질 때쯤이면 그녀를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다. 튼실하게 잘 자란 당근은 그녀에게 선물하고 가느다랗고 볼품없는 당근은 그 옛날처럼 대충 흙 툭툭 털어내고 와작와작 깨물어볼 참이다. 열세 살의 소녀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