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 벤또를 아시나요

추억을 먹다

by 글마루

비가 내린다. 여름을 잠재우는 비가 내린다. 어젯밤 늦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낮까지 내린다. 오랜 가뭄과 타는 듯한 더위를 이 단비가 말갛게 씻어주고 있다. 비가 오니 온 세상이 고요함에 잠겼다. 점심때가 되어 챙겨온 도시락을 열었다. 가지찜, 감자볶음에 깻잎 조림이다. 내 도시락 반찬은 늘 간단하고 소박하다. 혼자 먹어도 입맛을 잃지 않는 내 식욕에 위안 삼으며 한술 떠 넣었다. 모처럼 만의 감자볶음이 고소하고 정겹다. 도시락을 먹다가 나는 유년의 추억으로 소풍을 떠난다.


2학년이라 오후 수업이 없었는데 도시락 먹는 언니가 부러워 엄마에게 도시락을 싸달라고 졸랐다. 반찬은 곱게 채 썬 감자볶음 달랑 한 가지였다. 들기름에 직접 농사지어 수확한 감자를 볶아서인지 무척 고소하고 맛있었다. 한참 도시락 까먹는 재미를 누리고 있는 그때 교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왜 집에 가지 않느냐는 물음에 도시락을 먹고 싶어서 남았다고 대답하니 날 보며 빙긋이 웃으셨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도시락을 보고 매우 맛있게 보인다며 입맛을 다시고는 토끼풀처럼 다정한 말씀 몇 마디를 남기셨다.


그땐 도시락을 ‘벤또’라고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말과 글이 금지되고 일본어가 통용되면서 일본어를 쓰다 보니 그때부터 말이 혼용되어 전해 내려온 것이다. 해방 후 삼십여 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일본말을 우리나라 말인 양 쓰였다. 우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도시락 대신 ‘벤또’라고 불렀다. 도시락이 설렘을 불러온다면 벤또는 친숙함이다.


저학년 때는 집안 형편에 비해서 도시락 반찬이 먹을 만했다. 여름에는 감자나 호박볶음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멸치볶음을 싸 온 적도 있었다. 난 아기 때 젖배를 곯아서인지 자라면서 몸이 허약했다. 늘 기운이 달리고 위장도 안 좋았다. 멸치나 고등어같이 조금만 비린 것을 먹어도 신물이 목을 타고 역류했다. 위에서 목을 타고 넘어오는 신물은 소가 되새김질하듯 계속되었다. 뱉어내지 못하고 삼킬수록 신물은 계속 올라왔고 급기야 속도 쓰리고 아파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음식에 대한 알레르기처럼 신물이 올라 한동안 멸치나 고등어를 멀리하기도 했다. 결국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를 싸지 말라고 엄마에게 주문했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가난을 온몸으로 맞닥뜨린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이 소풍 가서 먹는 꿀맛이었다면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도시락은 친구들이 볼까 두려워하는 음식이 되었다. 게다가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는 우리를 살뜰히 챙기지 못했기에 도시락 반찬은 늘 김치와 단무지가 단골 메뉴였다. 도시락은 나눠 먹는 재미인데 맛없는 내 반찬을 친구들이 먹지 않자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중에는 도시락 뚜껑으로 반찬을 가리고 먹을 만큼 숨기고 싶은 과거가 되었다. 중학교는 면 소재지에 사는 친구들과 섞였기에 소시지나 어묵, 달걀 같은 고급 반찬을 싸 오는 친구들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더 비교되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들은 점심시간마다 어머니가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 도시락도 양은 도시락이 아닌 반들반들 윤이 나는 스테인리스 재질에 국물 통까지 있었다. 우리는 촌놈처럼 신기하게 그런 친구의 도시락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는 했다. 게다가 반찬은 또 얼마나 맛깔나게 보이는지 어묵조림이 촉촉한 게 윤기가 났다. 겨울이면 다 식어 싸늘한 밥 대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은 냄새조차 구수했다.


초등학교 때는 반 아이들이 모두 산골에 사는지라 반찬이 비교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도시락에 대한 추억은 초등학교 때가 더 그립다. 겨울이 되면 교실에는 나무 난로를 피웠다. 그땐 겨울이 왜 그리도 춥고 혹독했는지. 교실 손잡이를 잡으면 접착제를 만진 듯 손이 쩍쩍 들러붙으니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화들짝 놀라고는 했다. 난로가 있어도 주변만 온기가 있지 조금만 벗어나도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외풍에 몸을 들썩이며 떨어야 했다. 학교 소사 아저씨가 장만한 장작을 반 남학생들이 날라 왔다.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난로 피우는 것이 일과였다. 종이에 불을 붙여 난로에 넣으면 어떤 때는 바로 불길이 타올랐지만 어떤 때는 불이 붙지 않아 매케한 연기가 온 교실을 감쌌다. 눈은 매워서 눈물이 났고 목은 기침으로 쿨럭였다. 불이 본격적으로 타오르면 차가운 교실에 온기가 돌았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난로 앞으로 모여들었다.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불을 쬐라며 손짓하셨다. 난로는 점점 벌겋게 달아오르고 그 열기로 인해 아이들의 얼어붙은 볼까지 발갛게 데워주었다.


집에서 가져온 양은 도시락을 난로 위에 차곡차곡 올려놓았다. 납작납작한 도시락이 난로 위에 탑처럼 쌓였다. 삐뚤빼뚤 지그재그로 쌓은 노란 양은 도시락이 속까지 데워지는 시간. 선생님은 밑에 도시락이 탈까 봐 자주 쌓인 도시락의 순서를 바꿔주셨다. 난로에 데운 덕분에 아이들은 얼음처럼 차갑고 서걱서걱한 밥 대신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대부분 반찬은 배추김치였다. 한 가지 찬으로도 꿀맛 같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던 건 먹을 게 귀한 것도 있겠지만 난로처럼 훈훈한 선생님의 마음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식을 위해 정성으로 밥을 지어 도시락을 싸준 엄마의 마음처럼 따뜻한 밥을 먹이고자 하는 선생님의 속 깊은 정을 우리는 함께 먹었다.


책가방도 없어 책보로 둘둘 말아 옷핀으로 고정 후 남자아이들은 어깨에 둘러메고 여자아이들은 허리에 보자기를 묶었다. 그랬기에 기울어진 도시락에서는 김칫국물이 배어나서 보자기는 물론이고 교과서까지 온통 불그스름하게 얼룩졌다. 김칫국물 밴 얼룩진 책을 보며 안타까움에 선생님은 탄식만 할 뿐 학생에게 꾸중할 수 없는 상황. 아이들은 김칫국물이 새는 것을 창피해하지도 않았다. 누구나가 그랬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하교할 때면 빈 양은 도시락에 들어있는 수저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동요의 리듬에 박자를 맞추듯 쩔렁거리는 소리는 종소리처럼 긴 여운을 남겼다. 걷기보다는 뛰어다니다시피 했으니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가 지나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쩔그럭쩔그럭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이들이 뛰어가는 자리에는 도시락 덜걱거리는 소리가 함께 따라붙었다. 일부러 박자라도 맞춘 것처럼 도시락도 일제히 아이들을 따라 뛰었다.


요즘은 일부러 옛 추억을 되살리고자 ‘추억의 7080’ 같은 음식점이 눈에 띈다. 예전 교실을 연상케 하는 내부구조와 교복까지 준비해 놓고 대여해주는 곳도 있다. 그곳에서 빠질 수 없는 메뉴는 바로 ‘추억의 벤또’이다. 넓적한 사각 양은 도시락에 밥과 김치를 얹고 빼놓을 수 없는 달걀프라이가 꼭 얹어진다. 그러면 도시락을 들고 마구 흔들어 안에 내용물이 섞이게 한다. 잠시 후 그 빡빡한 벤또 안에서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져 비빔밥이 저절로 되는 것이다. 도시락 뚜껑을 열고는 입이 미어터지게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먹는 모습은 행복 그 자체다. 삶의 영역에서 정신없이 살아왔던 장년층이기에 가난했지만 그리운 학창 시절. 천진난만 사춘기 소년 소녀로 다시 돌아간 감회. 교복을 입고 벤또를 까먹으며 꿈 많았던 지난날을 되새기는 것은 어쩌면 제2의 꿈을 다시 꾸는 시간은 아닐까. 지금도 아련하게 까까머리 남학생이 책보를 울러 매고 쩔렁거리며 내 옆을 지나가는 것만 같다. 쩔그럭쩔그럭 빈 도시락이 소년의 뒤꿈치를 따라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일상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