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과학>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검은색 테가 있는 모자가 존재감 있게 드러나 있는 것을 볼 때면 벨기에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중산모를 쓰고 있다. 그리고 모자를 쓴 남성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거나 표정을 읽기 어렵다. 등을 지고 서있거나, 물건 따위가 얼굴을 가리고 서있다. 익명성과 고립을 의미하는 방식으로 중산모를 활용했던 르네는 실제로 주목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의 그림에서 모자는 남들의 시선피하기 좋은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책의 제목에서 언급되는 모자는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책 표지 디자인을 보면 모자 아래 떠있는 구름이 모자 안에도 떠다니고 있다. 모자 안과 밖의 구름이 전혀 다른 시공간에 있는 듯한 모습이 어떤 의미일지 호기심을 부추긴다. 마치 밤하늘의 우주를 보는 듯한 모자 안은 어두운 내면세계를 말하는 듯하다. 검은 중절모는 마치 모자 밖의 떠있는 구름을 보호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는 가끔 우리가 느끼는 고독이나 불안함을 통해 새로운 희망과 성장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영향력 있는 신경과 전문의이자 베스트셀러 저술가였던 올리버 섹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저자는 “우리 인간은 병 없이 살아갈 수 없는가!”라는 니체의 말을 시작으로 본인이 겪었던 수많은 환자의 기록을 상세히 저술하고 있다. 상담을 받으러 온 P선생에 대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실력 있는 선생님이다. 다만 학생들의 얼굴을 잘 못 알아보거나, 물건에 말을 걸을 때도 있다. 자주 보는 이들을 못 본체 하기도 한다. 때문에 조금은 엉뚱하고 때론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일상에 불편함이 계속되자 병원에 방문한 것이다. 저자는 그에게 간단한 테스트를 진행한다. 물체를 보여주고 이게 무엇이냐 묻는 간단한 테스트였다. 그는 의사가 보여준 물체를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플라토닉 다면체 같은 대칭성은 없네요. 길이는 15cm 정도이고 붉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초록색으로 된 기다란 것이 붙어있네요” 그 물체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물체를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틀린 말은 없었다. 다만 코에 가까이 대보고 향을 맡고는 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시각인식 불능증에 걸렸다. 논리적 사고능력이나 대화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그는 특별한 특징이 없다면 사물이나 사람 들 모두 알아차리기 어려운 상태였다. 다만 그는 시각적인 것 외에 모든 감각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랬기에 음악과 함께하는 사회활동에도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꽃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들을 때 이 익숙함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매일 만나는 AI서비스가 대답하는 방식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말에 생동감이 없었다. 꽃을 바라볼 때 우리는 대부분 느낌을 먼저 내뱉곤 한다. “어머, 너무 예쁘다!” “향이 참 좋네!” 이런 말이 먼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시각적인 것엔 느낌과 판단이 철저히 배제된 채 설명하고 있었다. 나 또한 생각이나 느낌이 배제되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도 흐려지는 포인트가 있다. 아마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약한 부분이 그렇지 않을 까라는 생각이 든다. 노력해도 능력치가 떨어지고 둔감한 약한 고리가 누구나 에거나 있기 마련이다.
돌솥비빔밥을 먹으면 항상 바닥에 하얀 밥이 덩그러니 한편에 웅크려 있다. 한 그릇을 다 먹어도 왜 이렇게 배가 고픈가 했더니 역시나 급하게 비비느라 제대로 안 비벼진 것이다. 나는 항상 바쁘고 급하다. 하기로 마음먹은 건 무조건 빨리 실행해야 마음이 놓이고, 그렇지 못한 상황이면 전전긍긍하다가 그 불안함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 짜증 섞인 말투가 튀어나오곤 한다. 혼자일 때는 문제 될 게 없지만, 협업을 진행할 때가 곤욕이다. 공유하기로 한 자료가 제시간에 오지 않으면 담당자에게 채근하려 수화기를 여러 번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물론 이런 태도가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일인걸 알기에 전화로 이어지진 않는다. 마음먹으면 그걸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빠르게 일을 해버리기 일쑤였다.
빠르게 속도를 내다보면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없는 것처럼 잘하고 싶어 빠르게 진행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중요한 것들을 한두 개씩 놓치곤 했다. 급하게 잡은 기차티켓의 오전 오후를 헷갈려 예약했다 거나, 제품홍보를 빠르게 하기 위해 촬영을 미리 진행했는데 제품디자인이 바뀌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나는 꼼꼼한 감각이 점차 둔감해지는 세부인식 불능증에 걸린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P선생에게 내리는 처방이 더욱 궁금했다. 뇌신경전문의가 내리는 처방은 약물처방이나 의학적 수술이겠지 라는 생각으로 읽다가 그가 내린 처방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저 로서는 어디가 잘못된 건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좋은 점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음악가이고, 음악은 선생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만약 제가 처방을 내린다면 음악 속에 파묻혀 생활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음악이 선생님의 삶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지내시라고 말입니다.
그의 처방전은 ‘내가 잘하는 것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지배적이며 굉장히 예민했던 스티브 잡스는 전략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이 뛰어나 그가 가진 약한 부분이 전혀 두각 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에도 자신의 직관을 믿고 불가능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데 있어 두려움이 없었던 자로 기억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독함 혹은 감추고 싶은 것들에 눌려 나의 희망찬 장점을 억누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은 하나하나씩 감상하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그다음 계획을 세워 또다시 출발하는 건 가능하다. 나는 깊이 보는 능력은 떨어질지 언정,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마치 책 표지의 일러스트처럼 모자는 나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위장의 도구가 아니라 나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주는 장식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었다. 마치 중산모 뒤에 숨으려는 마그리트의 고독함은 그의 작품에서 의외성을 높이며 초 현실주의 작가로서 의 정체성이 더욱 뚜렷해졌던 것처럼 말이다. P선생이 상담을 받고 나가는 길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며 그녀의 머리를 집어 들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왜 하필 아내를 모자로 착각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건 자신의 치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숨기고 픈 존재였을까? 그렇다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동안 더 나은 삶이 펼쳐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들 앞에서 보이기 싫은 나의 약점은 단지 장점을 높이기 위한 장치 일 뿐인 것이다.
한 줌 웅크렸던 흰쌀밥은 돌솥바닥에 꾹꾹 눌러 누룽지로 먹었다.
나의 덤벙거림이 만든 새로운 메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