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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signBackstage Jun 12. 2024

시시한 날들의 기적

<소설> 바깥은 여름

“벚꽃 날리는 거 봤어?

"오늘 저녁에 산책할래?”

“날도 선선 해졌으니 우리 만나야지!”

 "눈 오는데 오뎅바에서 한잔?”


늘 반가운 연락은 날씨와 함께 온다. 나 또한 반가운 연락을 할 때면 의례 날씨를 꼭 끌어안고 연락하게 된다. 날씨를 살핀다는 건 타인을 살피는 것과 닮아 있다. 주변에 귀를 기울인 다는 것. 내면이 건강한 사람은 계절을 잘 인식한다는 말처럼 누군가에게 날씨를 핑계 삼아 안부를 전했다면, 마음이 건강하다는 자가진단이 가능하다.

회사에서 ‘신제품 쇼케이스’ 행사 총괄을 맡았었다. 천명 가까운 업계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신제품 발표회를 진행하는 자리로 회사의 가장 큰 실적을 좌우하는 제품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부담스러웠지만 그 순간만큼은 회사 오너가 된 것처럼 온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행사 발표자료의 흐름은 문제없는지, 발표자의 목소리 톤은 신뢰감을 주는지, 행사 진행 메인 화면인 LED 패널이 너무 눈부시지는 않은 지, 쉬는 시간 케이터링 동선은 혼잡하지 않은 지, 화장실 칸 개수부터 VIP 주차까지 모든 시뮬레이션을 다 돌려 봐야 했었다. 행사 한 달 전부터는 어스름한 새벽에 나가서 해가 지면 퇴근하기를 반복했다. 무사히 행사가 끝나고 다 같이 식사하러 가는 길에 발 밑이 푹신했다. 황금빛 노란 은행잎 카펫을 밟으며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단풍구경을 해보지도 못한 채 바닥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조차 발이 먼저 만났다. 계절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늘을 보고, 주변을 살피는 것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바깥은 여름’에서 만난 영우 엄마는 새 집으로 이사 온 뒤 집 꾸미기에 여념이 없다. 어느 날 과도 다르지 않은 보통날에 아이를 사고로 잃게 된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그녀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웅크려 지낸다. 아이를 잃은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이 힘들어 나가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게 된다. “너무도 즐거웠던 그 집이 절벽 앞 낭떠러지처럼 느껴져”라는 감정들은 읊을 때는 마른 심장을 움켜쥐고 비트는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바깥의 여름’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 소설 작품이다. 영우 엄마가 등장하는 ‘입동’ 작품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가장 소중한 이들의 갑작스러운 상실을 그리고 있다. 항상 함께 할 것만 같았던 이들과 예고 없이 이별하는 모습은 공감과 불편한 감정들이 번갈아 다가온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모호함과 언젠가는 꼭 죽는다는 확실함 사이에서 우리는 언제나 늘 불안하다.

쓸쓸함 가운데 자꾸 눈에 밟히는 장면이 있었다. 새로운 집을 장만하고 너무 행복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그 글을 읽으며 슬픈 일이 생길 것을 예감했다. 몇 해 전 해외여행 중에 사고로 타지에서 생을 마감한 이의 유가족이 한 말이 떠올랐다. “여행하면서 엄마가 너무 행복해하셨어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말하셨죠” 행복과 죽음이 왜 연관 어처럼 떠올랐을까?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것처럼, 성공 뒤엔 시기와 질투가 있고 실패 뒤엔 위로와 응원이 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일이 순도 100% 좋은 일과 나쁜 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왜 좋아하는 것을 좋다 말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자책했던 때가 있었다. 영혼 없는 리액션이니, 진심이 없다 느니 하는 말에도 도통 감정이 잘 끌어 올라가지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것을 알게 된 나이가 돼 버린 것이다. 아이가 열이 나면, 퇴근 후 너무 늦게 밥을 먹여 아이 면역력이 떨어진 건 아닌지, 아이가 유독 어깨가 축 처져 들어오면 놀이터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진 않았는지, 그때 엄마가 없어 서글프진 않았을지, 모기라도 많이 물린 날엔, 피곤하다는 핑계로 아이 샤워를 못 시킨 나를 원망했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지내왔던 수많은 날들이 지나 꼬물거리던 아이에서 자기 자리를 잘 지켜내는 멋진 학생이 됐다. 아이를 키워본 엄마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들이 결국에는 다 지나간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들뜨지 않는 겸손함과 자책하지 않는 의연함이 장착된다. 살아내기 위해 감정은 퇴화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선으로 진화된다. 그렇게 잃어버린 줄 만 알았던 감정들이 소설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무표정하게 대응하는 서비스업체 직원도, 내게 유난히 쌀쌀맞은 선배도, 귀찮은 듯 말끝을 흘리는 매장스텝들도 사실 그들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각자가 지나는 계절이 다 달랐던 것이다.

시시하게 지나가는 것 같은 오늘, 누군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기를 견디지 못한 채 한파를 견디는 이들이 있고, 누군가는 쏟아지는 햇살과 비옥한 땅에 있지만 초조하게 새싹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걷는 이 계절이 뜨겁고 열정적인 여름이라면 곧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오게 된다. 꽃이 피는 시기도 꽃이 지는 시기도 분명히 온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름인데 겨울이라고 느낀다 거나 겨울인데 영원히 겨울일 거라고 단정 짓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하루하루 무사히 지나가는 것에 감사하며 다가올 계절을 맞이해 보려고 항상 노력하는 일이다.


[디자이너가 바라본 cover design]

두 개의 문이 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건 공간이 아닌 벽이다. 한 여인이 손잡이를 잡고 들어가기를 주춤하는 듯한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에 개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라고 정의되어 있지만 영화나 문학에서 문은 단순히 구조물만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새로움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수많은 가능성’을 말한다. 문을 열어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 문 앞에 웅크려 앉아만 있을 것인지, 혹은 다른 문을 열어 볼 것인지 결정에 따라 다양한 상황이 펼쳐진다. 문틀과 문은 아이보리 베이지색으로 여인의 옷과 스킨컬러와 같은 색으로 표현되었다. 마치 문과 여인이 하나처럼 보인다. 결국 주인공들은 수많은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각자 만의 닫혀버린 문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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