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병아리로 하나 되던 그 시절
엄마와 오빠가 무슨 얘길 하고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양미간을 한껏 찌푸려봐도 결국 떠올리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사진을 찍어놓은 거 마냥 또렷이 떠오르던 장면들도 이제는 희미하다. 이제는 그것들이 사실인지도 잘 모르겠다 남는 건 그에 따른 희미한 감정들일뿐. 당시 나는 화가 많이 났었다는 사실과 속으로만 웅얼거렸던 그 말 한마디만 남은 것처럼 말이다.
'말로 표현을 할지 몰라서 그렇지 나도 알아 그 무슨 기분인지' 내가 생각해도 좀 멋진 말이라며 속으로 좀 많이 뿌듯해했던 거 같다.
그 오빠라는 자식은 겨우 나보다 세 살 많았을 뿐이면서 나만 빼고 엄마와 속닥속닥 했다. 마치 자신이 나보다 훨씬 어른인양. 한 번은 너무 부아가 난 나머지 오빠 얼굴을 손톱으로 확 긁었는데 오빠가 좀 많이 울었다. 피와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보자니 좀 많이 미안하긴 하면서도 어른인 척해봤자 결국 너도 아프면 우는 어린애라는 고소한 마음이 더 컸다.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그 시절 오후반 수업을 끝나고 나오면 대략 서너 시쯤이었는데 아이들은 각자 알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부모님들이나 다른 어른들이 마중을 나오일은 거의 없었다 비가 올 때 말고는. 나의 어머니는 결코 비 오는 날도 온 적이 없었지만.
<엄마는 왜 한 번도 우산을 들고 날 기다리지 않았어?>
<아닌데 나 너 데리러 갔는데>
<아닌데 엄마는 한 번도 안 왔는데? 엄마는 관심 없었는데... 비가 오는지도 내가 우산이 있는지 없는지도... >
독립심을 키우는 방법이었다나 뭐래나 하며 나름' 합리적일 것' 같은 주장을 펼치려 고군분투 중인가 보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꽤나 격양되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왠지 엄마의 양미간이 한껏 찡그려져 있을 거 같다. 평소라면 딱밤을 세게 한 대 때렸을 건데. 엄마는 내 양미간이 찌푸려질 때마다 엄지를 지지대로 검지에 온 힘을 다해서 튕긴다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긴다며. 이번에는 내 차례인데 ' 딱!!! 예쁜 얼굴에 주름 생겨!' 아... 아쉽다.
나는 엄마가 오지 않았다는 거에 별로 상처 받지 않았는데 엄마 반응이 재미있어서 그냥 뒀다. 장난 삼아 한번 툭 던진 말이었는데 엄마는 뭐가 되게 미안한지 이런저런 이유들을 다 가져다 애써 부정하거나 옹호하려 한다. '당시에는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서 일을 해야 했으니까'..로 시작해서... 끝내는 나를 데리러 왔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까지. 다 큰 나를 통해 어린 나를 달래려는 엄마가 좀 귀엽기도 하고. 그러다 엄마가 조금은 미안해해도 될 거 같다 라는 생각도 드는 게... 갑자기 내가 울컥하는 거다. '그러게 왜 엄마는 한 번도 우산을 쓰고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엄마가 조금은 나한테 미안해해도 되겠다 싶다.
교실이 있던 건물에서 학교 정문까지는 꽤나 멀었는데 학교 운동장을 곧장 가로질러 나가도 한참을 걸어야 커다란 정문이 나왔다. 그 당시 우리 학교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컸다. 동네 하나에 학교 하나가 있었으니 '우리 학교가 이 동네에서 제일 커'라고 말하는 게 사실상 말도 안 되는 건데, 비교대상이 없으니 비교가 안 되는 게 자명하고, 게다가 다른 학교는 가본 적도 없어서 '우리 학교가 이 동네에서 제일 커'라는 건 전혀 신빙성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그런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나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학교'를 다닌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고 '제일 큰 우리 학교는 '늘 내 자랑이었다. 난 그게 뭐라고 '우리 학교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커'라며 같은 반 친구들에게 엄마에게 아빠에게 그리고 같은 학교를 다니는 오빠에게 매일 말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학교 운동장 끝에서 끝을 걷는 것만큼 보다 세배는 멀었다. 학교 정문을 빠져나가 학교 밖 담장으로 쭉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면 학교 후문이 나오는데 거기 학교 후문으로 시작해서 또 20분을 족히 걸어야 내가 살던 아파트가 나왔다. 학교 후문으로 곧장 가면 정문을 거쳐가는 거보다 10 분은 훨씬 아낄 수 있는데도 나는 늘 학교 정문이었다. 학교 후문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았다. 학교 후문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학교에 맞지 않게 너무 초라하고 작고 볼품없었다. 학교 후문은 그냥 문일 뿐이었다. 여기서 나가면 저기로 연결되는 단순한 문. 그 문을 통과하는 건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는 일이었다.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우리 학교 정문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다. 정문이 엄청나게 커다래서 대여섯 명의 소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일열로 쭉 늘어져도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었다. 어른 두 명이 온 힘을 다해 밀어내야 겨우 열리는 무거운 철문은 어떤 위엄이 있었다. 모로코인지 바로크인지 어떤 동화책에서 본 것 같은 아무튼 이 동네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그 하늘색 무거운 철문은 그냥 문이 아니었다. 여기서 나가면 저기로 연결하는 그런 하찮은 문이 아니라 특별한 문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우리 학교 정문을 통과하면 거기에는 동물원이나 놀이동산에만 가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허리가 구부정해서인지 겨우 내 키만큼 뿐인 할머니는 매일 리어카를 끌고 나와 딸기 바닐라 쵸코맛을 하나씩 올린 삼단 콤보 아이스크림을 200원에 팔았다. 그 옆에는 할머니보다는 조금은 젊은 아저씨가 있었는데 솜사탕을 아주 잘 만들었다. 불량식품이라며 절대 못 먹게 하던 엄마가 없으니 내 세상이었다. 학교 앞 정문 앞은 앨리스가 갔던 원더랜드보다 더 재밌다. 100원짜리 동전을 두 개를 넣고 드르륵 돌리면 거기선 반지도 목걸이도 나왔다. 50원만 있으면 문어발도 뽑고 딱지도 뽑고 아이스크림도 뽑고 했다. 꽝도 있었는데 그 당시 짝꿍이던 L 은 수시로 꽝을 뽑았다. 걔가 꽝이 나오면 나는 초록색 둘리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었는데 내가 꽝이 나오면 걔는 안 나눠줬다. 한입도 안 줬다. 나쁜 지지배. 세상에는 꽝이 존재한다는 걸 누군가는 꽝을 뽑을 수밖에 없다는, 나는 나눠줘도 누군가는 내게 나눠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인생의 참 교육을 거기서 배운 게 아닐까 싶다.
단돈 100원이면 50개도 넘게 들어있는 작은 빨때 과자도 살 수 있었는데 그 빨때 과자를 나름대로 잘 먹는 방식이있다. 절대 손가락이나 손톱을 이용해서 쭉 빨아올리면 안 된다. 그러면 작은 빨때에 가득 담긴 크림들이 깨끗하게 쪽 빠지지 않는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살살 돌려 가며 적당한 힘으로 쭉 빨아올려야 그 안에 있는 크림을 깨끗하게 싹 다 먹어치울 수 있다. 참 그 빨때 과자는 딸기맛이 최고다.
비단 이런 물질적인 것들 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우리 학교 정문 앞에는 뭔가 더 특별한 게 있었다. 노랗고 조그만 애들이 작은 상자 안에서 삐약삐약 하는 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대 여섯의 갈래 머리 소녀들이 작은 상자 주위로 빙 둘러앉아 연신 감탄사를 외쳤다. '우와 우와 우와' 그중에 한 명이 손을 뻗어 한놈에게 다가가자 까맣게 그을린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의 손이 아직은 작고 뽀송한 한 아이 손등을 착 하고 때린다.
"만지면 못써, 사람 손 타면 죽는 거야 야들은. 안 살 거면 만지지 마 요놈들아"
할머니 손에 마구잡이로 잡힌 두 마리의 병아리들이 검은 비닐봉지에 안에서 집에 오는 내내 삐약거렸다. 한걸음 한걸음 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히 걸었다. 30분이면 벌써 도착했을 그 길이 한 시간도 넘게 걸렸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토를 했던 기억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봉투 안에 있는 병아리들을 흔들면 안 될 거 같았다.
엄마한테 안 물어봤는데 혼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아예 들지도 않았다. 무슨 배포였는지 몰라도 엄마는 기쁜 마음으로 이 두 병아리들을 반길 거라 생각했다. 엄마가 병아리들을 보고 즐거워했는지 싫어했는지 혼을 냈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분명한 건 병아리들이 새 보금자리를 가졌다는 거다. 좋은 집이었다 그전보다 훨씬. 걸레였는지 수건이었는지 모르는 그러나 충분히 보드랍고 깨끗한 것이 상자 바닥에 깔렸고 작은 간장종지 비슷한 곳에는 물과 할머니한테 덤으로 받아온 노란 모이가 담겼다. 엄마는 좋아했던 게 확실하다.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제법 늦었었나 보다. 병아리들을 조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불렀다. 나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또 밥 안 먹는다는 게 인사냐'라는 엄마의 핀잔을 뒤로 한채 다시 병아리들에게 빠져버렸다. 작은 상자 앞에 딱 달라붙어 삐약삐약 거리는 노란 아이들을 쳐다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꼬물꼬물 노란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발만 제외하곤. 발은 솔직히 안 이뻤다. 노란 솜뭉치에 실로 어울리지 못하는 발이었다. 민둥 살에 주름이 가득 있고 뾰족한 발톱이 나있는 그 발은 참으로 이상하게 생겼다만 노랗고 보드라운 털과 작은 날개 만으도 충분했다. 발... 정도야 뭐... 어찌 모든 게 다 예쁠 수 있겠나. 조심스럽게 집게손가락을 상자 안으로 넣었다. 아주 살짝만 만져보겠다는 심산이었다.
‘ 손타면 죽는 거야…. 손타면…. 죽는 거야.. 죽.. 는.. 거.. 여’라는 주름 가득한 손을 가진 그 할머니의 말이 귀에 웅웅하고 맴돈다. 작은 상자 옆에서 쭈그린 채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삐약이들에 잘 자라고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여느 날과 다름없이 엄마는 빨리 일어나라며 소리를 지른다. 평소라면 엄마가 방까지 쳐들어와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낼 때까지 버텼을 건데 그날은 엄마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번쩍하고 눈을 떴다. 다행히 예쁜 병아리들은 삐약삐약 거리고 있다. 낯선 곳에서 길고 긴 밤을 잘 보낸 듯하다. 학교에선 하루 종일 병아리들 생각뿐이다. 병아리들이 뭘 하고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잘 놀고 있는 걸까 이름은 뭐라고 지어야 하는 걸까. 학교 수업이 머릿속으로 들어올 리가 없다. 온통 병아리들 뿐이다. 그날은 동네에서 제일 큰 우리 학교 정문을 가지 않고 곧장 후문으로 달렸다. 그날도 그다음 날도...
병아리들은 잘 있다. 다음날 아침도 삐약이들은 잘 있었고. 그다음 날 아침은 잘 있지 못했다. 삐약이들은 단 이틀만 잘 있었고 그리곤 잘 있지 못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원래 병아리들은 약하고 잘 죽고 한다고 나보다 겨우 세 살 많은 그 오빠라는 자식이 얘기하거나 말거나, 나는 만지지 않았는데... 나는 만지지 않았다며 울었다. 울면서 앞으로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우리 학교 정문으로 다신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결국 그 다짐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L이 뽑았다고 자랑하는 반지 하나에 무너져 버렸지만. 그래도 다른 병아리들에게 눈길 한번 안 줬다. 그게 내 첫 병아리들에 대한 예의였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몇 가지 사실 중 하나는 '말로 표현을 할지 몰라서 그렇지 나도 알아 그게 무슨 기분인지'는 노래 가사였다는 것과 어른들도 운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