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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Mar 18. 2016

참치마요

맛없는 학식에 관한 단상

배가 고팠다. 학생식당에 가서 참치마요 식권을 끊었다. 첫눈에도 양이 모자라 보였다. 밥을 더 받았다. 싱거웠다. 소스를 더 부었다. 짭짤하니 먹을 만했다. 아니 사실 그리 먹을 만하진 않았다. 그래도 못 먹을 만하지도 않았으므로 숟가락을 열심히 놀렸다. 옆자리에서는 남녀 한 쌍이 돈까스를 먹고 있었다. 그 돈까스가 먹음직스러워 보인 건 처음이었다. 차가운 소스덩어리 밥을, 그래도 살겠다고 들이켰다.


사진출처: 15학번 송모 학우


서서히 배가 차올랐다. 동시에 슬픈 부끄러움도 차올랐다. 나는 왜, 배 같은 게 고파서, 이런 걸 돈 주고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왜 인간은, 배가, 고픈 걸까. 누구든 무언가를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거대한 물고기의 죽음과 농부의 무거운 피땀, 평화로운 해초의 안정성 같은 것들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뜯어 먹는다. 오직 살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거기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역시 알 수 없다.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파 오는 느낌은 삶의 공허가 위장을 짓누르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허기는 곧 죽음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다. 그리고 그 죽음의 냄새를 피하려 나는 부끄러운 배부름을 선택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땀내 포근히 풍기는 푸드포인트로 말이다. 모두 두 분의 성실이 야무지게 들어찬 돈이다. 1교시보다 일찍 일어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배웅하고 집안일을 하는 어머니. 나는 어떤가. 최근 나는 학기가 시작한지 이 주가 지나서야 처음으로 빨래를 했다. 지금은 물론 모두 말랐지만 아직 걷지도 않았다. 실은 집에서 올 때 가져온 캐리어도 정리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바깥 일과 집안 일, 그 두 가지를 해내는 부모님의 노력은 차가운 참치마요를 거쳐 내 초라한 생존의 한 조각이 되었다.


참으로 삶이란 식어버린 밥처럼 덧없고 보잘것없다. 나는 배고파야 했던 내 처연한 필연성이 괴로웠다. 그렇게 배불러야 했던 인과의 억압이 아팠다. 나는 배가 아팠다. 역시 찬밥은 먹는 게 아니었다. 그런 건 애초에 내다 버렸어야 하는 것이다. 내다 버렸어야 하는 것이다. 내다 버려 졌어야 했다고, 나는 되뇌며, 그럼에도 극구 깨끗이 비워버린 접시를 퇴식구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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