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감각하게,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갈 때가 있다, 시원(始原)과 재의 물위를
떠다니는 펠트 백조처럼
이발소의 냄새는 나를 소리쳐 울게 한다
난 오직 돌이나 양털의 휴식을 원할 뿐,
다만 건물도 정원도, 상품도, 안경도,
승강기도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발이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
내 그림자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그러나 붓꽃 한 송이를 꺾어 공중인을 깜짝
놀래킨다든지 귀싸대기를 한 방 먹여 수녀를 죽인다든지
하는 건 통쾌한 일이리라.
꽥꽥 소리를 질러대며 시퍼런 칼을 품고
거리를 활보하다 얼어 죽는 건
근사한 일이리라
나는 더 이상 어둠 속의 뿌리이고 싶지 않다.
머뭇거리며, 꿈꾸듯 몸서리치며, 아래로,
대지의 축축한 내장 속으로 길게 뻗은 채,
매일매일 빨아들이고 생각하고 먹어치우는.
내게 닥칠 그 숱한 불행이 싫다.
더이상 뿌리와 무덤이고 싶지 않다.
쓸쓸한 지하실이고 싶지 않다. 고통으로 죽어가며,
더이상 얼어붙은 시체로 그득한 창고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가 감옥의 얼굴을 하고 도착할 때
월요일은 석유처럼 불탄다.
하루가 흐르는 동안 월요일은 찌그러진 바퀴처럼 울부짖다가
밤을 향해 뜨거운 핏빛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는 나를 밀어붙인다, 어느 구석으로, 어느 습기 찬 집으로,
창으로 뼈다귀가 나오는 병원으로,
식초 냄새 풍기는 어느 구둣방으로,
갈라진 틈처럼 무시무시한 거리로.
유황색 색들이, 내가 증오하는 집들의 문에
걸린 소름끼치는 창자들이 있다.
커피 포트에 잊고 처박아둔 틀니가 있다.
수치와 공포로 울어야 했을
거울들이 있다.
사방에 우산이 있다. 그리고 독약이, 배꼽이.
나는 차분히 산책을 한다. 두 눈을 뜨고, 구두를 신고,
분노하며, 망각을 벗 삼아,
걷는다. 사무실과 정형외과용 치료 장구점들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철사줄에 옷이 널려 있는 뜰을 지나친다.
팬티와 타올과 셔츠가 더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파블로 네루다, <산책>, 김현균 역
구름은 모든 존재를 흐린다.
두터운 모호함이 그물처럼 퍼져나가
촘촘히 온 빛을 틀어막는다.
습기는 눅진하게 떠다니며
닿는 모든 숨을 얼마간 막는다.
생의 한계처럼
느릿한 익사처럼.
그런 무거운 우울 가운데 산책을 한다.
주로 비참하고
가끔 괜찮다.
견고한 구름 속 빛의 덩어리는
낙심과 위로를 함께 건넨다.
저 너머 하늘을 상상하게 하면서
동시에 거기까지, 틀어막는다.
실재의 균열 가운데 아른거린 희망이
언뜻 드러나고
이내 숨는다.
간혹 덥게 내린 비가 그치고
태초의 하늘이 드러날 때가 있다.
웅덩이에 담긴 맑은 풍경
과장 없이 그대로를 비추는 순진함
렌즈에 막힘없이 드러나는 깨끗함
그것은 방금까지 우울했던 이를 홀린다.
우울을 털어내려 걷던 나는 기를 쓰고 찍는다.
세상에 저런 하늘도 있다.
그런 구름 가운데서도 기어이
이런 세계가 피어난다.
분명 그런 하늘 같은 삶도 있을 것이다.
구름이 개이듯 그리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술에 가까운 바람으로 풍경을 담는다.
하지만 찍힌 하늘 바깥 모든 곳은 구름이다. 결국
주로 구름이고
가끔 하늘이다.
네루다는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고 했다.
산책은 분명 그런 기분으로 하는 것이다.
지병같은 허무를 앓고
쉬이 발을 빠뜨릴 것 같은 비참의 습기를
질척이며, 꾸역꾸역 걷는 것.
그 지긋지긋함들 가운데, 그래도 견디며
밤으로, 밖으로, 핏빛 발걸음을 이끄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