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문명, 무엇이 무서운가?
낮동안 퍽 우울했다. 노래를 들으면서 산책을 했더니 기분이 꽤 나아졌다. 역시 틀어박혀 있는게 문제였다. 내친김에 학교에서 양덕까지 감자밭 산길로 걸어나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했다.
마침 해질녘의 하늘은 구름과 합하여 꽤 예쁜 빛깔을 띄었다. 덥지 않게 간간이 살랑이는 바람은 살짝 잦아든 습기와 함께 풀내음을 실어주었다. 걷다 보니 땀도 살짝 나서 셔츠를 벗고 속티만 입은채 가볍게 걸었다. 표지판은 없지만 방향이 맞으므로 길 닿는 어디로든 갔다.
몇 번 길을 잘못 들었다. 다행히 금방 되돌아와 큰길로 다시 합류했다. 대충 가다가, 이쯤이면 내려가야겠다 생각할 무렵 왼쪽에 난 길로 내려갔다. 조금 내려가니 집이 보였다. 양덕 아파트단지가 아니라,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집 몇 채만 달랑 있었다. 내 기척을 느끼고 저쪽에서 무슨 산짐승이 도망갔다. 그래도 사람이 사니 저기로 가면 되겠다 싶었다. 가는데 길이 없어졌다. 헤맨 끝에 다시 큰길로 올라갔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핸드폰 배터리는 14%. 듣던 음악은 끈지 오래다. 조난신고는 어디로, 어떻게 하지. 어디라 하지. 산에서 자도 되나. 비 안오려나. 멧돼지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에 송전탑이 보였다. 송전탑 쪽으로 올라가서 둘러보았다. 둘러보니 알겠다. 나는 한참 지나쳐버렸다. 저쪽에는 법원을 한참 지난 기쁨의 교회가 보였다. 나머지는. 온통. 산이었다. 그리고 그 왼쪽 저 멀리 당초 목표로 했던 아파트단지가 보였다. 어떻게 보였느냐면, 불이 켜졌기 때문에.
다시 아까의 큰길로 돌아갔다. 표지판에 어느 아파트까지 2.8km라고 나왔다. 그 방향은 저 아래, 어둠의 길이었다.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나무는 울창해지고 길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갈 수밖에 없었다. 저 무서운 내리막이야말로, 가장 덜 무섭고 덜 위험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살짝 발목도 접질렀지만 뭐라도 들린 것처럼 미친 듯이 내려갔다.
자연 앞의 인간은 무력하다. 산에서 유일한 인간의 흔적은 길밖에 없다. 그렇다고 길이 인간을 닮아 합리적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길은 몇 번을 속였고, 이어지는 듯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끊어지곤 했다. 자연은 비합리적인가? 산짐승은 나를 피해 달아났다. 풀벌레는 그저 그 자리에서 울었고, 새는 그저 나무에 앉아 있다 다른 나무로 자리를 옮겼으며, 시간에 따라 울었을 뿐이다. 오히려 비합리적인 것은, 평소라면 조용했을 그 곳을 급박하게 오가던 나였다.
나는 공포영화에 대해 배우는 과목 시험을 공부하다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공포와 서스펜스를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시련>이나 <영 굿맨 브라운>에 나올법한 주술 의식이 어디선가 벌어질 것 같았다. 원시, 야만, 마법, 신비 어느것이 들어서도 이상하지 않을 곳. 남성적 문명에 대비되는 여성적 자연. 그 알 수 없음의 공포. 어둠과 그 어둠 만큼이나 짙은 불확실성. 이게 공부였다. 나는 근대적 질서가 쌓아올린 문명의 흔적에 점점 목말라갔다.
한참 내려가니 수풀 너머로 붉은 가로등불이 보였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뭔가를 붙들고 간다. 그러니까 그 불빛이야말로 인간과 문명, 안전을 담보하는 찬란한 빛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만들어진' 작위적 구원이었다. 나는 전등을 향해 모이는 오징어처럼, 소비사회의 스펙터클을 좇는 프로 소비자처럼 거기로 갔다. 알고 보니 아까 그 집들이었다. 저기서 개가 짖고 있었다. 어디선가 장작 타는 냄새가 났다. 이 모든 사육과 파괴와 개발 및 유지의 흔적이 반가웠다. 동시에 나를 향해 열심히 짖는 개는 무서웠다. 나는 그 앞을 재빨리 지나갔다.
길은 급선회하여 다시 저 빛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합리성을 표방하는 근대적 질서는 인간을 이렇게 속인다. 길은 한참을 뱅뱅 돌아 돌아서, 겨우! 아파트 단지까지 이어졌다.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반가웠다.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벽과 위압적일 정도로 수직적인 아파트가 감동적이었다. 가로등이 이어져 있었다. 조금 더 나가 최초의 편의점을 발견했을 때, 나는 무사히 이 근대적 질서에 안착했다는 걸 느꼈다.
처음 보는 아파트 단지였지만 구조야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차도가 아니라 인도로 걸었다. 신호등에 맞추어 길을 건넜다. 안도 속에서, 우울을 앓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일상' 같은 모호한 단어에 괴로워하다니.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목숨'은 더 피부로 와닿는 단어가 아닌가. 다시 살아났으니, 착실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건실성실하게 기타등등 나는 산업화의 역군이다!
이렇게 나는, 모두가 판에 박힌 것처럼, 예측할 수 있는 개발과 문명과 주거의 형태 속에서 무사히 한 명의 레고인간이 되기에 성공했다. 근데 사실, 여기는 무섭지 않나? 저기서 나무에 파묻히거나, 여기서 나무로 된 책을 붙들고 텍스트에 파묻히거나, 어느 쪽이든 나는 억압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가짜 가로등을 좇거나, 인간이 길들인 개가 나에게 짖는 소리에 안도를 보내거나, 엇나가는 것 같아도 가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공포가 아닌가? 근대적 질서가 멀쩡한 수학여행길도 망치고 지하철 공사 노동자도 죽이는 이 세계 말이다. 무섭지 않나. 하는 생각, 을 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책은 읽지 않고 이런 글이나 끄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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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유하, <오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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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무엇이 중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