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외로움의 서글픈 역설
가게 이름은 ‘꼬마루소’였다. 어린이용 그림책 서점이었는데,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 깔끔하고 아담한 인테리어였다. 가게 구석에는 신발을 벗고 올라갈 수 있는 평상이 있었다. 가면 언제나 젊은 어머니와 7살언저리 아들이 함께 가게를 보곤 했다. 나는 상가 2층 변두리에 자리한 그 서점에 몇 번 가보았다. 처음에는 우연히 군것질거리를 가지고 2층을 둘러보다가 들어간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이미 아동용 그림책을 뗀 상태라 별로 흥미를 끄는 책은 없을 것 같았지만, 역시 그림책 서점답게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었고, 나는 아무거나 뽑아 평상에 앉아서 잠깐 읽어보았다. 곧 아이가 와서 내가 들고 있는 군것질거리에 관심을 보였다. 어차피 얼추 알고 있는 내용의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나는 점차 그 아이의 부러움 섞인 눈빛에 더욱 흥미가 갔다. 나는 가게 주인인 어머니에게 티가 나지 않게 그 아이를 놀렸다. 아이는 곧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왔고, 상황을 파악한 그분은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며 아이를 타이르고 내게 사과했다.
사실상 내가 꼬마루소에서 즐겼던 것은 그것이었다. 나는 그 뒤로 몇 번이고 갈 때마다 손에 먹을 것을 들고 갔고, 나중에는 아예 내가 읽을 책까지 따로 가져가서는 평상에 앉아 읽었다. 번번이 아이는 내가 먹는 것을 탐냈고, 나는 그 때마다 아이를 살살 놀려서는 결국 울게 했다. 내 기억속에서 마지막으로 갔을 때 아이는 유난히 크게 울었고,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호되게 아이를 혼냈으며, 더욱 정중하게 나에게 사과했다. 그 때, 내가 무언가 굉장히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악을 행하고도 손님이기 때문에 되려 고개 숙여 인사를 받을 때의 비뚤어진 권력에 취해 있었다. 그 사악한 쾌감 가운데, 남 앞에서 피해자인 아이를 혼내고 가해자에게 헤아림을 구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가책을 느낀 나는 다시 거기에 가지 않았다.
사실 나는 2층에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는 중계 은행사거리 상가 1층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쯤부터 중학교 때까지 했던 것 같다. 은행사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강북 학원가의 중심지이고, 나 역시 거기에서 여러 학원을 전전했다.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마다 내가 ‘산만하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그 평가로 인해 어머니에게 다시금 혼나곤 했다. 은행사거리는 교통편도 애매해서 지하철 역과는 너무 멀고, 버스를 타지 않으면 40분쯤 걸어야 하는 거리다. 초중생에게 그 거리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학원에 가는 길은 곧 학원이 끝나고 어머니를 보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나는 늘 귀찮음과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을 반반씩 안고 버스를 탔다.
학원에 다니지 않을 때에는 학교에서 돌아와 컴퓨터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았다. 지금이야 10분이면 두 단지를 종으로 가로질러 가지만 그 때는 20분씩은 걸렸던 것 같다. 어릴 때에는 모든 길이 멀고 길었다. 항상 집에 가면 숙제를 하거나 책을 보는 등의 생산적인 활동을 하리라 다짐했지만 언제나 가방을 놓고 교복을 벗고 나면 습관적으로 컴퓨터 전원부터 켰다. 작은누나는 수험생, 큰누나는 대학생이었고 부모님은 8시 전까지 들어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그 시간 동안 온전히 심심함을 달랠 오락거리에 몰두했다. 매번 문 열고 들어오는 부모님의 속도보다 내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끄는 속도가 늦었고, 나는 어차피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부모님이 뻔히 아실 것을 아는데도 괜히 들켰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처음 스스로 라면을 끓인 것도 그쯤이었다. 급식과 저녁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라면을 꺼내어 조리법에 따라 물을 채워 라면을 끓였다. 맛있을 뿐더러 내가 해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날 저녁 어머니께 이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라면만 너무 먹으면 몸에 안 좋다는 말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싱크대 서랍을 열면 언제나 라면이 한두 묶음씩 있었고, 떨어질 것 같으면 채워졌다. 아마 어머니로선 그것이 최선이었으리라.
어머니는 옷가게를 한 것 말고도, 그 뒤로 건강식품을 파는 네트워크 마케팅도 했고, 내가 수험생일때에는 불가마에서 매점도 운영했으며, 대학교 때에는 또 다른 건강식품 사업을 하였다. 언젠가 나는 안방에서 빈둥거리다가 거실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것을 잠깐 엿들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옷가게를 할 적에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는 말을 지나가듯 했다. 나는 불현듯 눈물이 나왔다.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 의미 없이 어떤 모니터라도 굳이 켜서 쳐다보던 그 게으른 날들은 사실 그거라도 쳐다봐야 했던 것이었다. 당시의 심심하다는 기분은 평평한 화면만큼이나 얄팍한 표면에 불과했고, 그 기저에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던 어머니의 회상, 그리고 그 아래 더 깊숙한 곳에는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알아채지도 못한 외로움이 몇 년을 지나 그렇게 찾아왔을 때 나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내가 이렇게 뒤늦게라도 괴로워한다면 그건 어머니의 잘못일까? 어머니는 한창 자랄 때의 아이를 집 안에 방치한 나쁜 어머니인가?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야속해서 눈물이 나왔을까? 알 수 없다. 분명 한두 가지는 아닐 것이다. 사안은 먹을 것으로 아이를 놀려 기어이 울리던 못된 나처럼 단순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그때 도리어 아이를 혼내고 내게 사과해야 했던 꼬마루소 어머니의 상황이나 그 아래층에서 옷가게를 하던 우리 어머니의 상황이나 별 다를 것이 없다. 걱정 없이 자식 학원 보내고 가계부 쓰기 위해 프림 들어간 설렁탕을 먹고, 그러다가도 손님이 오면 ‘둘러보세요’ 하며 일어나 손님이 갈 때까지 함께 서있어야 하는 그 상황 말이다. 또 생각하면 아마 그때 꼬마루소 주인 어머니는 나와 아이 중에 누가 더 크게 잘못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군것질거리에 기웃거린 아이를 혼내야 했을 것이다. 쉬이 나쁜 어머니라 손가락질할 수 없다. 아이는 아팠을 것이다. 앞의 두 문장은 선후가 없다. 그저 끝없이 함께 갈 뿐이다.
얻어맞듯 찾아온 외로움과 꾸준히 이런저런 맞벌이를 이어온 어머니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그 때의 꼬마루소로 돌아가 사과하고 싶다. 거기에 있지 않으면 나처럼 혼자 집을 봐야 했을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집안을 꾸리고 아이를 기르기 위해 역설적으로 아이를 혼내야 했던 어머니에게, 그렇게 먹고 싶어하던 군것질거리들을 싸들고 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다. 상가 가게는 보통 전환이 빠르고 오래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수많은 맞벌이 어머니들의 가게는 그렇게 하루가 멀게 문을 열고 닫는다. 그때 그 가게들을 꾸리던 분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때보다 더 많아진 자영업자와 그보다 더 많은 프랜차이즈가 가득한 가운데, 아주머니홀로 지키는 가게를 보면 문득 여러 생각이 스친다. 임대문의 표시가 붙은 유리문을 보면 괜시리 서글픈 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