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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Apr 25. 2016

과일소주

동시성에 대한 허망한 욕심

    월요일이었다. 월요일답게 따분한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학회에 갔다 와서 다시 공부했다. 한줄요약이 가능한, 그야말로 간단해빠진 하루였다. 그때 동아리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들 있으니 막걸리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집과는 거리가 조금 있지만, 날씨도 포근하니 얼굴이나 잠깐 비추고 걸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막차를 타고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들렀다. 분명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돼지 껍데기 두루치기라니, 너무했다. 정말이지 너무했다, 생각하며 묵 집어먹듯 후루룩 먹었다. 그리고 막걸리를(그렇다. 그 순수악), 그놈의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고는 곧 가게가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때 걸어갔어야 했다.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과자 몇 개와 소주를, 정말이지 온갖 색상의 소주를 샀다. 근처에 있는 한 친구의 자취방으로 갔다. 술자리는 몇 번의 눈치게임과 랜덤게임 그리고 진실게임을 거쳐 두세 명씩 따로 이야기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도수 높은 클래식만 한두 잔 마시고 몇몇 조악한 코드로 기타 반주만 잔잔하게 깔았다. 집 주인은 자리에 누웠고 누군가는 비몽사몽했으며 더러는 쉼 없이 마시고 더러는 이를 받아주며 수습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다른 친구 집으로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러자 비몽사몽하던 이가 깨어나 쉼 없이 마시던 이들과 합세하여 수습하던 이를 박해했다. 나는 이대로는 여러모로 위험할 거라는 판단에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건물 전체에서 나 혼자 사는 자취방이니 뭘 해도 상관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주인과 수습하던 친구를 두고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죽음을 일으키는 네크로맨서처럼 좀비들을 이끌고 집까지 걸어갔다. 깩깩대며 걸어온 그들은 집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더 마실 술을 사서 잠깐 바다로 갔고, 나는 그동안 이부자리를 준비했다. 그 술은 결국 따지도 않은 채 지금까지 방에 있다. 우리는 새벽 6시에 잠들었고, 아침에 둘이 일어나 어찌어찌 택시를 타고 기숙사에 들어갔으며, 나는 계속 자는 나머지 한 명을 두고 9시에 일어나 수업을 갔다.


    왠지 놀 때만큼은 다음 날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오히려 밤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어디선가 샘물처럼 퐁퐁 솟아오르는 자신감이다. 그 자신감처럼 정말 세 시간만 자고 일어났는데도 생각만큼 정신없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일어나는 데에 성공하면 기분이 또 뿌듯하고 으쓱한다. 무슨 큰 유혹을 이긴다거나, 설령 그 유혹에 넘어가 버렸대도 이로 인한 시련을 겪고도 용케 당당히 살아남은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숱한 동화나 이야기에서 터부로 여기는 것들을 대놓고 어기고도 벌을 받지 않는 기분과도 비슷할 것이다. 선악과를 잔뜩 따서 베어 먹고 파이도 구워 먹고 잼도 만들어 먹고 말려서 심심할 때마다 한 조각씩 집어먹고 씨는 아무데나 심어 선악 농장이 무럭무럭 자라는데도 죄도 모르고 에덴 동산에서도 추방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살았는데도 내일이 거짓말처럼 이어지는 모양이다. 꼭 1UP가 하나 더 있기라도 하듯, 생물학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게임에서 에디터를 쓰듯, 나는 세상의 법칙에서 깍두기가 되어 사기처럼 쓰러지지 않고 깨어 있는 초긍정적 버그다. 일부러 스스로를 극한 상황까지 몰아넣고 거기서 살아남아 보는 것은, 함께할 수 없는 위반과 생존을 동시에 거머쥠으로써 초월과 불멸에 대한 환상을 안겨 준다.


    그리고 과일소주가 꼭 그런 느낌이다. 유자, 블루베리, 복숭아, 사과, 자몽, 청포도 등등의 맛이라 하는 그들은, 딱히 해당 과일이 들어가 있지도 않으면서 액상과당과 합성착향료, 그리고 표지의 색상으로 맛을 만들어 무슨 도수 따위는 장식인 과실주처럼 보이게 한다. 그들은 ‘참’ 혹은 ‘처음처럼’을 필두로 하는 소주 브랜드의 기호로써 소주와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시사하면서도 과일 맛이 나고 도수가 낮은 순한 술임을 내세운다. 그렇게 ‘소주치고는’ ‘생각보다’ 세지 않고 달달하면서도 상큼한, 그래서 꼭 음료수 같다는 판단으로 이끌며 경각심 없이 마시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내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유흥에 상당량의 부담을 덜어 준다. 말하자면 과일 소주는 소주와 주스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졌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하고 속인다. 그리고 마시면서 취기가 오르면 더욱 알코올에 내성이 생겨 더욱 술 같지 않게 느껴지고 마시는 데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방에서 쉼 없이 마시던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사실, 조금만 자고 일어난 그 하루는 종일토록 처참하리만치 집중할 수 없다. 나는 어딘가 불길하게 무겁고 뻑뻑한 감각을 2교시 내내 품고 견뎠다. 전자기기를 절대 허용하지 않으며 내규도 엄격하고 인원도 적은 3교시에는 교수님의 앞에서 졸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몸을 꼬고 여기저기를 꼬집고 긁고 눈을 빠르게 여러 번 깜박이는 가운데, 왠지 수업 내내 교수님이 나를 의식하지 않으려 하지만 묘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4교시에는, 앉아서, 다소곳이 눈만 감고 졸았다. 끝나고 보니 옷 왼쪽 가슴께가 살짝 침으로 젖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하루였다. 마찬가지로 과일소주를 퍼마시던 그들은 오후의 중간쯤 되어서야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 명은 모든 수업을 빠진 채 괴기스럽도록 평온한 표정으로 동방에 들어왔다고 한다. 또 한 명은 다행히 5교시만 있는 터라 수업을 갔다가 나오면서 나와 마주쳤는데, 대로변에서 미안하다고 연신 큰절을 했다. 나는 두 번 절 받길 원치 않았지만 상황이 재미있으므로 기꺼이 여러 번 받아주었다. 그 때 나는 6교시 수업을 가는 중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냥 결석하고 나와버렸다. 이것이 위반과 생존, 소주와 주스를 동시에 향유하려던 어리석은 존재들의 누추한 초상이다.


    몸을 배배 꼬았다는 3교시 수업에서는 공포영화에 대해 배운다. 그건 곧 공포라는 감정 자체에 대해 배우는 것이기도 한데, 이 공포의 개념은 근대사 속에서 점차 변해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좀비가 가지는 무서움은 삶과 죽음 동시에 걸쳐 있는 그 모호성에 있다. 그들은 살아 있지 않지만 죽지도 않는다. 깨끗하고 온전히 성해야 할 신체는 이리저리 기괴하고 무력하게 뒤틀려 있고, 입에서는 자꾸 뭔가를 흘리며, 생기 없는 눈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흘리며, 한없이 불안정하게 걸어다닌다. 이렇게 드러나는 특징만 보면 참 가엾고 비천한 존재다. 그러나 안타까운 존재들을 보는 것은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가장 뚜렷이 암시하기에, 그 안타까운 존재는 그만큼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좀비에게 물리면 똑같은 좀비가 되지 않는가? 팔을 물려 바이러스가 퍼지거나 목을 물어뜯기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못하여 좀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 때에 자의식이 남아 있는가 아닌가와는 상관없이, 어느 쪽이든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사실 모두가 좀비다. 다음날 뻔히 234교시가 연달아 있을 걸 알면서도 몇 시까지 안 잘 수 있나 오기로 놀아 보고, 어떻게든 일어나서 출석한 것 빼고는 온통 깬 것도 잠든 것도 아닌 채 텅 빈 하루를 보낸 나도. 술인 걸 뻔히 알지만 점점 취해 가는 스스로를 외면하고 그 액상과당 소주를 주스처럼 들이킨 이들도. 그리고 소주 이름을 따왔으면서 과일주인 척하지만 실상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위치한 과일소주도 말이다. 나는 과일소주를 별로 마시지 않는다. 그 인위적인 맛 뒤에 결국 마주하는 소주의 메스꺼운 냄새까지 풍겨오노라면 대체 이걸 왜 마시나 싶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말 과일주를 마시거나, 맑고도 역한 소주를 최대한 맛보지 않고 바로 목구멍으로 털어넣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과일소주는 그 둘 모두를 표방하고 싶어하지만, 사실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좀비가, 아니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어떤 두 가지 사이의 경계와 동시성은 다르다. 경계는 그 둘 모두에 닿아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어느 쪽에 속하지 않았다고 괴로워할 일이 없다. 오히려 그 사이에서만 알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하지만 동시성은 둘 모두에 닿아 있으려 하는 욕심 탓에 역설적으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애매한 위치에 걸려버려 끊임없이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그 수업들을 못 가거나 지각해 버렸다면 처절한 후회로 남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출석만은 했다는 데에서 쓸데없는 안도감을 느껴버린 이상, 이미 그 마음 안에는 두 번째 과일소주의 가능성이 들어서 버렸다. 실제로 그 후로도 과일소주같은 일이 몇 번은 있었는데, 그건 주제가 바뀌어버려 여기서 이야기할 수 없다. 이야기해도 될 때가 온다면 아마 하게 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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