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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Mar 31. 2016

우유

새하얀, 그리고 순수한 선에 관하여

주일, 그러니까 일요일이었다. 지난밤, 평소 하던 것처럼 괜시리 늦게까지 깨어서는, 매운 음식을 곁들여 술을 마시며 취해버리지 않은 덕에 간만에 일찍 일어났다. 집 앞에 나가 맨몸운동을 조금 하고 환여동 앞 바다를 살짝 뛰었다. 씻고 준비해서 교회를 갔다. 부활주일이었다. 먹고 남은 계란을 몇 개 받아 돌아와, 집 앞 카페에 갔다. 친한 사람들이 있길래 같이 공부하다가, 저녁 언저리쯤에 계란을 까먹었다. 우리는 늦은 8시쯤 헤어졌다. 저녁 쯤에 먹었다 해서 계란이 저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집에는 밥솥도 밥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어떤 먹을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돈도 별로 없었다. 망할놈의 공인인증서 덕분에 핸드폰으로 잔고 확인은 못하지만, 분명 만 원 이내일 것이다. 머릿속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우유를 사서 영양 쉐이크를 타 먹을 것이냐, 아니면 라면과 햇반과 막걸리 한 병을 사 먹을 것이냐. 가격은 둘 다 비슷하다. 이 명백한 대립은 슈퍼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까지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하필 우유와 막걸리는 서로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사진출처:  Pixabay

카페에서 나는 좋아하는 문학 평론가인 테리 이글턴의 <악>을 읽고 있었다. 거기서는 마침 ‘따분한 선’과 ‘매력적인 악’이라는, 선악을 둘러싼 현대의 통념에 관하여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세상에! 이거야말로 저 이항대립적 고뇌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닌가. 아니, 오히려 막걸리(그래, 요약해서 막걸리라 하자. 어차피 이게 요점이니까)와 우유가, 선과 악이라는 형이상학적 관념들을 적절히 실체화한 것이라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둘 다 순수한 하얀 색이다. 맞다. 선과 악은 소름끼치도록 닮았다. 순수한 악은 어정쩡한 선이 그러한 것보다도 더욱 순수한 선과 닮았다. 물질성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순수성이란 부분에서 둘은 긴밀하게 통한다. 루시퍼는 하나님 바로 아래의 천사였다. 고대로부터 ‘악’으로 규정된 대상은 희생되고,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왔으며, 그렇게 ‘선’한 또 하나의 신으로서 신성시되었다. 강렬한 선은 창조를 행하고, 강렬한 악은 이를 파괴한다. 그 파괴야말로 창조에 대항하여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다. 그러니까 선이 존재로 충만한 어떤 것이라면, 악은 그런 선에 대한 심술궂은 패러디이며 맹목적인 부정이다.


그 부정함에는 일종의 도착적 쾌락이 있다. 우유에 쉐이크를 타 먹는 과정은 비루하리만치 간단하다. 먼저 전용 쉐이커에 우유를 따서 붓는다. 쉐이크를 몇 스푼 넣는다. 뚜껑을 닫고 흔든다. 마신다. 쉐이커를 물로 씻는다. 그러면 끝이다. 하루에 두 세 번 먹는 끼니 중 하나를 쉐이크로 때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이렇게만 한다면 아침에 한 운동으로 생긴 근육의 성장을 조금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자기 직전에 배나 조금 고프겠지.


하지만 라면에 햇반에 막걸리를 먹는다면 즐거울 것이다. 물을 올려놓고 햇반을 뜯어 전자레인지를 돌려놓는다. 스프는 먼저 넣어두는 편이 좋다.이렇게 하면 끓는점에 변화를 주어 면을 더 쫄깃하게 하며, 스프가 더 잘 배인다는 속설을 나는 믿는 편이다. 물이 끓기까지 미리 켜둔 온수매트 위에 상을 펴고 막걸리를 흔들어 김을 빼놓은 다음 컵을 준비한다. 물이 끓으면 면을 넣고, 젓가락으로 들었다 놨다 하여 공기와의 접촉을 늘려서 쫄깃하게 다듬는다. 다 끓인 라면은 상 위에 받침을 놓고 올려둔다. 전자레인지에서 밥을 꺼내어 포장을 온전히 열고, 이윽고 제대로 상 안에 앉아 막걸리를 따르면 작은 만찬의 시작이다. 뜨거운 탓으로 둔해진 미각에 전해지는 매콤짭짤한 스프맛 밀가루의 쫄깃함과, 밥을 한 스푼 떠서 국물에 살짝 담가 그대로 먹는 뜨끈함은 흐뭇하다. 여기에 곁들여 먹는 막걸리의 새콤하고 풍부한 누룩 향까지 합치면 탄수화물의 향연 아래 저무는 밤을 온전히 셀 수 있을 것만 같다.


내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생활양식에서 나는 자기파괴의 묘한 쾌감을 느낀다. 이것은 할 일을 가능한 한 절벽 끝까지 미루는 스릴과도 닮았다. 다만 그 쫄깃함을 살아 선명하게 느끼는 것과는 그 모양이 같지 않다. 몸을 제물 삼아 주말의 마지막 밤을 탕진하는 이 기획 아래 전체적으로 크게 흐르는 정서는 무기력, 그리고 도피이다. 해야 할 일이 딱딱한 고체처럼 눈 앞에 버티고 있음에도 어떤 이유 없이 이를 부정하려는 무의미의 시도. 오직 몸을 상정하지 않는 상상력이라야 이 텅 빈 몸짓들을 온전히 완성할 수 있으리라. 이건 오로지 터지기 위해 터지는 불꽃놀이와 같아서, 화려하고 시끄러우며 뜨겁고도 재빠르다. 또 매력적이고 치명적인데, 그런 특징들이 꼭 악과 닮았다. 악이란 어디 정착하거나 책임질 생각도 없이 성적인 욕망만으로 한껏 달뜬 바람둥이 귀족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드는 속도란 정확히 빛의 속도다. 모든 것을 쏘아보낸 폭죽은 사정 직후처럼 차갑고 느릿하게 축 늘어진다. 탄수화물 폭탄의 결과는 더부룩한 속, 그로 인해 새삼 도지는 역류성 식도염, 그리고 본래의 필요보다 과도하게 축적되는 지방이다. 더 무거워진 몸에는 필시 더 멍한 생각들이 들어찰 것이다. 악이란 그 행위의 결과를 내다보지 못할 만큼 매혹적이며, 그 강렬함 만큼의 허무를 선사한다. 허무가 가져오는 절망에 피학적으로 사로잡혀 버리는 사람은, 여기 아니고는 다른 데에서 절대 스스로를 세울 수 없을거라 믿어버리는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처럼 그 절망을 차마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급기야 스스로 ‘없음’을 사랑한다 믿어버려 그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에야말로, 죽음 충동은 본색을 드러내어 우리를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그 순간은 우리에게 몸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의 순간이며 동시에 이를 놓쳐버리는 진정한 절망의 순간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몸이 있다. 폭죽이 그 불꽃으로 현재를 한 입 베어물기 위해서는 폭죽을 이루는 화약과 대가 있어야 한다. 또한 빛으로 반짝이기 위해서는 죽음 같은 어둠 가운데 있어야 한다. 악이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것은 창조에 대한 파괴이다. 불꽃이 어둠을 찢고 나오듯이. 그렇게 빛은 어둠에 빚지고 어둠은빛에 빚진다. 성적 욕망은 이를 느낄 몸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주말을 낭비하며 몸을 망치려면 망칠 몸이 있어야 한다. 우유와 쉐이크가 그 몸을 만들고, 탄수화물투성이 불량식품들은 몸의 파괴를 위해 몸에 기생한다. 때문에 막걸리는 기껏해야 역설이고, 그러므로 결국 우유의 패러디로 있을 수밖에 없다.


사진출처: Pixabay

그 날, 나는 결국 우유를 골랐다. 한 번 더 운동하고 쉐이크를 타 먹고, 씻고, 빨래를 했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에 이 생각들을 정리하고는 남은 시간 동안 과제를 했다. 분명 개그콘서트 마무리 연주곡보다 단조로운 주말의 마감이었다. 하지만 속도 마음도 괜찮았고, 나는 그 안에서 잔잔히 평안했다. 무엇보다도 라면, 햇반, 그리고 막걸리에 비해 우유는 천 원가량 쌌다. 전체적으로 보아 충분히 만족스러운 윤리적 싸움이었다. 견고하고 따분한 몸이 조금 더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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