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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Mar 26. 2016

유자차

결국 차게 남아버린 작위에 대하여

‘국밥 만큼은’을 친구들과나눈 끝에, 함께 그 국밥을 먹으러 갔다. 이번에는 그렇게 효능이 뛰어나다는 소머리국밥을 먹었다. 역시 ‘만큼은’ 한 맛이었다. 잽싸게 먹고 나오니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구름 끼고 쌀쌀하고 어둑한 가운데 한 명을 학교로 보내고, 나머지 사람들끼리 바다를 찾아 죽천에 가기로 했다. 마실 것을 사러 가까운 편의점에 들렀다. 여기서 밝히지만 당시 내 통장 잔고는 326원이었고, 국밥을 다 먹고 난 후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 때문인지 한 친구가 나에게 기꺼이 음료수를 사주겠다 했다. 그는 온장고를 열어 거침없이 자기 것과 똑같은 꿀유자차를 고르려, 하다가 멈칫했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1600원짜리 그 유자차는 두 개를 사면 하나를 더 주는 행사상품이었다. 하지만 유자차는 두 개밖에 없었다. 그는 알바생에게 하나 더 있냐고 물었다.‘없다’고 잘라 말하는 알바생의 태도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함축했다. 여분의 유자차는 분명 창고에 있다. 하지만 귀찮다. 나는 이제껏 이 친구가 화 같은 걸 내거나, 그 근처에라도 가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가게 문을 나선 그는 분해 했다. 분명 충분히 데워진 유자차보다 그의 속이 더 끓고 있었으리라.


우리는 외진 원룸촌 너머 널찍한 사차선도로를 건너, 외로이 나 있는 한적한 길 끝에서 믿음으로 밭길을 걸음걸음 내딛었다. 못이 박힌 울타리를 끼고 걸어간 끝에서 바다가 열렸다. 커다란 파도소리에 우리의 벅찬 환호와 광기를 안전히 묻었다. 해안선을 따라 낡고 고요한 골목길을 걸었다. 왠지 사람이 살지 않거나, 전기가 없을 것만 같은 집들이 한 집 걸러 있었다. 우리는 그 모든 세상의 구석들에 이야기를 붙였다. 걷는 곳곳이 일탈과 의미로 가득 찼다. 신의 눈마저 기껏해야 이따금씩만 비칠 듯한 그 곳에다가는, 점심때 먹은 식사 영수증처럼 사소한 것을 몰래 버리면 정말 그 누구도 세상의 끝까지 모를 것이었다. 작고도 보잘것없는 티끌들에 취해 우리는 제멋대로 시끄러웠다. 어차피 모퉁이인 우리들이 이 벽지에서 어떤 튀는짓을 하건, 저 거대한 구름 지나가는 세상에 무슨 파문이 일겠는가? 자그마한 것은 어쩌면 축복이다. 아마도 쿼크는 정말 자유로울 것이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라도, 적어도 분자 만큼은 기쁘게 뛰놀았다.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버스를 잡아 학교로 갈 수 있었다. 작은 것들의 마법에 취한 우리는 여전히 생경한 취기를 뿜어내었다. 오지에 있다가 문명의 세계로 진입한 기분이었다. 세상에, 자동으로 움직여 굴러가는 쇳덩이라니! 게다가 이 속도를 봐! 놀랄 게 많다는 건 새삼 설레고 기쁜 일이었다. 한껏 낯설었다가 일상으로 돌아와 학교에서 내리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 놀다가 집에 도착하여 보니 이미 차가워진 유자차가 주머니에서 불쑥 나왔다.


이미지 출처: Eugene Kim

왠지, 냉장고에 온갖 나쁘거나 소중한 것들을 우겨넣었더니 카스테라가 되었더라는 소설가 박민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 유자차를 따서 한 모금 마시면, 어쩌면 그런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위화감이 나를 멈칫하게 했다. 그 +1의 상품이란 대체 뭐였을까. 그것 때문에 그 알바생은 귀찮고 무례해져야만 했고, 내 친구는 화가 나야만 했다. 그러고 보면 2+1의 언급이 없었으면 거기에 매달릴 일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 유자차를 고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썬키스트 회사의 허니유자는, 원체 유자차를 찾아 사먹지도 않는 내게 있어서 난생 처음 접하는 상품명이었다. 일부러 무언가를 얹어준다는 그 행사가 우리 모두에게 그만큼의 일부러를 짐지웠다.


분명 그 ‘일부러’야말로 자본의 속성일 것이다. 자본은 끝없이 자라야만 한다. 그무한한 이익의 팽창을 위하여, 이미 있는 수많은 유자차 종류 외에 일부러 꿀을 조금 더 넣어 허니유자를 만들고, 이를 팔기 위해 일부러 이벤트를 만든다. 아무것도 없던 한적한 거리에 일부러 또 하나의 편의점을 내고, 또 하나의 최저시급 3교대 알바 세트를 고용한다. 이 모든 ‘일부러’의 결과로 온 알바생은 역설적으로 그 모든 작위성과는 상관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초라한 그의 최저시급으로는 은행이나 자산관리사에게 맡겨 돈이 돈을 낳는다던지 하는 비현실적 자본증식을 기대할 수 없다. 아마 거기서 버는 모든 돈은 생존, 생활, 생계 등 모든 ‘생’에 쓰일 것이다. 그는 자본처럼 부지런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저 거기에 있는 시간이 돈이 될 뿐이지, 거기서 ‘일부러’ 움직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 얹어줄 사은품이 없어서 안 산다면, 사지 말라지. 하지만 산다면, 어쨌든 마찬가지로 3200원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본의 말단이 자본의 그 ‘일부러’ 부지런한 속성을 닮지 않은 것이야말로, 어쩌면 자본이라는 거대한 기계가 항상 어딘가 삐걱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 친구는 +1이라는 몸 없는 허상에 화를 내었다. 하지만 사실, 둘이 먹는 데에+1이 ‘일부러’ 필요한가? 결국 뜯지도 않고 집에까지 가져온 이 유자차를, 굳이 하나 더 받는 것이 바람직했을까.


다시 유자차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투명한 유리병에 투명한 비닐 포장지가 싸여 있다. 포장지에는 너무 싱싱하여 그래픽 같은 유자가 그려져 있고, 병 안에는 홍화황색소가 적절한 배합으로 섞인 노란 빛 액체가 들어 있었다. 유자청징농축액이 3%, 벌꿀이 0.5%(국산이란다), 유자향 합성착향료, 그리고 여러 합성된 어떤 것과, 인공적인 한자어 원재료명이 잔뜩 적혀 있었다. 이렇게 ‘일부러’ 맛을 낸 유자차는, 벌꿀에 있는 묘한 씁쓸함과 유자가 가진 그 살짝 지나치게 시큼한 맛을 깨끗이 제거했을 것이다. 일부러 깔끔하게 만든 이 유리병은 막상 어떤 자연도 품을 수 없어 썩지 않고 반영구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영원을 향한 자본의 열망은 죽지 않는 재료와 몸 없이도 이를 대체할 기호를 만들어냈다. 이 주도면밀하고 성실한 악을 당해낼 수야 있을까. 방금 전까지 죽천 앞바다에서 자연처럼 놀던 나로서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한 병의 유자차를 더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수많은 작위가 만들어낸 편의점 유자차 이벤트의 완벽한 시행을 위해, 더 돈이 나오지도 않을 알바생의 노동을 강요했을 것이다. 결국 자본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과 어긋나게 행동하도록 강제하는 억압의 과정이, 우리들로부터 재현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 그러니까 역시, 하나 더 받지 않는 게 잘한 것이었을지 모른다는, 여태껏 익혀온 모든 상식과 어긋나는 이 생각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혼란과 광기라면 역시 이를 묻어줄 바다다. 아무래도 조만간 죽천을 한 번 더 가봐야겠다. 세상의 모든 자그마함들이, ‘일부러’ 어떠함 없이, 모두가 제멋대로 늘어서 있는 그곳. 그 제멋대로가 한없이 아름다워서, 지치고 가시에 찔려도 아픈 걸음을 끊임없이 앞으로 이끄는 곳. 바다로 가자. 하여 바다를 떠올리니, 그 유자차를 받지 않을 이유가 하나 더 생각났다. 주머니가 너무 두툼해져서 걷는 데 방해된다. 그러니 따뜻한 유자차는 한 병만 감싸 넣고, 바다로, 바다로 가자.



바다로, 바다로 가자. 사진 출처: 장하나


p.s. 사실 그 친구는 화를 내지 않았다. 함께 웃기 위해 화를 내는 연기를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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