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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로예 Feb 13. 2021

혹시 대답하려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시나요?

그보다 먼저 상대방을 이해할 생각도 있으신가요?



배가 아파 병원에 간 당신을 상상해 보라. 당신의 낯빛은 매우 어둡다. 몸에는 기력이 없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있다. 식은땀을 흘리며 병원 문을 열고, 의사 앞으로 다가간다. 당신의 모습을 본 의사가 대뜸 이렇게 말한다.


"어라, 당신은 몸살에 걸렸군요. 절대 안정이 필요하겠어요. 제가 본 30년간의 데이터와 경험에 의하면 당신의 안색과 모습이 몸살에 걸린 환자와 똑같습니다. 당장 처방을 해드릴 테니 해열제를 먹고 잠을 자도록 해요."


이 답변이 배가 아파 장염에 걸린 당신에게 들린 말이라면? 참으로 비극이다. 장염에 걸린 환자에게 장염을 치료할 약을 처방하지는 않고 몸살을 낫게 하는 해열제를 주었다. 이는 환자를 이해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결과다.


어떻게 환자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 그에게 꼭 필요하고 절실한 처방을 내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아마 진단보다 먼저 처방을 받은 환자는 장염을 치료하기는커녕, 상태만 더 악화된 상태로 병원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일상 속에는 이렇듯 '처방이 진단보다 선행되는 비극'이 만연하다. 이는 특히 대화하는 상대방이 처한 독특한 상황과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곤 한다.



처방이 진단보다 선행되는 비극


스티븐 코비 박사의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중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화하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에게 '대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야기를 듣는지에 관한 비판의 메시지를 드러낸 대목이 있다. 아래 인용한 부분은 책의 p.369~372에서 발췌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려는 의도를 갖고 듣는 게 아니라 대답할 의도를 갖고 듣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말을 하고 있거나 말할 준비만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패러다임을 통해 모든 것을 여과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신의 경험을 심어주고자 한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겪는 독특한 고민과 놓인 특수한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알겠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해. 자, 그런데 내 얘기를 들어봐."


사진 출처 : 디스패치 <“30%의 법칙?”… 대화 매끄럽게 이어가는 방법>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논리로 가득 찬 존재이다. 정상적인 사고 과정을 할 줄 알고, 뇌에 이상이 있거나 지능이 특별히 낮지 않은 이상. 그래서 사람은 세상을 보는 패러다임이라는 아주 독특하고도 특이한 색안경을 끼고 살아간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아마 신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처한, 처해왔던 상황에서 씌운 필터만을 통해 이 세계를 바라본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특수한 환경과 상황에 직면할 때조차도 쉽사리 자신만의 색안경과 패러다임을 내려놓기 쉽지 않다. 그리하여 타인에게 성급한 처방만을 먼저 내릴 때가 많다. 따라서 대화하는 상대방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어떤 환경을 바탕으로, 어떤 마음과 태도 하에서 그러한 지점에 와있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그 답을 얼른 상대방이 알아차려 내가 생각하는 그 정답지를 선택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각자의 독백을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대화(對話)라는 것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가 하는 의사소통은 상당 부분 집단적 독백일 뿐이다. '마주 대하는'이란 의미의 양방향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깃들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시간은 사치일 뿐이고, 어서 빨리 상대방에게 필요한 긴급 처방을 내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의 뿌리까지 짚어보려는 진절머리 나는 과정 따위는 생략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대화는 한쪽에 의해 조언과 판단, 해석과 충고를 하거나 듣는 방향으로 끝나는 일방적인 것이 된다. 또는 누구의 마음속에도 울림이 없는 공허한 목청의 울림만으로 대화가 종료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우리의 태도는 보통 다음의 다섯 가지 수준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첫 번째는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로, 이것은 실제로 전혀 듣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응, 그래, 그렇지, 맞아" 등의 맞장구를 치면서 듣는 체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선택적 청취로, 대화에서 어떤 특정한 부분만 듣는 경우이다. (중략) 네 번째는 집중적 경청으로, 상대가 하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말에 총력을 집중하여 듣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가장 고차원적인 '공감적 경청'으로 극히 소수만이 이러한 태도로 듣는다.


위 인용에서 언급한 '다섯 번째'에서 말한 '공감적 경청'이란,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아주 깊이 이해해 보겠다는 세심함을 지니고 경청하는 것을 뜻한다. 공감적 경청만이 아마 처방에 앞서 먼저 진단을 하는 숭고한 과정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패러다임을 내려놓아야 한다. 상대의 시각으로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과 사건을 마주하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타인을 감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깊고 충분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적 경청이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흉내 내는 '적극적' 경청이나 '반영적' 경청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한 종류의 경청 기법은 내적 성품이나 인간관계와는 관계가 먼, 단순히 기술에 바탕을 두는 기법이다. 따라서 이 같은 기법은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서전적, 즉 자기 경험 중심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행하는 '듣기'의 목적이 상대방에게 '대답해주기 위함'이자, '통제'하고 '조종'하는 것이라면, 공감적 경청과는 매우 먼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사뭇 희망적이고 유쾌한 상황이 그려진다. 만일 타인의 머리와 가슴 내부에 어떤 실체가 들어있는지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면 어떨까?


자기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투사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느끼는 생각, 느낌,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 준다면? 진단보다 처방이 먼저 내려지는 비극은 없을 것이다. 사려 깊고 세밀한 진단이 이뤄진 다음, 환자에게  맞는 처방을 내릴  있다.  처방만이 진정으로 환자에게 필요하고 절실한 것이다.


따라서 대답하기 위해 듣는 태도는 가급적 지양함이 필요할 것이다.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내가 그 진단보다 앞선 처방에서 상처를 받았던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위와 같은 생각과 독서 과정을 거치며 깨달았다. 나만큼은 '대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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