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집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워야지'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런 생각을 지닌 채 귀가를 하곤 했다. 소파는 집을 이루는 많은 가구 중에서도 그 편리성과 접근성이 단연 1등인 것이었다. 마치 '잠은 침대에서, 휴식은 소파에서'라는 것이 우리 가족의 무의식적인 공통 감각이었으니까. 어쩌면 하루 중 침대보다 소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소파는 침대보다 훨씬 푹신했다. 그래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면 몸을 '던지기'에 딱 좋은 촉감이었다. 줄기차게 교복만 입었던 시절에는 하교 후 소파에 누워 긴호흡을 '쉬이-'하고 쉬는 것이 하루 일과의 낙이었다. 그 상태로 앉아서 공부하기 전까지 간식거리를 먹거나, 귀이개를 가져와 귀청소에 열중했다. 푹신하고 아늑한 소파에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는 편안한 행동은 카타르시스 그 자체였다.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스펀지같달까.
휴일이 되면 아빠는 소파와 마치 한 몸이 된 듯 그야말로 물아일체의 지경에 이르시곤 했다. 키와 덩치를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답답하게 작아보이기까지 하는 그 소파를 아빠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침대에 들어가서 주무세요"라는 말을 들어도 이미 꿈나라를 깊이 여행 중이셨다. 그렇게나 소파를 좋아했던건 엄마,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소파는 때로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 공간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지녔다. 그래서 우리를 자주 웃게 했고, 동시에 자주 울게 했다. 서로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공간인 동시에 어느 날에는 그 마음을 헤집어 무너뜨리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소파는 소파'였다. 가족 구성원들의 심리적 또는 물리적 거리가 좁아지든 멀어지든 각자의 신체와는 항상 딱 붙어있었던 것이 소파였으니까. 소파만큼은 우리를 잠재우는 가장 '큰 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파와 영영 헤어지게 되는 날이 오게 되었다.
"소파없이 어떻게 살아. 사긴 사야 돼"
17년만에 이사를 했다. 새로운 집에는 소파없는 텅 빈 거실이 우리를 맞이했다. 소파 찬양자인 동생과 아빠는 소파를 다시 데려와야 한다면서 '소파 없인 못살아'를 외쳤다. 엄마는 새로운 소파를 한 번 알아보자고 하셨고 나는 '소파 없이 살 수 있다'를 주장했다.
문득 혼자만 소파없는 삶을 주장하고 보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 또한 오랫동안 소파라는 공간에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의존했던 사람이 아닌가. 누릴건 다 누리고 이제와서 소파가 필요없다고 이야기한 건 무엇때문이었을까.
가족 구성원 네 명의 의견이 서로 조금씩 다른 것을 확인하자 우리는 짤막하게 '소파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아빠에게 왜 소파를 새로 사야하는지 여쭤봤고, 아빠는 답하셨다. "소파에서 주말에 자고 쉬고. 이런게 얼마나 행복한데?" 마치 아빠의 이야기는 소파없는 삶을 상상이라도 해봤냐는 말처럼 들렸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소파없이는 불편해서 못 살아. 티비볼 때 편하게 봐야지!"
아빠와 동생의 대화를 듣고 나서 느꼈다. 마음 속에 무언가 불편함이 스멀스멀 퍼지는 것을. 공교롭게도 나는 한창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미니멀 라이프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두는 삶을 의미한다. 즉 '단순한 생활방식'이라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우리집의 구성원들이 '소파'에 의존하지 않고도 풍요로운 삶을 살길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문명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필요를 충족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거듭된 기술혁명과 산업혁명 속에서는 이제 없던 필요가 만들어지는 시대에 도달했다. 소파도 본능적인 필요가 아니라 '만들어진 필요'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소파 없이 산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없음으로 하여 우리에게 소파에 속박되지 않을 자유를 부여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윽고 내가 입을 열었다. "소파없이도 그냥 의자에 앉아서 티비 볼 수 있잖아. 그리고 잠은 침대에서 자는거지 소파에서 늘어지면 루즈해지기만 하는걸." 여기에 대해 아빠와 동생은 크게 반박할 거리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굳이 큰 돈 써서 소파를 살 바에 정말 필요한 다른 거를 사요!"
어쨌든 우리는 평등하게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그것에서 파생된 선택지로 '다같이 소파 구경가기'를 실천했다. 꽤 멀리까지 가서 다양한 소파들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왜인지 우리들의 마음에 꼭 드는 소파가 없었고 그 길로 우리는 흐지부지 소파 사기를 미뤄왔다. 그렇게 얼렁뚱땅 소파가 없는 채로 이사한 지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이사라는 사건 자체가 우리 가족을 소파없는 삶으로 인도했을지 모른다. 지난 20년간 소파와 함께하는 삶을 살았으니 앞으로는 소파없이 살아보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꽤 치열하게 소파를 구매할지에 대해 논의해왔고 실제로 행동에 나서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소파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건 운명이었다.
소파가 없는 삶에 대해서 묻는다면, "오히려 좋다"고 자신있게 답하고 싶다. 물론 모든 것에 무결점이란 특성이 붙진 않기에 소파가 없음으로써 생기는 불편한 점이 당연히 있다. 예컨대 예전처럼 귀가하자마자 폭신하게 몸을 던질 곳이 없다는 점, TV를 볼 때는 허리를 반듯이 세워 의자에서 시청해야 한다는 점. 아빠의 경우 주말에 소파가 아닌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잠은 침대에서 자는 것이기에 전혀 이상한 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파가 없기에 생긴 가장 큰 장점은 나의 새로운 취미 생활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거실 한 가운데에는 이제 소파가 아닌 아기자기한 '구피 어항'이 자리하고 있다.
구피를 선물받아 키운 지는 벌써 반 년이 되었는데, 형형색색 아름다운 꼬리 색깔을 가진 구피를 키워놓으니 집의 분위기가 한층 밝아진 느낌이다. 뽈뽈거리는 구피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보노라면 긴장되고 불안했던 마음마저도 편안해진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의 힘은 대단하다.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도 구피를 보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인다. 그저 소파만 있어 자리에 멀뚱히 앉았던 과거와 달리,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구피 어항을 구경하게 되는 것이다.
소파가 있던 자리에 구피들의 보금자리가 펼쳐지고 이를 계기로 10마리로 시작한 구피 어항은 이제 30마리가 되었다. 처음부터 충분히 넓은 공간에서 키웠기 때문에 폭발적인 번식력을 감당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이제 거실은 그저 멍하니 앉거나 누워있는 공간을 넘어 '생명'이 숨쉬고 자라나는 곳이 되었다.
소파없는 삶의 장점에는 티비를 적게 본다는 생활도 있다. 이건 소파가 있을 때와 비교했을 때 정말 어마어마한 차이를 내는 부분이다. 일단 티비를 보려면 우리 모두 허리를 반듯이 세워야한다. 이것만으로 티비 앞에 무의미하게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티비를 적게 보면 각자의 생활에 더 본질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남길 수 있다. 주말에 티비에 빠져 허우적대는 시간을 운동하거나 못다한 취미를 즐기는 것으로 대체한다면 삶의 생산성을 얼마나 높이는 일인가. 굳이 생산성에 얽매이지 않아도 좋다. 차라리 평일에 못잔 낮잠이라도 충분히 잘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진짜 휴식이 아닐까.
티비를 적게 본다는 것은 전기값을 아낄 수 있다는 또다른 장점을 야기한다. 물론 아직 부모님께서 지불하고 계시는 요금이지만, 가족 구성원으로서 지출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기쁜 결과다. 어차피 요즘의 핫한 컨텐츠들은 티비가 아닌 유튜브나 가상공간에 더 많이 몰려있으니, 앞으로 티비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집뿐만이 아니게 될 것으로 추측한다.
소파가 없음으로 하여 새로이 생겨나는 이벤트도 있었다. 우리집에 놀러오기를 참 좋아하는 어린 사촌동생 두 명이 있는데, 아이들이 올 때는 아빠의 애장품인 '텐트'를 쳐주곤 했다. 거실 탁자를 잠시 밀어두고 넓은 공간에서 텐트를 설치해 아이들이 마치 캠핑을 오는 듯한 경험을 선물해주는 것이다. 이때 만큼은 텐트를 치고 동생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 티비를 보는데, 티비를 끄면 끄는대로 틀면 트는대로 거실을 잘 활용할 수 있어 유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일에는 중학생인 동생의 수학과외를 거실에서 한다. 예전 집에 살 때는 소파 앞에 탁자를 두는 것이 요상한 풍경을 낳아 시도도 못해본 일이었는데, 지금은 탁자를 자유자재로 옮기고 이동할 수 있으니 과외 시간에는 거실 한 가운데에 공부방을 마련한다. 과외 선생님과 학생 두 명이 둘러 앉아 쾌적하게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텐트를 칠 때는 캠핑장이 되기도, 과외를 할 때는 도서관이 되기도 한다.
소파가 없는 삶은 생각보다 편했다. 본질적인 동시에 역동적이었다.
소파가 비워진 자리의 거실은 구피라는 새 생명체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되기도, 티비가 꺼진 고요한 휴식의 공간이 되기도, 때로는 사촌동생들이 노니는 캠핑장이,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습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 공간이 어떻게 활용되고 쓰여질 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소파가 없는 삶을 다른 말로 바꿔말하면 '여유가 있는 삶', '변화가 가능한 삶'으로 표현하고 싶다. 생각보다 우리는 '없이도' 잘 살고 있으며, 오히려 없음으로써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고 변화한다는걸 깨달을 수 있었다.
소파를 비우다, 변화를 더하다. 앞으로 어떤 것을 비우고, 또 다시 더할지 새록새록 설레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