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경 콘서트와 신년운세, 그리고 와인
어김없이 한 해의 출발선으로 다시 향하는 시간이었다.
"집에서 쉬지 먼 길까지 와서 무슨 고생이야"
구정 설날을 맞이하여 버스를 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뵌 두 분은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셨다.
할머니가 손수 차린 음식을 맛보며 뜨끈하고 따뜻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녹두전, 불고기전골, 김치전병, 찰밥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밥상에서 3대가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한 입, 두 입 밥을 먹는 미각에서 따스한 설날의 맛이 점점 퍼진다.
TV에는 설날 특선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아빠는 영화 ‘분노의 질주’ 를 보고 영화를 진짜 잘 만들었다며, 감탄한다. 옆에 계셨던 할아버지도 거들며 “그게 그렇게 잘 만들었냐”라고 되물어보신다. 그러다 갑자기 카톡으로 반가운 알림을 받았는데, 바로 SBS에서 성시경 콘서트를 한다는 것이었다. 아빠보고 영화를 다 보면 SBS를 틀자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도 “나도 성시경 좋아한다”는 말씀을 하시길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빠. 그냥 지금 SBS 틀면 안 돼요?”
서둘러 채널을 틀어 성시경 콘서트를 보기 시작했다. 성시경이 발라드 가수 선후배들과 함께 웅장하고도 멋진 콜라보를 하고 있었다.
"저는 하루에 한 번씩 성시경 노래를 듣거든요!"
설 명절에 그것도 공짜로, 공중파에서 그의 콘서트를 볼 수 있어서 신이 잔뜩 났다. 정승환의 <이 바보야>, 김조한의 <천생연분>, 성시경의 <미소천사> 등을 들으며 때로는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애절한 감정에 이입하다가도, 흥이 나는 멜로디와 비트에는 엉덩이가 들썩 거릴 정도로 신이 났다. 옆에서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이게 무슨 콘서트인데 사람들이 저길 가 앉아있냐”라고 진지하게 되물으시다가 우리의 웃음을 샀다.
“아니 할아버지! 저기 가면 엄청 재밌어요. 갈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다들 가죠”. TV 앞에서 몰입하시던 할머니는 “나는 이런 콘서트를 보면 삶의 활력이 돋고,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거 같아”라 상기된 얼굴로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할머니와 함께 듣고 비슷한 감정을 교감할 수 있다니 참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었다.
성시경 콘서트를 다 보고 여운이 가시지 앉은 채 마룻바닥에 모두 앉아있었다. 이미 할아버지는 콘서트가 시시하다며 정치 뉴스를 보시려는지 방으로 들어가신 지 오래다.
할머니는 대뜸 “올해 신년운세 보게 검색을 해보라”라고 하시며 아빠를 향해 뒤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아빠는 다시 나에게, “네이버에 검색해서 좀 알아봐라”라고 토스했다. 할머니의 음력 생신으로 생년월일을 입력하니, 신년 총운이 나왔다. 언제 가셔서 안경을 가지고 나오셨는지 벌써 안경을 끼신 채로 앉아계신 할머니. 설렘 한 스푼을 얹은 아이폰을 들고 총운을 읽기 시작하셨다. 한 바닥 페이지를 다 읽고 나시니 “올해 운이 좋네”라고 하시며 조금은 기쁜 얼굴로 웃으신다.
“재미 삼아 저도 해봐야겠어요” 또다시 나의 생년월일을 양력으로 입력하고 확인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엥? 글쎄. 할머니의 총운과 나의 총운이 완전히 똑같이 나온 것이다. “할머니! 이거 제 운이랑 할머니 총운이랑 그대로 같은 말이 나와버렸는데요..^^” 할머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손녀랑 할머니가 어떻게 똑같은 운세가 나오냐며 다시 아이폰을 가져가신다. 다시 쭉 읽으시더니 고조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뭐야, 아니 어떻게 두 사람 총운이 똑같을 수가 있어.” 할머니와 손녀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깔깔 웃고만 있다.
“할머니, 그러면 제가 다른 총운도 봐드릴게요.” 아이폰에 깔아 두었던 운세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다시 한번 시도를 해보았다. 이 운세 어플의 경우 총운을 한 번에 보여주지 않고, 여러 가지 주제로 나누어 운세를 짤막하게 보여주기에 할머니에게 몇 개씩 나누어 보여드렸다. 그중에서 눈에 띄기로 7월이 운이 좋다고 한 글꼭지가 있어 할머니에게 건넸다. “할머니, 7월은 특히나 좋대요”. 얼른 핸드폰을 전달한다. 몇 바닥의 글을 연달아 보시다가 할머니는 다시 한번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으신다. “얘, 7월에는 소개팅을 연달아 나가란 대. 내가 대학생도 아니고 말야. 아주 웃겨 죽겠다 이거”. 그 순간 나도, 뒤에 있던 아빠도 웃음이 터진다. 아빠는 “돈 많은 할아버지랑 만나라는 거지. 소개팅해서”라 거든다. 70대의 할머니가 7월에는 연달아 소개팅을 나가라니, 정말 세상에서 본 운세 중에 가장 웃긴 총운이었다.
상을 치우고, 정리를 하니 어느덧 9시가 훌쩍 넘었다. 와인을 한 잔 꺼내어 먹자는 말에, 피곤한 눈을 비비던 나는 금세 “좋다”며 거실로 향했다. 저녁상보다는 1/3도 안 되는 둥그런 작은 책상에 또다시 3대가 둘러앉았다. "와인 마시기로 어떤 안주가 좋을까. 호도? 아니 호두지. 호두 먹자”. 할머니가 부리나케 베란다에서 호두 꾸러미와 빵 봉지를 가져오신다. “2023년에는 할머니의 탈출, 너는 성공을 위하여~” 와인잔을 짠, 하고 몇 모금을 들이켠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나의 열띤 대화는 끝나갈 줄을 몰랐다. 삶을 대하는 자세, 인생의 의미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인생에서 보는 것들을 허투루 보지 말라며 사람들의 삶의 이면을 보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어른들의 경험에서 삶을 대하는 진정성과 깊은 자세를 또다시 경험하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더욱 진실한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을 빌은 것만 같다.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설날 세배를 했다. 떡국과 맛있는 반찬으로 설날 아침부터 배를 그득히 채운다. 어느덧 집으로 갈 시간이 다 되었다.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며 집을 나오려고 하는 찰나에, 할아버지는 건너편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가셔서 고속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기어코 알려주시겠다고 한다. 아빠가 들어가 계시라고, 물어보면 된다고 말해도 강경한 발걸음을 멈추시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버스를 탈 때까지 같이 기다려주시고, 우리가 타는 모습을 보고 터프하게 손을 흔들며 집으로 향하신다.
1시간 20분 만에 서울에 도착하여 다시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 저 도착했어요!”
할머니는 먼 길 오가느라 수고했다며 고조된 목소리로 말씀을 하신다.
“그래도 네가 오니까 할머니가 백 배는 더 기쁘다.
네가 와서 삶의 활력이 다시 돋지 않았니?”
이번 설날을 통해 깨달았다. 아,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100배는 더 기쁘게 할 수 있구나. 그 말로 인해 그 순간은 나도 '백 배'의 기쁨을 느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다. 설 명절을 맞아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느끼는 소중함과 따뜻함을 느끼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