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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로예 May 21. 2023

박멸과 통제 사이에서

다시, 청소는 의식이다!

외할머니와 할머니는 연세로 따지면 약 20년의 차이가 있으신데, 그럼에도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완벽에 가깝도록 청소하시는 습관을 지니신 것이다. 언제나 양가 댁에 가게 되면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든 물건이 가지런하게 정렬돼 있었다. 마룻바닥은 역시나 아침에도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윤택했고, 집 안에 머무는 공기마저 깨끗한 입자들로 가득해 포근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런 양가에서 자란 부모님, 그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나는 어쩌면 별종이었다. 극한 별종의 모습을 띄었던 시기는 아마 청소년 때일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을 삶에서 부지런하게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책상 아래 바닥에서는 문제집과 책들이 산처럼 쌓여있고, 옷가지들은 서로 뒤엉켜서 거의 알뜰 바자회 마지막 날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서랍 속에 연명했다.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바뀌며, 질서화한 것에서 무질서화한 것으로 변화한다는 열역학 제이 법칙


내가 얼마나 엔트로피 법칙에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는 2년 전 나의 에세이가 증명해 준다. 


https://brunch.co.kr/@sjyannie20/37

"아무리 "정리하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호되게 혼을 나도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라는 한 문장이 과거의 나를 그대로 설명해 준다. 이 에세이를 쓴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말의 힘을, 글의 힘을 강력하게 믿는 사람인데 요즈음 그것이 온전히 증명되고 있는 걸 느낀다. 저 에세이에서 결론적으로 내가 전달했던 바는 '청소는 삶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청소를 하는 것은 좋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의 나는 청소를 좋아하게 되었다. (ㅎㅎㅎㅎ)





박멸과 통제 사이에서 


특히 올해로 94세가 된 외할머니께서 청소에 대한 강박적인 생각을 드러내실 때면 '박멸'과 '통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곤 했다. 단언컨대 당신께서는 어떠한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식사가 끝난 후 다과를 먹는 시간에서도 외할머니의 청소 세포는 쉴 생각이 없다. 다과가 놓인 어떤 접시가 애매하게 비어 가면 곧바로 청소 레이더가 켜진다. "이거 누가 먹어라~ 접시 치우게." "지금 먹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3분 뒤) "이거 누가 먹어라~ 접시 갖다 놓고."


아무래도 94세의 연세로 인해 당신께서 삶에서 붙드신 핵심 가치가 더더욱 진해지는 것 같다. 불필요한 것들은 제거하고, 필요한 것만 오로지 내 눈앞에 놓겠다는 의지.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한 사람의 강력한 의지란 때론 자연법칙을 이길 정도가 아닌가, 싶다. 


지나칠 정도로 청소와 정리를 사랑하시는 외할머니를 보며 이것이 삶에 대한 사랑인지, 혹은 통제에 대한 강박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후자가 더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의 사람으로서 365일을 94번 반복하여 살았던 당신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수도 없이 불확실한 사건과 통제 불가능한 일들을 겪으셨겠지. 그러므로 청소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외할머니가 가장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그 무언가였으며, 예측할 수 있는 '삶의 정답'이었겠지. 



유일하게 지울 수 있는 것


세상에는 지울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허공에 내뱉은 말이 어떤 이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것이 그렇다. 오래전 기억으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가 그렇다. 잊고 싶은데 잊히지 않는 사건이나 사람이 그렇다. 


그런데 청소는 무언가를 지울 수 있다. 쌓인 먼지를 닦고, 지운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없앤다. 책상에 새겨진 샤프자국을 지운다. 지우다 보면 원래 어질러져있던 혼돈의 상태도 가지런히 정돈된 편안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를 닮았다'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에는 그런 외할머니의 고집스러운 강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고민들을 뒤로하고, 일단 청소부터 할 때면 내 마음은 안정을 향해 달려가는 관성으로 다가간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삶의 물음표와 무게를 지니고 있더라도 청소를 하는 그 순간은 조금씩 달라졌다. 많은 것들을 지워나가고 정리하면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 글을 당장 쓰고 싶다는 생각도 불과 1시간 전 화장실 청소 덕분이었다. 화장실은 정말 야속하게 1주일만 써도 더러워진다. 곰팡이와 때가 낀 상태로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면 '아, 이번주 무슨 요일에는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화장실 청소는 고등학생인 동생의 과외 때문에 시작하게 됐다. 선생님께서 집으로 오시는 과외수업인지라 거실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청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처음에는 눈을 감고 거의 못 먹는 음식을 숨참고 먹듯이 청소를 했다. 그런데 이 행위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이제는 청소를 다하면 일종의 희열감까지 느낀다. 청소를 하면서도 내 팔의 힘을 이용해 바닥을 닦고, 청소도구로 변기를 닦고, 선반과 욕조를 부지런하게 문지르면 점점 광이 난다. 광이 나는 걸 볼수록 감정의 결이 달라진다. 내가 무언가를 깨끗하게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목도하기 때문이다. 



다시, 청소는 의식이다!


조던 피터슨은 청소하는 것을 권하기에 앞서 '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명상과 자아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스스로 어떤 목표를 달려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스스로 생각할 힘이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청소라는 것이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되는 것 같다. 청소가 곧 명상이며, 자아성찰이다. 청소를 한다는 것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거나 물건의 적절한 위치를 찾아가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생각하고 사고해야 한다. 결국 청소는 자기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되기에 주체성에서 비롯되는 행동이다. 

2년 전 쓴 에세이 '청소는 의식이다' 중에서


청소를 하면 할수록 확신하고 있다. 청소는 분명 명상과도 같은 효과를 주는 것 같다. 물건이, 나의 에너지가, 나의 정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때로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져도 그것을 마치고 나면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해 있다. 


나는 앞으로도 박멸과 통제 사이의 청소를 계속하고 싶다. 삶이란 원래 통제되고 박멸할 수 없는 수만 가지의 것들로 섞여있는 장이다.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머리가 지끈거릴 때면 청소를 하는 것이 좋겠다. 적어도 뭉쳐진 옷가지만큼은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다. 선반 위에 쌓인 먼지만큼은 광이 나도록 깨끗이 지울 수 있다. 때가 낀 유리만큼은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재창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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