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는 삶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다. 매일 목욕탕에서 2시간씩 목욕을 하시는 청결 끝판왕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아빠의 대표 어록이기도 하다. 할머니와 막상막하로 청소와 청결에 있어 한 명성을 떨치시는 분이 바로 해군 출신 할아버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청소의 유토피아'만 보고 자라온 아빠에겐 각잡힌 청소 정리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반대로 '청소 디스토피아' 속에 고통받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 내 방이 말끔하고 깨끗하게 정돈되기를 원하는 아빠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청소의 명가 신씨 집안에 돌연변이가 태어난 느낌이랄까. 아무리 "정리하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호되게 혼을 나도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원래 태어나기를 청소하기 싫어하는 아이로 태어났던 것일까? 아니면 청소하라는 잔소리가 싫어서 오히려 정신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까지의 글만 읽으면 꼭 청결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건 기필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완벽'에 가까운 청결을 지향했던 친가 속에서 내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임을 밝힌다.
지겹도록 반복되었던 아빠의 잔소리가 어느 날부터 들리지 않게된 것은 내가 '겉으로' 청소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즉 겉으로 청소하기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청소다. 예를 들어 아빠가 퇴근을 했을 때 거실이나 주방을 보고 급격한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예방 청소'를 하는 것.
그러니까 이 청소의 주된 목적은 온전히 나의 심신 안정이었다. 청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꾸지람을 듣거나 혼나지 않기 위해서였으니. 다행히도 이런 얄팍한 목적은 안전하게 달성되기 시작했다. 거실이나 주방에서 다루는 도구들은 매우 한정적이었으니까. 끽해봤자 접시나 컵, 음식 등이 주된 청소 대상이니 이들을 치우는 것은 별 생각없이 금방이면 가능했다.
빠릿빠릿하게 가족 공동체에서 청소하는 일원으로 자리매김을 한 덕분에 잔소리는 줄어들었다. 덩달아 청소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감정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치 내가 청소를 잘 하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마법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 이제 좀 청소의 청 자는 알게 된걸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거실과 주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방으로 돌아온 직후였는데, 기분이 쎄한 것이다. 분명 방금까지 열정적으로 설거지를 개운한 마음과 달리 혼돈의 카오스같은 내 방을 보니 말끔한 기분이 싹 사라졌다.
뿌옇던 눈 앞이 점차 선명해졌다. 눈을 크게 뜨고 나의 방 꼬라지를 살펴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쌓였는지도 모를 책상 위의 잡동사니와 물건들. 바닥에까지 쌓여있는 온갖 교재와 책이 피사의 사탑을 연출하고 있었다. '오, 맙소사..'
어느덧 n년이 넘게 들리지 않았던 아빠의 잔소리, "청소해라, 정리해라!"가 귀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깨달았다. 아, 아빠 말씀이 틀린 것 하나 없었구나. '꽃이 지고서야 봄인줄 알았다'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는 모르겠으나 '잔소리가 지고서야 진리인줄 알았다'는 말로 바꾸면 꽤나 적합한 인용구겠다.
머리를 질끈 묶었다. 소매를 걷었다. 이제 아빠의 음성이 아니라 나의 목소리로 외친다. "청소하자. 정리하자!"
22년만에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청소의 진리에 대해 깨우쳤다. 방의 청소 상태가 곧 정신 상태라는걸. 물론 사람마다 청소와 정리에 대한 생각 및 습관의 척도는 다 다르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는 상관없다. 그러나 나에게만은 이제 청소의 의미가 곧 삶에 대한 '의식'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발사이즈가 110이었던 때부터 240이 된 지금까지, 끊임없이 서랍장에 옷을 구겨넣거나 문구용품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는 역사는 내 스스로가 청소에 대한 의식, 더 나아가 내 방의 주인이 되겠다는 의식이 없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청소는 선택이나 의무가 아닌 의식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고 나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방 정리부터 하기 시작했다. 거실이나 주방 청소는 당연히 가족 구성원으로서 함께 정리할 공간이니 두말할 것도 없다. 반면 누구도 청소해주지 않는 내 사적인 공간, 방을 치우는 것은 당연하지만은 않았다. 온전히 나의 자유와 선택에 달린 문제였다. 허나 이제는 자유와 선택 그 이전에 '의식'이라는 메커니즘이 있다는걸 깨닫고 의식을 되살려 내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우선 글을 쓰고, 일을 하고,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공간인 책상부터 치웠다. 책상 위에 불규칙하게 놓여진 책들은 각자 제자리에 꽂고 필기구, 전자기기, USB 케이블 등 각종 문구류들은 각자 '있어야 할 공간'을 만들고 분류해 정리했다. 다음으로는 화장대와 옷장 정리.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쓰지 않을 화장품은 버렸다. 최근 N년간 입어보지도 않은 옷들은 미련없이 버리거나, 중고거래로 값싸게 다른 이에게 팔아넘겼다.
청소를 다하고 난 후 깨끗해진 방을 둘러보았다. '..내 방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모든 것이 정돈된 나의 가장 사적인 공간.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질이 높아진 것만 같았다. 이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산적인 생각이 들고, 나태해진 마음은 때가 씻겨내려가듯 홀연히 날아가버리고 만다.
최근에 '청소는 의식이다'라는 깨달음을 더 강화해준 영상을 발견했다. 유튜브 채널 <조던 피터슨의 일기장>에 탑재된 '빌어먹을 방 정리부터 시작하세요'라는 제목의 컨텐츠다. 이 영상을 보고나니 나는 도저히 전과 같은 '청소 무의식'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조던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머무는 방은, 당신 자체입니다."
그는 당신이 매일 사는 공간을 정리하고, 당신 스스로를 뒤돌아볼 시간을 가지라며 "방을 정리하라(Clean up your room)"고 말했다. 덧붙여서 그는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이 '남들의 기준에 맞춰 보여주기 식으로 살거나, 노력없이 지름길로 가려고 하거나, 현실과 책임감을 기피하는 것'이라 일컬었는데,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피할 수 없었다. 지난날 아빠의 레이더망만 살피며 나 자신의 책임감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을 완전히 인정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여주기 식으로 청소했던 것, 내 방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지 않고 현실과 책임감을 기피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다시는 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청소가 이토록 삶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니, 놀라운 동시에 흥분되는 감정이 고조되는걸 느낀다. 청소를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의식을 높이는 일이며, 동시에 자신의 의식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意識)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으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또다른 의미의 의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청소를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이라 불리는 '의식(儀式)'으로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최자도 나 한 명, 참여자도 나 한 명이지만 스스로에게 있어 하루를 시작하거나 끝맺는 가장 숭고한 의식이 되는 것이다.
조던 피터슨은 청소하는 것을 권하기에 앞서 '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명상과 자아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스스로 어떤 목표를 달려가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스스로 생각할 힘이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청소라는 것이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되는 것 같다. 청소가 곧 명상이며, 자아성찰이다. 청소를 한다는 것은 버려야할 것을 버리거나 물건의 적절한 위치를 찾아가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생각하고 사고해야 한다. 결국 청소는 자기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되기에 주체성에서 비롯되는 행동이다.
나는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어쩌다보니 청소 명가 신씨 집안에서 돌연변이 신세는 자발적으로 벗어나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청소에 대한 의식(意識)을 일깨워 매일 사소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의식(儀式)에 참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