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수림뉴웨이브 특별공연 [Re:Wave] - 아쟁 김범식 후기
전세계가 열광하는 K-POP, 그 이전에는 한국 음악의 근간이 된 전통 음악이 있다. 전통과 현대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현시점에, 한국의 뿌리 깊은 음악을 새롭게 발견하는 뜻깊은 장에 초대 받았다.
수림문화재단에서 개최한 우리음악 축제 '2023 수림뉴웨이브 특별공연 [Re:Wave]’를 관람하고 왔다. 모교가 있는 동대문구의 김희수아트센터에서 공연이 열린다니, 그 어느 때보다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아갔다.
이번 공연은 창의적이고 실력 있는 전통음악 아티스트를 발굴·지원하고, 한국음악 중심의 창작 콘텐츠를 선보이는 수림문화재단의 대표적인 한국음악 축제다. 2012년 '북촌뮤직페스티벌'에서 시작해 올해로 12년째를 맞았다고.
9월 6일 수요일에 관람한 공연에는 2022년 수림뉴웨이브 아티스트로 선정된 아쟁 연주자 김범식이 전년도 수림뉴웨이브에서 선보였던 [한국의 새로운 정서]를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다시 한 번 선보였다. 그는 전통 판소리 서사를 기반으로, 아쟁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머리 털이 나고 생애 처음 보는 아쟁 공연.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우리 음악을 표현하는 수많은 악기 중에서도 아쟁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이와 감동은 남달랐다. 우리말로는 대체 불가능한, 영어로는, irreplaceable이라는 수식어가 꼭 맞는 악기였다.
또한 아쟁 외에도 판소리, 가야금, 타악, 해금, 철현금의 음악을 다채롭게 들을 수 있어 황홀함을 한 스푼 더 얹는 시간이었다. 다른 어느 곳에도 쉽게 볼 수 없는 ‘전통음악’의 진수를 경험하고 온 순간을, 지금부터 소개한다.
아쟁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번 공연으로 새롭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 바로 ‘아쟁의 쓰임’이다.
아쟁은 삼국시대부터 쓰인 민족 현악기다. 고구려, 발해, 고려로 계승되며 21세기까지 그 역사를 이어 오고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조선 성종 24년에 편찬한 국악 이론서『악학궤범』에는 조선 전반기에 쓰인 아쟁의 형태와 제작법, 연주법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김범식 연주자가 선보인 아쟁의 음악은 한 마디로 ‘깊은 바다’와 같았다. 저 저나먼 바다의 깊은 곳에는 어떤 생명체와 색깔이 빛나는지 알 수가 없는데, 아쟁이 딱 그처럼 신비로운 바다의 기세를 하고 있었다.
눈으로는 아쟁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도 막상 연주가 시작되면 어떤 소리와 울림을 낼지, 그 다음 순간까지는 한 치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동굴의 소리로, 때로는 세상의 짐을 한가득 지닌 대인의 목놓아 우는 소리로, 때로는 거대한 크기로 밀려오는 파도소리 같기도 했다.
공연을 관람하다보니 아쟁의 특이한 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아쟁이 찰현악기, 즉 현을 활로 마찰해서 소리를 내는 현악기임에도 불구하고 무릎 앞쪽에 펼처 놓고 앉아 찰현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찰현악기는 보통 악기를 가슴이나 어깨 또는 복부에 밀착시키지 않나.
하지만 아쟁은 연주자 앞에 내려놓고 활대를 이용해 지속음을 내는 신기한 연주법을 뽑낸다. 울림이 크고, 음역이 낮으면서도 그 웅장함이 대단하여 공연장 전체를 아쟁의 소리로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아쟁을 연주하는 김범식 연주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호랑이 한 마리를 다루는 진중한 멘토처럼, 그는 아쟁과 조우하는 모든 순간에서 대담했고,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웠고, 그럼에도 강인했다. 김범식 연주자는 아쟁과 어떤 특별한 추억을 품고 그 자리에 올랐는지, 새삼 궁금해지는 밤이었다.
김범식 연주자는 전통과 대중화 사이의 어떤 지점을 찾아 계속해서 새로운 곡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전통에서 비롯된 악기지만, 현 시점에서 대중이 좋아할 만한 어떤 포인트를 찾아서 끊임없이 도전을 한다는 이야기다.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그와 단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는 것. 이보다도 더 황홀한 대화가 있을까. 아쟁과 김범식, 김범식과 아쟁은 그런 황홀한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공연을 빛낸 또다른 주역은 바로 판소리, 가야금, 타악, 해금, 철현금이었다.
집 가는 길까지 계속 잔상이 남았던 순간은, 바로 이승민 명창이 부르는 판소리의 한 장면이었다. 한국 고전소설 <심청전>을 주제로 심봉사와 심청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했던 곡이다.
이승민 명창은 심봉사가 되어 딸에게 “떠나렴”이라고 울부짖으며 한참을 외쳤다. 떠-, 나-, 렴-. 이 세 글자에 모든 감정과, 사랑과, 애원과, 슬픔을 담아 노래한 이승민 명창의 소리가 끝없이 깊은 감동을 주었다. 단순히 표현력이 풍부했다는 납작한 언어로는 그날의 전율을 다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그 순간이 오로지 명창의 울부짖음으로 채워지는 마법같은 순간이었다.
철현금은 이번 무대를 계기로 처음 알게 되었다. 철현금은 ‘쇠(鐵)줄을 얹은 거문고(玄琴)’라고 한다. 20세기 이후 거문고와 기타의 장점을 수용하여 새로 만든 악기라고. 거문고와 유사하게 가느다란 막대기인 '술대'를 쥐고 뜯거나 내어 연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쟁과 타악, 가야금과 함께 어우러지는 철현금의 오묘하고도 청아한 소리가 내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눈을 감고 들으면 한 데 어우러져 섞인 소리를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철현금이 내는 강렬한 영향력 만큼은 인지할 수 있었다.
한편 가야금은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온 소리라, 이번 연주 중에 가장 친숙하고도 반갑게 감상했던 악기다. 마치 궁중 연회에 온 것처럼 때로는 단아하게, 때로는 새침하게 소리를 뽐내는 그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또한 여리면서도 뚝심있는 인물의 태도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야금이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다.
해금은 첫 등장부터 적잖은 놀라움을 준 악기다. 아쟁과 마찬가지로 해금의 정식연주를 들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세로로 건 두 줄 사이에 말총 활을 넣어 연주하는 찰현악기의 힘이란, 신비롭고도 오묘했다. 해금을 한 번도 연주해본 적은 없지만, 공연에서 꽤 집중해서 연주법을 보다보면 ‘힘’의 균형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타악이다. 타악 연주자는 여러 가지 타악기를 동시에 다루며 능수능란한 전문가의 면모를 보였다. 곡의 분위기와 뉘앙스에 맞게 적절한 악기를 세기에 맞게 다루며, 긴장감과 몰입도를 높이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타악기 연주자는 연주의 타이밍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해야 하는 사람이겠거니, 예상해볼 수 있었다.
우리음악의 매력과 감동에 대해 새로이 발견하게 된 수림뉴웨이브의 축제. 이번 공연을 통해 나는 삶 속에서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의 음악’이 아닌 ‘현재, 지금 이 순간에도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음악’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야말로 전통음악이 가장 빛을 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 한국인의 음악 혼을 지닌, 그 혼의 뿌리를 지닌 음악이 낼 수 있는 힘은 따라하기조차 어렵다. 전통 예술 창작가들이 선보이는 공연은 그런 의미에서 혁신이자, 계승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