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스켈레톤> 솔직 리뷰
참으로 신기한 하루였다. 해가 질 무렵 경의중앙선을 타고 서울을 벗어난 그날은 평일이었다. 빌딩 숲을 가볍게 벗어나 이윽고 보이는 광경은 초록 빛깔의 밭. 공연장까지 가는 그 길은 이상하게도 마치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탁 트인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모습. 모두가 붐비는 도시에서는 기대할 수조차 없던 풍경이지 않나. 공연장 근처에 도착해서도 고요하고도 넉넉한 주택들을 품은 한적한 마을이 신비로웠다.
공연장에 도착하자 한번 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학로처럼 연극과 뮤지컬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풍경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공연장은 불교 신도들이 모이는 사찰 건물의 지하 1층에 있었다. 조금은 긴장되기도, 또 경건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지하 1층에 도착했을 때 드디어 공연장 입구를 보고 ‘여기구나’ 하며 안심할 수밖에.
그날 관람했던 연극 <스켈레톤 크루>도 내게 묘한 감각과 자극을 선물했다. 노동과 연대, 갈등과 화합을 '생각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하고 끝없이 재생하는 밤이었다. 과연 노동의 가치는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둥근 달이 뜬 한밤중 산길을 내려가며 내내 물음표를 띄웠다.
<스켈레톤 크루>는 사람 냄새가 솔솔 풍기는 연극이었다. 치렁치렁한 수식어 없이도 오로지 몸으로, 언어로 세상과 맞서 싸운 솔직한 사람들을 만난 작품이다.
연극 <스켈레톤 크루>의 배경은 2008년 세계 경제 침체로 인해 파산을 선언한 도시 디트로이트다. ‘노동자들의 도시’로 불렸던 이곳에는 결국 생존의 막다른 길에 다다른 노동자들이 피를 토하기 직전이었다. 누군가는 쫓겨나는 것이 두려워 소리치고, 누군가는 이미 집을 잃었고, 또 다른 이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며 큰 소리를 낸다.
<스켈레톤 크루>는 인물 간의 대화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다. 화려한 조명도, 휘황찬란한 시각적 효과도 없다. 오로지 배우의 연기와 대사만으로 200% 의지한다. 총 네 명의 인물이 극을 이끌어간다. 이들의 심오한 대화 속에서, 삶과 생을 건 싸움의 언어 속에서 ‘노동’의 의미를 찾는 시간이었다.
노조 대표인 페이는 자동차 공장에서 29년을 일했다. 1년만 더 채우면 퇴직연금을 받을 수 있으나 자동차 도시의 파산과 구조 조정의 위기에 내몰린다. 노동자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공장에서 보낸 ‘살아있는 역사’의 인물이다.
데즈는 자신만의 자동차 정비소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청년이다. 불같은 성격과 넘치는 에너지를 마구 뿜어내며 절대 공장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한다. 자신을 불량하게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레지와 때때로 치열한 갈등이 일어난다.
샤니타는 아이를 임신한 노동자다. 뱃속에 아이를 품고 매일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낸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노동자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충분히 알고 있다. 뚝심있는 데즈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를 사랑하게 된 샤니타는 노동과 사랑 모든 측면에서 단단한 면모를 보인다.
레지는 공장의 본부와 노동자 사이를 잇는 중간 관리자다. 현장 노동자 출신이지만 페이의 도움으로 중간 관리자가 된 레지. 그는 페이의 조카이기도 하다. 노동자이 계속 일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네 명이 끊임없이 얽히고, 섞이고, 갈등하는 대화 속에서 고민했다. 각자에게 왜 노동이 필요한지에 대해 말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왜 목청 높여 소리치고 때로 울분을 터뜨렸는지 말이다.
공연이 끝난 후 곰곰이 생각하니 얼핏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페이에게 노동은 인생 그 자체, 데즈에게는 꿈을 조립하는 지도, 샤니타에게는 이름 모를 세상에도 유용함을 선물할 수신기, 레지는 한 가족을 먹여살릴 펌프였다.
생존과 노동의 순환에서 이들은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했고 노동하기 위해서는 생존해야만 했다. 일자리에서 내쫓길 위험에 처한 이들은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비틀거렸다.
연극이라는 시공간적 현장은 확실히 영화와 드라마와는 다른 구체성을 보여줬다. 경계선에 선 이들이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는 그라데이션을 분절된 과정없이 빼곡하게 드러냈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가장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때로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스켈레톤 크루>는 그 잔재까지도 남김없이 감각하게 했다.
<스켈레톤 크루>는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었다. 공장의 위태로운 상황 속에 얽히고설킨 이들은 결국 마지막까지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억울한 누명을 쓴 데즈를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를 지킨 페이와 샤니타, 무자비한 공장 간부에게 용감히 돌진해 노동자를 지켜낸 레지까지. 이들은 오랜 시간 묵묵하게 갈고 닦은 세월의 연대를 끝내 지켜냈다.
오늘날 화합과 연대는 왠지 낯선 단어처럼 느껴진다. 팽팽한 날이 선 채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사회의 얼굴이 더 진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스켈레톤 크루>는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내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끌어 안아야 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뭉쳐야 한다고.
연극은 분명 사람들의 인생을 비유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스켈레톤 크루>가 끝난 뒤 내게 남겨진 단 하나의 의미는 '노동의 이유'였다.
극 중 샤니타의 대사가 오래 마음에서 머물렀다. 자동차 공장에서 그녀가 만든 부품으로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고. 누군지도 모르고 평생 마주칠 수도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녀는 매일 작업장을 나선다. 자신의 노동으로 인해 행복해질 사람들을 떠올리기에.
노동의 주어를 나로 바꾸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왜 노동을 하는가'. 작게 보면 돈을 벌어 내 몫을 책임지는 일. 크게 보면 현재와 미래를 재단하는 일. 멀리 보면 삶의 굵직한 퍼즐을 채워가는 일. 신기하게도 작게, 크게, 멀리 본 노동의 이유가 꼭 빠짐없이 필연적으로 느껴졌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 앞. 발을 동동 구르는 페이, 데즈, 샤니타, 레지를 보며 생각했다. 이들의 모습이 꼭 누군가의 거울과 같다고. 어쩌면 <스켈레톤 크루>는 2023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