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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진 Jul 16. 2021

이육사의 시와 전설

대한민국 교육이 시를 대하는 자세

먼 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 이육사 <청포도> 

이육사, 한용운, 윤동주 외에도 많은 독립운동가와 저항 문화인들은 그토록 바라던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살아 있는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 후기에서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라고까지 했지만,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이루어진 후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육사가 꿈꾸었던 ‘먼 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힌 전설’의 모습일까. 


“나에게는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다.” 

이육사 <계절의 오행> 

우리나라는 몇 년 전 매우 훌륭한 민주주의적 행동을 해 낸 기억이 있다. 거대한 평화 집회로 대통령 탄핵을 이루어낸 우리의 행동을 본 독일의 한 언론은 “이제 미국과 유럽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보도했다. 또 스위스의 한 연구소가 발표한 세계 178개국 민주국가의 민주주의 수준 연구에서 한국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스위스 등 전통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에 이어 12위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결과를 받아든 우리 스스로는 의아할 뿐이다. 이후 우리 손에는 진정 국민의 것인 민주주의가 들려 있는가. 

3.1운동 이후 수많은 독립 투사들을 잃고 해방을 이루어낸 이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그리고 촛불집회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을 쟁취하게 한 우리의 ‘행동’들. 그런데 쟁취한 독립은 늘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는 쟁취할줄 아는 국민이기 이전에 쟁취해야만 얻을 수 있는 여전히 불안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 여기에 남북을 가른 극단적 분열의 역사와 일제의 잔재, 그리고 70년 전과 다름없이 우리가 기쁨을 누릴 시간을 주지 않고 기회만 되면 손을 뻗는 열강들. 이런 환경에 무뎌진 우리는 생계를 위해 군사정권이 남긴 경쟁주의 사회로 재빨리 돌아와야만 하는 각자의 사정상 그 위대한 기억들을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 

우리의 기억력이 취약한 또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교육이다. ‘나에겐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라는 이육사의 철학은 우리의 교육을 통해서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교과서에 담긴 <청포도> 등의 시어들은 그를 행동하게 했던 그 뜨거운 가슴과 안타까움의 온도 없이 덤덤하게, 남의 일처럼 전달됐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 <대학> 경1장 

이육사 <청포도> @https://han.gl/Wxy0H

독일의 중고교 교육과정 역사 과목은 세계 제2차대전에 대한 내용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이 언급했다. 영광의 역사만 역사가 아니다. 우리에게 고구려의 역사가 영광이요 자랑이라면, 위기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행동하고 고민했던 사람들 내면의 역사가 역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해방 후의 정치는 이순신 장군을 골라 독재자의 모습이 투영되는 마법 거울로, 신사임당을 골라 가부장 사회를 뒷받침한 든든한 내조의 여왕으로 만들었다. 공산주의 이론을 선택한 사람들을 ‘빨갱이’라는 프레임에 몰아넣어 우리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또 한 부분을 덜어내고, 3.1운동에 동참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고’, 독립군이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얼마나 ‘잦았으며’, 안중근과 윤봉길의 거사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강조했다. 경제 성장률, 매출, 수출액 등 숫자적 목표를 내세워 국민을 재촉하던 시대의 논리 그대로 역사의 위인 역시 그들이 남긴 업적을 수치화한 결과를 기준으로 선별해 교과서에 실었다. 

이에 비해 비밀스러웠던 이육사의 생애는, 주요한 일본인 인물을 죽이거나 규모 큰 저항 행동의 성과를 남기지 않았다. 그의 심정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글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업적이었으므로 그 이면에 담긴 생애와 철학은 연구될 기회가 없었다. 

이처럼 왜곡됐을뿐 아니라 내적혁명의 역사에 무관심한 우리의 국사 교과서 안에서 조선시대는 1910년 한일병합으로 나라가 망하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이육사를 비롯한 선비 출신 독립투사들의 정신적 뿌리도 이 시기에 끊어진다. 학습이 되지 않았으니, 기억이 될 리 없다. 배움에 도(道)가 없었으니 덕을 밝힐 힘도 없었다. 

더구나 우리의 교육에는 교사(校舍)부터 과목 분류, 커리큐럼과 교육 내용 곳곳에 일제 잔재가 남아 있다. 촛불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던 바로 그 정권이 국사 교과서를 일제 시대의 시점으로 돌려놓으려는 시도를 감행한 사실이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독재에 항거하여, 이번엔 화염병 아닌 촛불로 대한민국 땅의 중심을 밝혔던 우리의 힘은, 교육의 여전히 협소하기만 한 시각을 넘어 본능처럼 살아 있는 선비 정신 아니었을까.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 이육사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6세기 후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문은커녕 한문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 보고를 들은 선조는 “그는 정말 사람인가?”라 물었다고 한다. 이처럼 힘만 있으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나라가 15세기의 일본이었다. 반면 우리는 자신이 학문을 연마하는 가운데 얻은 원칙과 소신을 거침없이 주장할 수 있는 선비의 나라였다. 

도쿄대 출신 귀화한 일본인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한국인에게 “그분은 훌륭한 선비다.”라고 말하면 그건 대단한 칭찬’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선비는 죽음 앞에서도 소신을 갖고 일을 추진하는 학식과 덕성, 그리고 예술성을 갖춘 사람, 예의와 의리, 그리고 덕성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참 스승이었다. 그 본분은 배움이었고, 그 배움을 인(仁), 즉 인간다움에 쓴다는 것이 유교를 공부한 선비정신의 발로였다. 과거 공자를 낳은 중국의 오늘날은 지난 날의 중국의 모습은 아니지만 ‘인’의 가치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다. 선비정신 역시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이어간 사람들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도구이자 관문이 됐다. 좋은(높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고위 관직자가 되기 위해 지식을 입시 경향에 맞추어 지식을 정리해 집어넣는 훈련을 한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이런 교육을 다 받고 나면 서른이 넘는다. 이 나이의 대한민국 사람은 이육사의 시 <절정>의 시어를 알고 있으나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시어 속에 담긴 이육사의 금강심(金剛心)과, 금강심을 만든 서릿발 칼날진 그 위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아직도,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할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다. 육사는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었습니다.’라고 <계절의 오행>에서 말하였다. 잘못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와 생활자세는 어느날 갑자기 돌연변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目目相貫革 聖意焉攄得(눈과 눈이 서로 꿰뚫어 거룩한 뜻을 깊이 깨닫네) - 유영모 <목적> 

안동대학교 사학과 김희곤 교수의 <이육사 평전>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육사의 행적을 따라 그의 닮을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한다. 

이육사 출신지인 아육사 문학관에는 그의 삶과 생각이 알려지지 않은 데 대한 비슷한 안타까움이 읽힌다. 전 세계가 젊은 혁명의 몸살을 앓던 1960년대를 그냥 지나친 바람에, 제대로 된 내적혁명의 역사를 아직 갖고 있지 못해, 그 지식에 대한 호기심도 부족하다. 역사에 대해서도 시에 대해서도 의미보다는 지겨움과 거부감만 학습되어 있다. 교육에 대한 유난스런 집착은, 공부를 싫어했던 개개인 삶의 역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자리에 남아 진리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가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도 <담론>에서 '문사철(文史哲)은 그 안에 저자의 정치적 색깔이나 사고의 틀이 숨어있게 마련이라 그 자체로 세계의 정직한 인식 틀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적 의미를 뛰어넘는다'고 했다. 역사에 대한 피상적 해석만 반복하며 시는커녕 문사철의 근처에도 가지못하는 우리 교육은 아직도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겠다. 

우리가 다시 이육사나 윤동주와 같은 사람들의 시를 집어들게 할 수는 없을까. 최근 들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인문학의 관심 역시, 지식을 쌓아 드러내는 데 그치지 말고 꿰뚫어 거룩한 그 의미를 깨닫는 도구이자 과정이 되었으면 한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 이육사 <노정기>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하는 쩡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를 벗어나면 태풍과 싸워가고

전설에 읽어 본 산호도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이 비쳐주지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을 한숨에 기어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처럼 발목을 오여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인양

다 삭아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의 노정 흘러간 생활을 들여다보며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이라는 인물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직 핵심 인물의 정보를 일제에 팔아넘긴다. 해방 후 그는 재판에 넘겨지는데, 재판정에서 자신의 독립운동 활약상을 강조하며 배심원의 감성을 자극해 처벌을 면한다. 법원에서 나오는 염석진에게 과거 독립운동 동지들이 뒤쫓아 총을 겨누며 “왜 밀고했느냐?” 묻자 염석진은 말한다. “해방될줄 몰랐으니까!” 

반면 <노정기>의 이육사는 지친 몸으로 희망을 노래했다. 남십자성처럼 먼 희망이지만 스스로의 삶과 죽음과 관계 없는 절대적 희망이다. 시대의 흐름을 눈으로 보고 쉽게 희망을 버린 사람들과 달리 이육사는, 그것을 향한 ‘금강석’과 같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시대도 희망이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시대는 아니다. 억지로 희망을 만들어 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벌어 봐야 집 한 채 못 사는 세상이라며 ‘헬조선’, ‘YOLO’라는 말에 기대는 젊은 세대의 모습에서 희망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모습을 본다. 한때는 경쟁적으로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젊은이들의 유행이 씁쓸했던 적이 있다. 

‘나는 내 기백(氣魄)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詩)를 쓸지언정 유언(遺言)은 쓰지 않겠소.’ 역사는 희망을 쉽게 잊는 사람에 의해 방황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올곧은 희망을 지키는 사람에 의해 무겁지만 올곧게 흐른다. 희망은 오래 갖고 있기 어렵지만 쉽게 버리는 순간 허망한 꿈이 된다. 

이육사 선생의 딸 이옥비 선생이 한 인터뷰에서 청년들에게 “아버지 같은 정신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았으면.”이라 부탁했다. 빼앗긴 나라, 일제시대 막바지에서 통곡하던 윤동주, 금강심처럼 강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이육사.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이런 분들을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역사는 이처럼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들이 가졌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불멸의 희망, 자기 자신이 죽더라도 이루어져야 할 꿈이 오늘의 우리를 살아 있게 하기 때문이다. 


안동 이육사문학관 앞 이육사의 동상과 그의 시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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