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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진 Jul 15. 2021

이광수 무정(無情)

잊을 수 없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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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과 개화 

무정은 1917년 쓰여졌다. 3.1운동 2년 전이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에게 낯선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랜 쇄국 후 갑작스럽게, 그것도 '악의를 가진 타국' 즉 일본에 의해 문을 연 조선에게는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더욱 복잡스럽게 흘러들어왔다. 인천항과 부산항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문명, 문화와 사고방식들이 도시 거리에 출렁이는 반면, 왕조 600년에 걸친 유교 문화의 사고방식은 쉽게 흔들릴 정체성이 아니었다. 


1885년 떨어진 '단발령'부터 친일 정권의 조치였다. 그러니 백성의 저항은 단순한 관습에 의한 거부감에 그치지 않았다. 서양문물은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라 편리하거나 합리적이기도 했지만, 새로움이 삶의 면면에 스며드는 과정은 조선 사람에게는 유난히 까다롭고 아픈 과정이었다. 이광수의 <무정>은 이런 시대 젊은이들이 겪었을 문명과 가치의 혼돈, 충돌, 그리고 다소 갑작스러운 해결과정을 그렸다. 

@서울사랑 홈페이지 https://han.gl/fDDIj 

어쩌다 삼각관계 

주인공 형식은 성향상 선비에 가까운 인물이다. 말을 아끼고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다. 동경유학 출신 지식인으로 자부심도 있다. 그는 경성학교 영어교사인데, 그에게 지인 김 장로가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인 딸의 영어 수업을 청한다. 마침 김 장로의 딸 선형은 그 동네 젊은이들 입에 오르내릴만한 미모를 가진 터라, 친구 선우의 부러운 눈치를 외면했지만 막상 선형을 마주한 형식의 마음도 설레기는 마찬가지다.


하숙집에 한 여성이 찾아왔다.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7년 전 헤어진 영채였다. 형식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박 진사의 손에 자랐는데, 박 진사는 일제침략기 초반 애국계몽운동 시기에 평양에서 사비를 털어 학교를 만들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영채는 그 딸이다. 헤어지던 해 영채는 13세였는데 이제 19세가 되었다. 영채를 보자 어린 시절 추억과 박 진사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사의 마음으로 형식은 눈물을 떨군다. 


박 진사는 영채가 크면 형식을 사위 삼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선의는 독이 되고 악의가 통하는 시절이었다. 박 진사를 존경하던 동네 사람이 학교를 운영하느라 곤궁해진 박 진사네 살림을 걱정하여 도둑질을 했는데, 박 진사와 아들 둘이 공범으로 연루되어 감옥행을 하게 된 것. 천애고아가 된 영채는 평양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경성으로 온다. 그러나 영채가 막상 형식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영채는 그런 가족을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 그렇게 된 모습으로 아버지를 찾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감옥에서 부고가 들려온다. 천생 양반인 박 진사는 딸이 기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목에 걸려, 영채는 갑작스럽게 형식의 면전을 뛰쳐나온다. 이런 인생을 과연 형식이 이해하고 받아줄 것인가. 보아 하니 형식도 나를 구해 줄 만큼 형편이 넉넉지 않은 듯한데 짐이 되는 것은 아닌가. 


영채가 애틋할수록 형식의 궁금증은 커진다. 여자 몸으로 7년 동안 대체 생계를 무엇으로 이었을까. 기생이 된 것일까, 정조를 지켰을까, 잃었을까. 형식의 애정(愛情)은 이와 같은 유교적 윤리관의 도덕률에 고스란히 빨려 들어가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형식은 다음 날 지역에서 유명한 월향이 영채일 것이라는 심증만으로 기생집 '계월향'을 직접 찾는다. 월향이 오늘 청량리에 출타했다는 말을 듣고 우선과 동행으로 무작정 청량리로 향한다. 


청량리의 절 청량사. 월향은 동네 이름난 망나니인 경성학교주 아들 김현수와, 학교주에 아첨하는 교사 배명식과 동행이었다. 형식과 우선의 손에 구출된 월향은 짐작대로 영채였다. 입술이 뜯겼고 치마가 찢어졌다. 그런 영채를 집에 바래다 주는 형식의 머릿속은 아까 청량사에서 방을 들여다 보던 신우선의 "모 다메다(もうだめだ, 이제 틀렸어.)"라는 말로 괴롭다. 대체 무엇이 '틀렸다'는 말일까. 


혼란으로 밤을 지샌 형식이 다음 날 계월향으로 다시 찾아가니, 형식에게 편지를 남기고 새벽같이 평양으로 떠났다. '7년 동안 형식만을 바라고 살았으며, 그래서 기생 노릇을 하면서도 정절을 지켰다. 그런데 어제 형식의 눈앞에서 잃었으니,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고, 그래서 대동강물에 몸을 던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소학>과 <열녀>가 영채를 죽였구나

영채가 남긴 편지를 읽고 난 형식은 '영채가 무수한 도덕률 중 하나가 마치 여자의 생명 Life 전체인 것으로 오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서까지 정절을 지키려는 영채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사람이 죽을 일은 아니다. 도덕률은 중요한 것이지만 사람이 도덕률의 위에 있는 것이고, 사람을 죽고 살게 하는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다. 형식은 '<소학>과 <열녀>가 영채를 죽였구나.' 한다. 

신윤복 월하정인(月下情人), 강명관 교수는‘열녀’라는 관념은 고려 말~ 조선 초 등장하여 17세기 이후 정착된 것이라고 말한다. @<열녀의 탄생>

형식이 평양에 도착했으나 영채는 간 곳이 없다. 경찰서에서도 대동강물에서 자살 해프닝을 벌이는 젊은 여성이 한두 명도 아니라 행방을 모른다. 박 진사의 무덤에 가 봐도 영채가 다녀간 흔적이 없다. 대동강에 가서 죽은 영채의 시신을 무겁게 들어올릴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영채를 반갑게 안고 경성으로 돌아올 것인가. 형식은 대동강행을 그만두고 서울행을 택한다. 


"내가 이리 無情해도 되는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무거운 짐을 던 것 같아 시원한 동시에 고약한 심정을 어쩔 수가 없다. 기차가 평양에서 멀어질수록 영채도 멀어지고 영어 수업을 받던 선형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자태가 떠올라 마음이 기뻐 들뜬다. 그러다 '내가 이리 무정(無情)해도 되는가' 불쑥 양심이 끓어오른다. '아니다 이미 영채는 죽었을 텐데.' 그러는 사이 기차는 남대문에 도착한다. 


사실 김 장로는 형식을 영어 선생으로뿐 아니라 사윗감으로 점찍어둔 것이란다. 서울 하숙집에 그런 전언이 들어와 있었고 형식은 그날로 김 장로 집안 저녁 식사에 초대받는다. 게다가 김 장로 집은 딸의 유학에 동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형식과 선형은 5년 공부 후 혼인을 하라는 어른들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tvn  <미스터 션샤인> 고애신과 쿠도히나. 우리의 개화기는 과거와 현재의 가치관 그리고 침략자의 영향이 사회, 가족, 그리고 개인 안에서 어지럽게 충돌하던 시기였다. 

그러는 동안 영채는 평양행 기차에서 병욱을 만난다. 병욱은 영채를 뜯어 말린다. 병욱은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 결혼하면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유교 원칙을 비판한다. 그것이 여러 천만 여자를 죽이고 여러 천만 남자를 불행하게 했다는 것이다. 삼종지도는 여자가 따를 원칙이 아니라 '여자의 인격을 무시한 남자의 포학이다. 


영채는 부사종자(夫死從子)하려 했다. 그게 당연했다. 아버지[父]를 따르려 기생이 되었고, 이제 지아비[夫]를 찾아 따르려 했지만 더 이상 따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죽으려 한 것이다. "왜, 이형식?" 병욱의 질문을 받고 보니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물어본 적도 의심해 본 적도 없다. 


"영채 씨가 죽는 게 의리 같아요?" 과연, 초개같이 버리려던 목숨은 자기 것이지만 거기에 제 뜻은 티끌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병욱은 말한다. 부모 지아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며, 여자도 자기 직분을 가져야 한다. 영채가 살아야 한다며 병욱이 드는 여러 가지 근거가 영채에게 낯설다. 그러나 죽었을 줄 안 영채는 새롭게 태어난다. 과거를 지키려 미래를 버리려 했던 영채는, 병욱과의 만남을 통해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얻는다. 


깨달음의 콘서트 

형식은 선형과 미국으로, 영채는 병욱과 동경으로 가기 위해 부산까지 가는 기차에서 모두 만난다. 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차는 경상도 지방에서 홍수를 만나 수 시간 동안 멈춘다. 이를 계기로 모두는 새로운 가치를 경험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과학이 없는 농촌은 수해로 모든 것을 잃는다. 농부는 땅 하나와 하늘만을 믿고 씨를 뿌려 가을 추수가 허락되면 그 해는 사는 것이고, 재해를 만나 추수를 하지 못하면 그 해는 거지가 된다. 이것이 농민들의 숙명이라 생각하지만, 아니 이는 지식의 부족함이다. 형식은 이렇게 깨닫고 교육학과 생물학을 진로로 정한다. 


넷은 기차역 자선 콘서트를 연다. 박수 갈채와 함께 모인 돈은 그들의 재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마음즉 유정(有情)함에 대한 감동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 돈은 수해민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제공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영채는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재주로 진심어린 박수갈채를 받는다. 그것이 수해로 고통받는 농민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 여자가 세상에 태어나 따를 것이 아버지, 지아비, 아들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든 과정을 제3자 입장에서 관찰한 신우선 역시, 자신을 가두고 있던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워진다. 한편 일찌감치 동경유학에 가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감 없이 받아들여온 병욱은, 방황하던 이들 주인공들에게 마지막으로 새로운 미래에 대한 확신의 문을 열어 준 셈이 되었다. 


친일파의 무정(無情)

1917년 매일신보에 <무정>이 연재되는 6개월 동안 독자들의 관심이 뜨거웠다고 한다. 그러한 6개월 대장정의 마무리는 배움을 통해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젊은이들의 다짐으로 맺어진다. 무척이나 계몽주의적인 결과가 생뚱맞았는지 현실에 맞지 않았는지에 대한 논란도 들어야 했다. 


이광수는 이형식처럼 어린 시절 부모를 전염병으로 여의고 동경 유학에 다녀왔다. 그는 최남선과 함께 '동경삼재' 지금으로 치면 동경 유학파 영재로 유명했다. <무정>만해도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 쓴 것인데, 1921년 이광수는 느닷없이 <민족개조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일제강점기는 조선인의 무능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말언으로 친일의 문턱을 넘는다.  1919년 3.1운동에 놀란 일제가 조직적인 친일파 양성에 들어가고, 이광수는 이때 변절한 것 같다. <무정>의 이형식이 유교윤리와 주체적 애정 간 삼각관계에서 자신의 미래를 약속하는 유교윤리적 혼인을 선택한 것처럼, 이광수도 익숙한 삶의 길을 약속하는 일제와 빼앗겨 허덕이는 조국 중 일제를 선택한 것이다. 

영화 <암살> "왜 동지를 팔았나?"는 독립운동 동지의 물음에 염석진의 대답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는 당시 친일파들이 공통된 논리였다. 

이광수는 자신의 지식과 그 뛰어난 필력을 활용해 1937년 중일전쟁, 1941년부터 일본이 참전한 제2차대전에 수많은 조선 젊은이들이 일본을 위해 목숨 바치게 했다. 이 시기 이광수는 언론 등을 통해 '2,300만 명 모두가 군대에 다녀와 일본의 정신을 가지는 것이 필연' 이라든가 '천황께 바쳐 쓸데있는 사람이 되자'는 등의 글을 남겼다. 1910년 이후에 태어나 조국을 잘 모르는 젊은이들은 이광수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피가 끓었다. 


이 시기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파로 전향했다. 1910년 이후 일제 통치 기간이 30년을 채워 가던 길목이었다. 광복의 희망을 지키기에 짧지 않은 세월이었을 것이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이라는 대국(大國)이 우리가 업신여기던 왜(倭)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 수많은 유럽의 문호들이 히틀러의 나치당에 종속되었다는 사실도 지식인들이라 더 빨리 확보되는 정보였을 것이다. 


해방될줄 몰라서 그랬을까? 자신이 20년 전 만들어 낸 인물 영채는 삼종지도가 사라질 세상이 올줄 몰랐지만 자신의 삶을 찾았다. 주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버릴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버릴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아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사실은 더 어렵다. 아는 것은 노력하면 되지만 잊는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제처럼, 내가 누구에게 태어났고, 어떻게 보낸 시간은 내가 선택해서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헤어진 연인이 자신들의 기억을 없애기 위해 의사를 찾아간다. 

이광수는 그것을 쉽게 잊었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 되든, 지식을 통해 잘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자였던 것일까.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던 역사를 알고, 새로 들어온 서양 문물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알기에 그들의 운명과 선택이 무겁게 진리처럼 느껴진 것일까. 앎이 있으나 깨달음이 없을 때 지식은 옳지 않은 포악한 무기가 된다. 


이광수는 무정하게 조국을 버린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 <무정>에 열광하던 독자들이 결말을 보고 실망한 것은, 주인공들의 깨달음이 이상일 뿐 결실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이상 역시 해방이 된 후에도 유정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가 오늘날까지 그의 <무정>을 들고 있는 이유다. 우리에게 잊고 싶지만 잊지 말아야 할, 아니 잊을 수가 없는 과거가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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